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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 에이치 Sep 04. 2022

캐리어를 열면 커피 향이 난다

커피 없이 못 사는 사람의 해외 출장 생활 (1)

커피는 나의 힘


해외 출장 생활을 난감하게 하는 것은, 낯선 언어나 익숙하지 않은 날씨, 기묘한 냄새의 음식들과 같이 작은 것들이다. 실상은 눈 딱 감고 부딪히면 해결되는 별것 아닌 것들. 그렇지만 이렇게 작은 걸림돌들이 모이면 거대한 벽이 되어 물처럼 매끄럽게 흐르던 나의 하루 생활의 흐름을 막기에 충분하다. 해외 출장은 매일매일 빠짐없이 지키던 나의 루틴들, 무의식적으로 행하던 습관들, 몸에 익숙한 편안함들을 모조리 휩쓸어 간다. 해외에 도착하면 나의 평온한 하루들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그곳에서의 안락함을 위해서는 하루 생활을 새로이 깎고 다듬어 만들어 내야 한다는 막막함에 어지러워진다.


그때 내가 찬찬히 떠올려 보는 것은, 내 하루를 기쁘게 해주는 작은 조약돌들이다. 손에 쥐고 굴리면 나를 안심시켜줄 것들. 그리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하루를 시작하게 하는 힘, 커피다.


출국 D-1, 원두 쇼핑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담아주세요, 하고 싶었어

이번 출장은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약 21일. 맛있는 커피 없이 지내기엔 긴 시간이다. 출장지 프놈펜은 이미 누적 체류기간 6개월이 넘는 곳이라 좋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 좋은 원두를 구매할 수 있는 곳들을 꿰고 있지만 스페셜티 원두의 경우 한국에서 구입할 때보다 1.5배 정도의 값을 더 내야 한다. 나는 약간의 절약과 편의성을 위해서 이번 출장에는 한국에서 어느 정도의 원두를 구매해 가기로 했다.


내가 찾은 곳은, 출국 전 친구를 만나기로 했던 장소 인근의 로스터리 카페였다. 이곳의 콜롬비아 핑크 버번 브랜디 원두를 참 좋아해 한 두 번씩 원두를 사러 들리는 곳이었다. 원래는 100g 딱 한 봉지만 구매하려고 했지만, 줄지어 서 서있는 커피 원두들에 대한 이야기를 사장님께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3종을 사버렸다. 하루에 20g 정도를 내려 마시니 약 보름 치의 커피다. 출장 기간에 비해 약간 모자라는 양이니 프놈펜에서 원두를 사 먹는 재미도 느낄 수 있겠다. 충동적 구매였지만 계산해보니 합리적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원두를 가득 사고 나니 갑자기 설레기 시작한다. 얼른 떠나고 싶구만.


출국 D-0, 캐리어를 열면 커피 향이 폴폴 풍기도록


해외 출장에 숙달된 조교. 아니, 실은 귀차니즘에 정신과 육신을 잠식당한 출장러가 짐을 싸기 시작하는 시각은 출국일 당일 자정 새벽이다. 나는 가족들이 모두 잠든 조용한 시간에 혼자 짐을 싸는 것을 좋아한다. 가족들이 깨어 있는 시간에 짐을 싸면 동생이나 엄마가 이런저런 도움을 손길을 뻗치는데 별다른 설계 없이 마구잡이로 짐을 싸는 나에겐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이날도 나는 가족들이 하나 둘, 잠을 청하러 들어가 거실이 고요해진 뒤로도 한 시간을 더 버틴 뒤 행동을 게시했다. 아니, 실은 미루고 미루다가 더는 미룰 수 없는 순간이 되어서야 터덜 터덜 캐리어를 채워 넣기 시작했다고 해야 맞겠다.

자, 이제 짐을 싸 보려고 해

가장 먼저 챙기는 건 출장 기간 동안 입을 근무복장이다. 검정 정장 바지들을 차곡차곡 쌓아 한 번에 말아 접고, 블라우스들도 켜켜이 쌓아 둘둘 말아 캐리어 한편에 몰아넣는다. 그리고 그다음은, 나의 사랑 커피를 위한 물품들을 챙겨 넣는다. 전동 그라인더는 애지중지 뽁뽁이로 잘 싸서 옷가지 틈에 밀어 넣고, 커피 원두를 이곳저곳에 던져 넣는다. 그리고 드립 주전자와 드리퍼, 여과지는 백팩에 따로 챙긴다. 무게는 얼마 나가지 않는데 부피를 많이 차지하고 깨지기 쉬워서 핸드캐리를 선호한다. 그 이후로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물품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수집해 캐리어에 쏟아 넣는다. 그러다 보면 눈이 감겨오기 시작하는데, 그때가 바로 중간 브레이크 타이밍이다. 나는 곧장 짐 싸기를 중단하고 잠에 순응해 꿈나라에 다녀온다. 그리고 아침에 다시 몽롱한 기분으로 못 다 한 짐 싸기를 마친다. 이렇게 시간을 두고 두 번에 나누어 짐을 싸는 게 나의 짐 싸기 노하우라면 노하우다. 이런 식으로 짐을 싸면 잊고 가는 물건 없이 짐을 잘 챙길 수 있다. 챙기지 못한 물건이 있으면 없는 대로도 잘 살아지고, 정 힘들면 현지에서 사면된다. 하지만 커피 없는 아침은 참을 수 없지. 커피를 위한 모든 물건은 다 챙겼으니, 됐다.


