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안 궁금했는데요 궁금해졌습니다
나는 이 책을 덮으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사벨 아옌데는 당분간 더 읽지 않아도 되겠다.'
이 책은 올해 읽은 책 중에 가장 열성적으로 읽은 책이었다. 실제 사건과 인물들에 대해서 찾아보고, 관련한 사실들과 작가의 인터뷰를 찾아 읽고, 동시대나 사건을 배경으로 한 다큐멘터리와 영화를 다시 꺼내보았다. 그러느라 마지막 책장을 덮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열정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호기심의 끝이었다.
'아옌데는 더 읽고 싶지 않다' 라니
아이러니하다.
나는 왜 갑자기 그의 책을 영영 덮어버리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아옌데의 인터뷰 글 중 한 문장이 너무 큰 실망감으로 마음에 꽂혔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저절로 쓰였다."
빅토르 페이라는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쓰인 이 책의 작업방식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대한, 이사벨 아옌데의 답변이었다. 그는 관련된 사실들을 조사하고, 큰 줄기를 잡고 나니 그 나머지는 쉽게 채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 한마디로 나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존재가 단박에 이해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빠르게 공허해졌다. 모두들 필요에 의해 창조된 인물들일뿐이었구나. 사실들을 연결하고 꿰어줄 실로써, 또는 어떠한 계급, 인간상의 상징으로써 말이다. 리서치를 통해 알아낸 사실들 사이 붕 떠 있는 어떠한 여백을 채워줄 보강 재료 그 이상은 아니었던 걸까. 이사벨 아옌데의 그 간단한 답문 하나 이후로 이 모든 이야기와 인물들이 참 완벽한 억지처럼 느껴졌다. 흠잡을 데 없었으며, 꼭 맞는 인물들. 그 맞춤 착의들이 나를 짜증 나게 했다.
내가 직장에서 하고 있는 일, 보고서들이 떠올랐다. 하나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 온갖 자료들을 들쑤셔 찾아내는 정보들. 그 과정 속에서 논지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주저 없이 파기되는 정보들과 필요에 의해 수집되고 가공되는 정보들. 주장 하나를 완성시키기 위해 단계적으로 필요한 논리들을 맞추는 일. 나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고, 이사벨 아옌데 또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문장들이 어쩐지 차갑게 느껴지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수집된 사실들에 맞추어 설계하고 도면대로 바느질한 글. 정말 지루한 작업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그의 작업방식을 두고 보았을 때, 「바다의 긴 꽃잎」은 작가의 최대 운신 폭을 담아 만든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듣고 겪어온 시대를 모두 담고 있었으며, 자신이 살아온 지역들을 모두 훑어내는 이야기였다. 즉, 「바다의 긴 꽃잎」은 그가 겪었던 시대와 지역이 집대성된 이야기였다. 그래서 책을 덮으며, 그의 작품에 대한 호기심의 문도 완전히 닫아버릴 수 있었다.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그가 사건을 중심으로 글을 쓰는 작가이고 그가 직간접적으로 겪었던 모든 큰 사건을 담고 있는 책을 이미 읽었다면 다른 책을 더 읽을 이유가 뭐란 말이지. 인물들에게는 어떤 생동감도 감동도 없는데.
일요일 오전 9시, <보이지 않는 세계들>의 사람들과 모여 이번 책에 대해 이야기했다.
방대한 시간과 다양한 지역들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루함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는 평들이었다. 20세기 초반의 이념들의 격전지에서 일어난 굵직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이야기라 읽다 보면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과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중훈님이 시대에 휩쓸려 표류하게 되는 개인들, 운명과 태도에 대한 문제 제기 등이 새로우면서도 재미있었다는 이야기가 공감되었다.
우리는 중남미의 단편선으로 시작해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로베르토 볼라뇨를 거쳐 이 책을 읽었다. 보르헤스의 「픽션들」은 매우 관념적이면서도 환상적이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책이었다면, 로베르토 볼라뇨의 「칠레의 밤」은 우화적인 방식을 채택해 돌려 말한다. 이전 책들을 읽으면서는 역사적으로 강렬한 시대를 살아온 지역이라 표현이 이렇게 구체성이 없고 한 겹 베일에 싸인 느낌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지금까지 읽어왔던 책들이 관념적이었다면, 이 책은 역사적 사실을 깊게 표현하고 있다. 확실히 지금까지 읽어왔던 책들 중에서 가장 현실감이 뛰어나고 실체성을 지닌 책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코멘트를 해주셨던 분은 대욱님이었는데, 굉장히 공감이 되었다.
역사소설이 주는 지루한 인상이 있는데, 이 책은 인물의 인생 서사를 중심으로 풀어나가고 각 인물들이 매력적이다. 열음님은 흡인력이 있어서, 평소 책을 재미로 읽지 않는데 이 책은 매우 재밌고 즐겁게 읽었다는 말을 해주셨다. 재미있으려면 술을 마시지 책을 읽지는 않는다는 말이 너무 웃겼다. 이 발언에서 촉발되어서 책 읽는 재미를 어떤 부분에서 느끼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며 각자 책을 읽는 사유를 들어볼 수 있었는데 아주 흥미로웠다. (문학적 아름다움, 생각거리, 의미 찾기, 시간 때우기 등 다양한 이유들이 나왔다.)
