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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 에이치 Sep 26. 2022

커피와 열대 과일이 함께 하는 시간

커피 없이 못 사는 사람의 해외 출장 생활 (2)

해외 출장 생활의 고충


해외 출장 생활에 있어서 나를 가장 고되게 하는 것은 현격하게 줄어드는 혼자만의 시간이다. 한국에 있을 때에는 회사만 벗어나면 모조리 내 시간이었다면, 해외에서의 생활은 사무실 안에서나 밖에서나 직장동료들과 얽혀 생활하게 된다. 특히 호텔 생활을 할 때에는 잠을 자는 시간 외에는 내 시간이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조식을 먹을 때부터, 공식 일정, 중식과 석식까지 모든 시간을 함께 하게 된다. 출장자들 모두가 내 방과 똑같이 네모난 공간에서, 나와 같은 침대, 나와 같은 베개를 베고 누워 있을 것을 생각하고 있노라면 호텔방 안에서조차 진정으로 온전히 혼자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없다. 벽을 면한 옆 방에 팀원이 묵기라도 하면 어쩔 줄 몰라 초조해지기까지 한다. 나의 움직임 소리를 조금도 전하고 싶지 않아 살금살금 생활하면 옆 방의 그의 움직임이 들려오고, 그의 존재를 잊고 생활했다가는 다음날 아침 이런 말을 듣게 될 것이다. '너 어제 늦게까지 못 자는 것 같더라? 컨디션 괜찮니?'


혼자 남겨져 있을 때 가장 큰 편안함과 안락함, 안전함을 느끼는 나에게 해외생활이 주는 이러한 불편함을 어찌 감당해야 할까.


다행히도, 이번 출장은 서비스드 아파트에서 묵기로 했다. 서로의 생활소음을 청취하며 비자발적으로 사생활을 침해할 우려나 복도에서 마주쳐서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려야 하는 데면데면한 시간을 피하기 위해서 각자 다른 층에 방을 얻었다. 방은 비즈니스 호텔보다 넓은 데다가 거실과 침실에 티브이가 한 대씩 놓여있고, 욕조와 주방까지 딸려있었다. 욕조는 잘 쓰지도 않으면서 가지고 있으면 괜히 기분이 좋다. 내게 하이라이트는 단연코 주방이다. 주방이 딸린 숙소에 묵게 되면 아침식사를 혼자 방에서 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운수가 좋다면 저녁 식사까지 각자의 방에서 알아서 해결하기도 하니 최고로 반가운 공간이다. 모닝커피만큼은 꼭 챙겨 마시는 나에게, 주방이란 작은 카페이기도 하다.


오늘은 나의 이 작은 카페에서 먹은 과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아침 사과, 금사과


아침에 사과 한 알을 먹는 게 건강에 좋다는 말이 있다. 식습관에 있어서 건강보다는 맛과 즐거움부터 따지는 나에게 사과는 꽤 도전적인 선택이다. 시나몬이 살짝 들어간 달짝지근한 애플파이와 아메리카노의 조화야 환상적이지만 생사과와 커피는 두근거리는 조화는 아니지 않나? '아삭'이라는 소리조차 따끈하고 어두운 커피와는 대조적으로 필요 이상으로 경쾌한 느낌이다.


프놈펜에 도착해 첫 아침식사로 빨간 사과를 먹게 된 경위는 이렇다. 도착 직후에 장을 보러 갔던 곳이 한인 마트였는데 배는 너무 비쌌기 때문에...


커피를 머금은 입으로 사과를 사각사각 씹는 동작은 너무나 소란스럽게 느껴졌다. 사과를 씹는 과정에서 잇새로 터져 나오는 차가운 사과즙은 입에 머금은 커피를 닦달하는 것 같았다. 차분하고 조용하기를 바라는 나의 아침상을 부산스럽게 만들었던 사과.


8월이 제철, 두리안


먼저 출장 와 계신 분께 요즘(당시 8월) 두리안이 제철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그 뒤로 나는 매주 손질된 두리안을 두 덩이씩 사서 커피에 곁들여 먹었다. 두리안은 냄새가 지독하기로 명성이 자자한데 신선한 두리안은 냄새가 덜 나는 것인지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다른 음식에 혹시라도 그 특유의 가스냄새가 베일까 두려워서 늘 별도의 냉장 공간에 보관했다. 그렇게라도 너를.. 맛봐야겠으니까. 냄새보다 힘들었던 것은 다소 높은 가격. 손질된 두리안이 500g에 10불 정도 했으니 다른 과일의 10배가 훌쩍 넘는다. 물론 외국인 마트가 아니라 로컬 시장에 가서 샀다면 이것보다 저렴했겠지만...