프놈펜 Day 0, 일동 제자리로

좋은 아침을 부탁해

코로나19도 끝물이 다 되어 가는지 인천공항은 꽤나 활기를 되찾았다. 비행기는 예정대로 저녁께 이륙했고 자정쯤 비행기에서 내렸다. 5개월 만에 다시 찾은 프놈펜. 전에 묵던 숙소로 돌아오니 익숙한 얼굴의 경비원이 문을 열어준다. 같은 호실은 아니지만 동일한 구조의 아파트. 서랍을 열면 올라오는 페인트 냄새마저 익숙하다. 하나 둘, 짐을 풀어두고 돌아보니 마치 떠난 적 없이 쭉 여기 이곳에 살아왔던 것 같이 느껴진다.


물론 내가 가장 먼저 가방에서 꺼내 정리한 것은 나의 커피 일동들. 전자레인지 옆 한켠에 주전자와 드리퍼, 그라인더, 원두들을 꺼내 놓는다. 인도네시아 가요 롱 베리 내추럴과,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코케 G1, 콜롬비아 안티오키아 메데진, 이렇게 삼 종의 커피를 늘여놓고 보니 도토리를 잔뜩 모아 두고 겨울잠을 준비하는 다람쥐의 기분을 알 것 같다. 내일 아침은 공복에 산뜻하게 인도네시아 원두를 내려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하니 흐뭇해진다. 벌써 새벽 한 시가 넘은 시간. 얼른 자야겠다.


프놈펜 Day 1, 첫날의 커피


프놈펜에서의 첫 아침. 일요일 아침이었지만 마음 놓고 푹 잘 수는 없었다. 6시 반쯤 알람이 울렸다. 30분 뒤에 <보이지 않는 세계들> 독서모임을 참여해야 했다. 새나라의 어린이까지 바라지도 않는다. 내가 전날 밤 일어나기로 정해둔 시간에 망설임 없이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그것마저 잘하지 못한다. 토요일 반나절을 이동에 쓰고, 다섯 시간 정도를 자고 일어난 일요일이라면, 이른 아침에 벌떡 일어나기란 더욱 어려워진다. 그렇지만 확실한 동기부여가 있다면 몸은 일으켜 세워진다. <보이지 않는 세계들>은 나에게 피로를 투정하지 않고 계속해나갈 수 있는 귀한 일들 중 하나였다. (<보이지 않는 세계들>에 대한 매거진 읽으러 가기 ➡️ 함께 읽기 - 보이지 않는 세계들)

오늘은 3초 정도 조급했어

착- 착- 착. 실내용 슬리퍼를 질질 끌며 주방으로 향했다. 나의 눅진한 몸이 커피- 커피- 노래를 부른다. 화답해주어야 한다. 나는 눈곱을 떼기 전에 커피부터 찾는 사람이다. 물론 씻기도 씻어야 한다. 아무리 온라인이라지만 사람들 앞에 얼굴 내놓아야 하니.


어젯밤 침대보 밑에서 꿈꾸었던 대로 인도네시아 원두를 꺼내 그라인더에 가득 쏟아부었다. 원두끼리 부딪히며 떨어지는 소리가 맑고 경쾌하다. 물을 올려두고 싱크대에 기대어 잠시 서있는다. 그라인더 작동하는 소리가 꽤나 시끄럽게 방을 울리다 멎자 그 아래 가라앉아 있던 물 끓어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보글보글과 달각달각 소리. 인덕션 위에서 끓어오르는 주전자가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꽤나 요란하다. 확실히 낭만적인 사운드는 아니다.


많은 부분을 전기에 외주 주었지만 그럼에도 커피를 내리는 일련의 과정은 아침의 불쾌감을 정화하는 힘이 있다. 물이 펄펄 끓기 전, 알맞은 시간에 주전자를 내리기 위해서 가만히 주전자 안 물을 들여다보고 있어야 하는 그 정적이고 지루한 순간을 좋아한다. 작은 기포가 하나 둘 올라오기 시작할 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얼른 주전자를 불에서 내리고 싶어 하는 내 마음과 다투는 시간을 좋아한다. 커피 뜸을 들이기 위한 물줄기를 커피에 부어주며 커피가 부풀어 오르는 모양새로 오늘 나의 마음과의 사투의 결과를 확인하는 순간을 좋아한다. 커피가 미동 없이 납작하면 나의 조금함에, 커피가 터질 듯이 팽창하면 나의 느긋함에 투정한다. 곱고 예쁘게 커피가 부푸는 날은, 뭐랄까. 감격스럽다. 이날의 커피는 살짝 조급했다. 신기하지. 얼른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그 마음이 커피에 나타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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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놈펜 첫 아침, 나를 벌떡 일으켜 세운 모임에 관한 이야기

https://brunch.co.kr/@hnote/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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