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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 에이치 Oct 03. 2022

사르카즘X사르카즘, 로베르토 볼라뇨의 「칠레의 밤」

세상에 침 뱉을 수 있는 배짱

혼자 읽기


사람들은 대체 언제 책을 읽을까? 다들 나처럼 어딘가를 돌아다녀야 할 때나 혼자 있고 싶을 때 책을 읽을까. 늘 궁금하다. 사람들이 언제, 어디에서 책을 읽는지.


내가 로베르토 볼라뇨의 「칠레의 밤」을 읽은 건 주로 공항과 비행기였다. 프놈펜 출장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이었다. 3주 동안 친구도 가족도 보지 못했지만, 마구 그리움이 느껴지는 얼굴은 없었다. 그때 나는 책을 연다. 시간은 있으되 보고 싶은 얼굴은 없고. 무언가 보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막연히 들 때. 그걸 외로움이라고들 하던데.


항상 '썩은 커피'라며 조롱하지만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사 마시는 공항 커피를 들고 적당히 시끄러운 사람들 사이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볼라뇨의 글을 읽다보면 멍해짐을 느낀다. 그러다 일순간 웃고 있다. 생각의 초점을 흩뜨리다 일순간 뛰쳐들어오는 그의 사르카즘. 이것은 지루한 글인가, 웃긴 글인가. 그저 낯설다.


비행은 내게 대체로 낯익고 지겨운 일이다. 예전에는 볼만 한 기내 영화가 있기를 바라곤 했는데, 비행기 탑승 횟수가 100회를 넘고 난 이후부터 나의 바람은 단 하나다. 지는 해나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는 시간대에 비행하기를.



오늘은 낮이 밤을 침범하는 시간이 끼어있는 비행이었다. 그 시간이 좋다. 하루 중 태양을 마주 볼 수 있는 시간은 짧다. 「칠레의 밤」을 읽으면서 틈틈이 창밖을 곁눈질했다. 페이지는 꾸역꾸역 더디게 넘어가는 한편, 우리 지구는 부지런히도 돌아가고 있었다.



온통 검은 세상에서 발을 떼었는데,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의 세상은 밝고 눈이 부시다. 추석을 앞둔 인천의 아침 공기는 차고 가벼웠다.


하루에는 낮과 밤이 있고, 한 해는 계절을 따라 흐르듯이 역사에도 날과 계절 같은 변곡과 흐름이 있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칠레의 밤」은 가장 어두운 시절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부 독재 시기의 칠레를 살아가던 문인들의 이야기를 임종을 목전에 둔 한 신부의 독백을 통해 들려준다. 언제 끝날지 모르게 길게 이어지는 밤을 살아가는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어둠이 눈에 익도록 기다려야 하는가, 눈 감고 잠을 자며 아침 해를 기원해야 하는가.「칠레의 밤」에는 어둠에 몸을 맡긴 자들이 나온다. 어둠 속이어서 빛날 수 있는 사람들, 때문에 깜깜해질수록 활개 치는 사람들 말이다. 


모임

추석을 보내고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사람들과 모였다. 


문단


나는 그저 죽음에 대한 예감 때문에 반쯤 돌아버린 할아버지의 자기 방어적 인생사 이야기라 그런지 참 나불나불하다는 인상만을 받았는데, 모임원분들이 하나 같이 단락이 나뉘어 있지 않아(이 책은 단 두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읽기 힘들었다고 이야기해 놀라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반쯤 정신 나간 할아버지의 마지막 회고를 듣는 손녀의 마음에 몰입하고 말았는지, 구조적인 특이점을 전혀 느끼지 못했었다. 


문체


비단 문단 형식뿐 아니라, 문체도 특기할만하다. 중훈님은 만연하고 두서없는 문장들로 기억을 산책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이 책을 읽는 경험은 과거의 사건들과 인상을 되짚어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중구난방 꺼내지는 기억을 경험하는 것과 비슷하다. '회상'하면 떠오르는 작품,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상이하면서도 유사한 지점이 있는 책이다.


열음님은 볼라뇨의 「아메리카의 나치문학」을 읽었을 때보다 훨씬 수월하게 몰입해 금세 읽을 수 있다고 이야기해주셨다. 아무래도 백과사전식으로 수많은 인물과 사건이 나오는 작품보다는 하나의 인물을 중심으로 쓰인 작품이라 많은 배경지식이 요구되지 않았다.