두리안은 예상보다 커피와 잘 어울린다. 부드러운 식감과 진한 단맛 덕분에 강배전으로 볶아 낸 커피와 잘 어울린다. 군고구마 단맛과 비슷해서일까, 커피의 그 탄내와 조화가 좋다. 그리고 역시 음식은 제철에 먹어야 제일 맛있는 것인지, 대충 골라 집어 사도 늘 달고 맛있었다. 그 덕에 이번에 가장 자주 사 먹은 과일이 되었다. 역시 과일의 여왕.


아모르 파파야

파파야가 내게 맛있는 과일로 자리매김한 것은 멕시코에 있을 때였다. 친구네 어머니가 깎아 내어 주신 파파야가 그렇게 시원하고 달고 맛있을 수 없었다. 가끔 식사 때는 파파야 물(Agua fresca de papaya)을 몇 리터씩 만들어 끝도 없이 채워주시곤 했었다. 그렇게 잘 익은 파파야의 맛을 알게 된 나는 종종 파파야를 한 통 사서 직접 손질해 먹기도 했는데, 어렸던 그때는 무작정 아무렇게나 숭덩숭덩 잘라낸 뒤 씨를 하나하나 골라내느라 주방을 늘 난장으로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숙련된 파파야 기사가 되어서 껍질 까기는 물론이고 씨 바르기도 훌륭하게 잘한다. 씨 한 알 놓치지 않는다고.


파파야는 내가 생각하기에 커피와 가장 잘 어울리는 과일이다. 실온에 내어두어 미적지근해진 파파야와 커피는 정말 완벽한 한 쌍이다. 미적지근한 커피와 파파야는 동남아시아의 어느 호텔을 가도 조식으로 만날 수 있으니, 잊지 말고 한 두 조각 덜어와 먹어보시기를. 게다가 파파야는 커피를 가리지도 않아서, 강배전이든 약배전이든 입속에서 스스럼없이 어우러진다. 심지어 카누나 맥심 블랙과도 잘 어울리는 파파야...



만인의 연인 파파야는 두리안과도 잘 어울린다. 두 과일 모두 '씹는다'기 보다는   '짓누른다'는 느낌으로 입 속에 녹아드는 식감이라 그런지, 번갈아 먹으면서도 어떤 위화감도 느낄 수 없다.



프루트, 푸르



한 번씩은 사 먹어야 섭섭하지 않은 드래곤 프루트와 잭 프루트. 사실 드래곤 프루트는 예쁘다는 것 말고 어떤 매력이 있는지 잘 모르겠는 과일이다. 사과의 아삭함이 커피와 거리감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드래곤 프루트가 품고 있는 깨알 같은 씨앗들의 톡톡 터지는 식감이 커피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드래곤 프루트는 요거트와는 잘 어울리는데.


잭 프루트는 항상 손질된 것만 봐왔어서 본체가 20kg가 넘는 육중한 과일이라는 걸 얼마 전에 알았다. 손질된 과육 안에 큼직한 씨앗이 자리 잡고 있어서 나는 늘 반으로 쪼개 씨앗을 발라놓고 먹는다. 잭 프루트의 맛을 묘사하자면 문방구 풍선껌과 같은 맛인데, 이렇게 말하면 문방구 세대가 아닌 사람들은 못 알아들을까? 식감도 살짝 풍선껌을 닮았다. 약간 푹신한 듯 쫄깃하다. 커피와의 합도 꽤나 좋은데 상큼한 성질이 강해서 역시나 다크 로스팅한 커피와 더 잘 어울린다. 산미가 있는 커피와는 잭 프루트와 커피 모두가 어쩔 줄 몰라하는 맛이 된달까.


결국 맛보다는 멋


출장을 나와서 커피에 더욱 집착하는 이유는 출장 생활에는 나를 지탱하던 기둥들이 없기 때문이다. 해외 출장 기간 동안에는 출근 전 한두 시간씩 운동하며 보내던 각성의 땀이 없고, 점심시간에 책을 읽으며 보내는 막간의 휴식도 없고, 퇴근 후에 혼자 앉아 글을 남기는 나와의 대화 시간도 없다. 시차를 느끼며 평소보다 피로하게 일어나야 하는 아침, 침대에 앉아서 눈을 꿈뻑이며 업무 과중과 하루 두 번의 회식(심하면 삼시세끼 세 번)으로 얼룩질 나의 하루를 점쳐보고 있자면, 잠시 잠깐이라도 정결한 시간을 가지고 싶어서 진다. 무거운 몸이지만 조금 더 일찍 일으켜 세워서 물을 끓이고 과일을 손질하고 커피를 내려마시는 건, 그래야 조금은 내 하루에 멋이 깃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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