나는 개인적으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외부인(외부인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는 차치하고..)이 글감 삼아 쓰는 글들을 매우 싫어한다. 대표적으로 읽으면서 강한 거부감을 느꼈던 책으로는 존 버거의 「A가 X에게」를 들 수 있다. 영국에서 나고 자라 쭉 명문학교에서 교육받아온 영국인이 중남미의 정치범의 편지글을 지어 쓰다니...? 직접 살아본 자신의 인생에 대해 말하는 것이 먼 곳의 사람들의 인생을 말하기보다 어렵단 말인가? 새로운 판타지의 장르인가? 살아보지 않은 인생으로 글을 쓰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사벨 아옌데의 글도 그리 즐겁게 읽을 수만은 없었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의 삶과 작가의 삶이 중첩되는 지점은 피노체트 독재 시절의 베네수엘라 망명생활 정도이기 때문에 그 이외의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그 현실을 진짜 살아본 사람들도 납득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좌파와 우파 지도자들이 갖게 되는 아이러니가 소설에 고스란히 담겨있기도 하다. 민중의 삶을 나은 방향으로 바꾸어보겠다는 좌파 지도자들이 쉽게 빠지는 고질적 문제 중 하나는 민중을 교육의 대상, 계몽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어쩌면 민중 혐오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민중은 결국은 우파를 지지하는 아이러니. 이런 모순점들이 소설에도 나타난다.
소설은 시종일관 특권층을 비판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들도 어찌 보면 특권층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빅토르와 로세르도 전문직 종사자들이고, 특히 빅토르는 대통령과 체스를 둘 정도로 정치 지도자와 친분 관계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약자로 묘사되지만 절대로 약자라고 할 수 없는 인물들이었던 점은 조금 아쉬웠다.
대욱님은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게 하는 요소 중 하나가 사람들이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등장하고, 또 빠르게 퇴장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다시 등장하고 이어지는 점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수많은 격변을 거치며 어떤 정서를 가지게 되고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 내는가를 짐작하며 볼 수 있어 좋았다고 하셨다. 어려운 사건에 휩쓸려 살게 되면 관계나 사랑을 미뤄두고 살 수도 있을 텐데 자신의 마음을 챙기고 관계도 가꾸며 살아가는 인물들을 보면서 삶에 대한 의지와 열정은 역사적 진폭과 진통을 겪으며 더 커지는 것이 아닐까란 물음에 일견 일리가 있단 생각이 들었다.
열음님은 소설이 거대한 서사를 가지고 이야기할 때 대사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는데, 임신과 출산과 같은 개별 인생의 사건들도 사소한 일이라고 치부하지 않고 이야기의 중요한 요소로 활용되는 점이 좋았다고 코멘트해주셨다. 우리가 사소한 일로 치부해버리는 일들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주는 이야기였다.
내가 느끼기에 이 책의 여성관은 조금 특이하다. 오펠리아의 이야기를 보면 임신과 출산에 대한 여성의 결정권에 대해서는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것 같다. 그런데 또 로세르를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소설 전반적으로 로세르는 강하고 현명하며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서 사는 적극적인 인물로 그려지지만, 로세르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가서는 여성을 남성의 삶이 비참하지 않도록 해주는 도구로 전락시켜 버린다. 여성을 두 계층으로 나누어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만으로는 살아가지 못하는 나약한 여성과 자기 인생을 만들어 살아가는 강인한 여성.
이 소설의 주인공인 빅토르가 고통의 시간을 이겨내고 살아가게 하는 것도 여성(로세르)였고, 로세르를 잃은 뒤에도 인간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게 하는 것도 여성(메체)라는 점은 양날의 검 같이 느껴진다. 로세르는 빅토르가 새 인생을 살게 한 인물로 볼 수 있기도 하지만, 빅토르라는 주인공을 완성시켜주는 보조적 도구로 해석될 수도 있다. 마지막 결말 부분에서 홀아비를 거둘 구원자로써의 메체의 등장은 너무 실망스러운 나머지, 로세르의 존재를 후자로 해석하게 만든다.
나는 앞서 말했던 이유로, 아옌데의 다른 책은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런데 모임원분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의 닫힌 마음이 금세 부끄러워졌다.
중훈님은 「바다의 긴 꽃잎」의 평 중에 이 책이 이사벨 아옌데의 책이 아니었다면 재미있게 읽었겠지만 이사벨 아옌데의 책이라 실망했다는 평을 보고, 다른 책들도 읽어보셔야겠다고 했다. 이 책도 재미있었는데, 다른 책들은 얼마나 악마적으로 재미있길래..?
여성 3부작으로 불리는 작품들에는 마술적 사실주의나 환상성이 짙다고 한다. 그래서 분명 이 책과는 다른 색의 매력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들을 하셨다.
이사벨 아옌데의 여성 3부작
1/ 「영혼의 집」
2/ 「운명의 딸」
3/ 「세피아빛 초상」
듣고 보니 나도 이사벨 아옌데의 다른 책들이 읽어보고 싶어졌다. 단 한 권의 책만으로 다른 책들의 내용과 느낌을 단언해버린 나는 얼마나 편협한지, 오늘도 반성과 감명을 받았다. 독서모임의 즐거움은 바로 이런 것.
다음 책은 마르타 바탈랴의 「보이지 않는 삶」이다. 얼른 읽어야 모임에 참여할텐데....
1. 이사벨 아옌데, 「바다의 긴 꽃잎」
https://ridibooks.com/books/509001617
2. 이사벨 아옌데, 「영혼의 집」
https://ridibooks.com/books/509001328
3. 이사벨 아옌데, 「운명의 딸」
https://ridibooks.com/books/509001322?
4. 이사벨 아옌데, 「세피아빛 초상」
https://ridibooks.com/books/5090016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