침묵


신부는 소설 첫 도입부에서 "자기 침묵, 그래 그 침묵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라는 말을 한다. 이는 진실을 은폐하며 동조하는 자들에 대한 비판의 말인데, 소설 전체를 읽고 나면 그 자신 또한 침묵하는 자를 향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독자들은 알게 된다. 그는 계속해서 글을 쓰고, 글이라는 형식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지식인인 체하지만 밤을 밝힐 수 있는 모든 의견과 발언으로부터 도피한다. 그 또한 시대 속에서 침묵하였던 문인들과 다를 것이 없다. 


이러한 비겁한 행태는 아옌데가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소식과 함께, 그리스 작가들을 다시 읽겠다며 책 속으로 도피해버리는 장면에서도 잘 나타난다.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대통령궁이 폭격되고, 대통령이 자살하는 등 잇따른 유혈 폭력 사태를 서술하면서도 그는 읽던 페이지에 손가락을 대고 평온하게 생각한다. "참 평화롭군." 시대에 동조하는 모습에서 채만식의 「민족의 죄인」이 떠올랐다며 언급되기도 했다.


마르크스주의 강의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이 소설은 전반적으로 신랄하지만, 사르카즘이 가장 빛나는 장면이 아닐까 싶었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적들을 더 잘 알기 위해 신부에게 마르크스주의 강의를 청해 군부 최상부의 지도자들과 함께 강의를 듣는다. 여러 면에서 섬뜩했다. 무엇보다도 이 강의는 두 진영 간 소통의 부재를 보여준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더 잘 알고 싶다는 피노체트의 의지는 감탄스러웠지만, 피노체트는 그 배움을 측근을 통해 해결한다. 적의에 눈이 멀어 상대방과의 대화의 의지는 없다. 과연 신부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무엇을 강의했을까 궁금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상대를 이해할 수가 있을까? 두려워진다.


피노체트의 아옌데와 피노체트의 피노체트


이 소설 속에서, 피노체트는 아옌데를 책도 읽지 않고 글도 쓰지 않으며 신문조차 읽지 않는 사람이라고 묘사하며, 반면 본인은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서너 권의 책을 썼으며 역사서, 정치 이론, 소설 등에 관심이 많은 탐독가라 말한다. 아옌데와 피노체트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들을 되돌아보았다. 피노체트가 가진 아옌데와 피노체트에 대한 이미지는 무엇이었을까, 진지하게 알고 싶어 진다. 피노체트는 어떤 정치인으로 역사에 남고 싶었을까? 여러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재밌는 장면이었다.


자가당착


지식인인 듯 우쭐대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알려주지 못하는 문인들. 그리고 민중을 위한다지만 민중을 계몽의 대상으로써 바라보는 혐오 담긴 민중운동가들의 시선. 칠레 사회가 품고 있는 자가당착을 보여주는 대표적 문제 두 가지를 잘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그것도 아주 신랄하고 웃기게.


유머


이 책의 유머러스함에 대해서, 대욱님은 직접 명시를 피하는 우회하기와 풍자 등 좀 더 간접적이고 고도화된 방식으로 할 수 있는 유머를 찾아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고 이야기해주셨다. 자신이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까먹을 정도로 특권의식에 젖어 사는 화자와 그가 가지고 있는 모순과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자기 항변, 사건들과 인물들. 매 장면이 사르카즘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이 더 재미있었던 것 같다. 볼라뇨가 이 작품 속에서 비꼬기를 얼마나 잘하는지 안 까는 게 없다.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포함해서 모조리 까버리는 그의 작품 세계.


로베르토 볼라뇨의 다른 작품들


초 장편이라 모임에서 읽지는 못했지만 「2666」을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단 그의 대표작이어서가 아니라, 좋아하고 아끼는 작가이자 록커 패티 스미스가 그의 작품 「달에서의 하룻밤」에서 자주 언급한 작품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죽음 직전까지 몰입해서 집필한 작품이라는 설명을 읽고 나니 꼭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볼라뇨의 또 다른 대표작 「야만스러운 탐정들」과 「아메리카의 나치문학」도 장바구니에 슬쩍 넣어본다.




관련된 도서

1. 로베르토 볼라뇨, 「칠레의 밤」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46

2. 로베르토 볼라뇨, 「아메리카의 나치문학」

https://ridibooks.com/books/950000156

3. 로베르토 볼라뇨, 「2666」

https://ridibooks.com/books/111015781

4. 로베르토 볼라뇨, 「야만스러운 탐정들」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836

5.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https://ridibooks.com/books/509000269

6. 채만식, 「민족의 죄인」

https://ridibooks.com/books/2914000274

7. 패티 스미스, 「달에서의 하룻밤」

https://ridibooks.com/books/75403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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