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문학 세션 #2_책과 꼭 같이 끝나지 않은 모임
문학 세션 #1_
룰루, 주말의 프놈펜. 한 버블티 카페를 찾았다. 이곳에 대해서 두 가지 착각을 했다. 첫째, 늘 텅 비어있는 1층 테이블들을 보며 한적한 카페일 거라고 생각했다. 2층에서 조용한 독서를 꿈꾸었는데 모여 과제를 하는 학생들이 꽉 들어 차 있었다. 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일종의 백색 소음이니까 괜찮다. 둘째, 라지가 벤티보다 클 줄은 몰랐다. 밥 한 공기보다 더 많은 버블은 괜찮지 않다..
주변의 소란 속에서 책을 펼친다. 이번 책은 루이스 보르헤스 보르헤스의 「픽션들(Ficciones)」. 나는 어지간해서 같은 책을 두 번 읽지 않는다. 새로 읽고 싶은 책이 이미 길게 줄 서 있는데, 읽었던 책을 또 읽을 시간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물론, 독서의 기쁨을 보장하는 검증된 책을 다시 읽으며 얻을 수 있는 즐거움과 안락함을 반박하거나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나는 그 즐거움을 경험해본 적이 없을 뿐이다. 내가 언제나 안전한 선택보다 모험과 리스크를 즐긴다는 데에서 같은 책을 두 번 읽지 못하는 습성이 기인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픽션들」을 5년 만에 다시 읽는 행위 그 자체가 나에게는 특별한 의식처럼 느껴졌다. 같은 책을 다시 읽다니! 나의 독서가 새로운 문을 열어젖히고 미지의 영역으로 발 딛는 기분!
「픽션들」을 다시 읽으면서,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행위에 대해서 나는 완전히 잘못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선 5년이라는 시간은 책 한 권을 모조리 잊어버리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나는 완전히 새로운 글을 읽는 것과 같았다. 보르헤스의 단편들은 여전히 쭉쭉 읽히지 않아 몇 번이고 같은 지점으로 되돌아와 읽는 수고를 해야 했고, 여전히 읽기 수월하지 않았다. 활자가 그대로 텍스트 이미지로 눈길만을 스치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보르헤스의 글은 어째서 문장으로, 글로, 서사로, 바로바로 이해할 수 없을까? 심지어 나는 두 번째 읽는 건데도!
물론 5년 전에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몇몇 작품은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어떤 냄새를 통해서 이상하게도 기시감을 느끼는 것과 같이(후각과 시각은 전혀 다른 감각인데도!), 그의 단편들을 읽으며 생각했다. 음, 이건 아는 맛이야.
보르헤스를 사랑하는 건 아마 이런 경험을 하게 해주는 작가이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지내고 감각해온 세상에 의구심을 품게 하는 그의 환상 세계를 사랑한다. 그가 책에 대해 품고 있는 경외심을 사랑한다. 눈이 멀고 난 이후로도 어떤 주저함이나 멈춤 없이 책을 읽고(듣고), 써 내려간(말한) 그의 심정을 사랑한다. 글로 옮겨 놓고 보니 보르헤스에 대한 나의 사랑이 얼마나 막연한지. 하지만 그가 말했다.
Las razones que puede tener un hombre para abominar de otro o para quererlo son infinitas.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증오하거나 좋아할 이유는 무한해질 수 있다.
누구나 이 말에 고개를 끄덕할 수 있지 않을까. 뭔지 모르게 어느새 좋아진 사람을 밑도 끝도 없이 쭉 좋아해 본 경험, 나만 해본 경험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또, 신형철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읽었을 때의 감각과 얼마나 다른지. 구체성 없이 막막한 사랑이기에 무한해질 수 있는 사랑도 있다.
우리는 「픽션들」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을 나누고, 각 단편들을 되짚어 보았는데 어찌나 할 이야기가 많고 다양하던지 겨우 두 편의 단편을 다루었을 뿐인데 두 시간이 흘러 모임을 급히 끝내야 했다. 두 시간이 부족하다니? 시간적 제약이 없었더라면 몇 시간이고 더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전 모임들이 늘 한 시간 내외로 마무리되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픽션들」이 얼마나 풍부한 세계를 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이하의 모든 서술은 모임에서 나눈 이야기를 기반했으며, 개별 발언자를 일일이 언급하지 못한 점 양해 바랍니다.
보르헤스의 환상세계는 현실 세계로부터 도피나 부정을 위해서 구축된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세상을 관심 있게 보고 이해하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환상이다. 현재의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그리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삶을 살아가는 날들 속에서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논리적 균열과 모순 속에서 그는 새 세상을 창조할 빛을 발견해낸다.
보르헤스의 글은 메타텍스트적 성향이 짙어서 이해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도 하고, 읽을 때마다 감상이 달라지기도 한다. 작품이 가지고 있는 철학적 메시지가 분명하게 다가오기도 하고 모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보르헤스는 이 책의 서문을 통해서 수록된 작품 중 두 편은 탐정 소설이며, 나머지 작품은 환상 소설임을 밝히고 있다. 보르헤스는 서문에서 매우 직관적이고 함축적으로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서문을 하나의 가이드 삼아서 책을 읽었다는 중훈님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탐정 소설은 범인을 추리해가며, 환상 소설은 그 환상을 구성하는 핵심을 좇으며 읽으셨다고 한다.
보르헤스는 서문에서 '단 몇 분 만에 완벽하게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생각'을 길게 늘여 책으로 쓰는 것은 '정신 나간 짓'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이러한 책이 존재한다고 가장하고 이에 대한 요약을 제공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라는 의견을 밝히는데, 참 의미심장한 말이다.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실에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학자들이 쏟는 노력의 무의미함과 필요성을 동시에 강조할 수 있다니. (필요 없지만 필요해! 그냥 있는 척 하자!) 그의 작품 세계를 간단히 요약하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세상에 대한 이해를 최대한 함축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글을 쓰는 것, 이것이 보르헤스가 추구하던 저술 활동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모임에서 다들 각주는 독서에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꼼꼼히 읽어 내려가는 분도 계셨고, 궁금한 것만 골라 읽는 분도 계셨다. 보르헤스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환상 세계에 대한 설명과 보완, 구체성 부여를 위해 각주를 많이 활용하였다. 때문에 보르헤스의 주 중에는 실제 세계에서는 진실이 아닌 내용들도 섞여 있기도 하다. 하이퍼텍스트적 특성과 각주를 통한 유머 등의 매력이 있으니 주석 역시 많은 역할을 하는 책이라는 열음님의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원자 주는 챙겨 읽으려는 편이고 역자 주는 맥락에서 배경지식이 중요하게 느껴질 때만 읽는 편이다. 각주를 읽으면서 독서 흐름이 잠시간 끊기는데 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읽을 지 말 지를 독자의 선택에 맡기고자 주석이라는 형태로 텍스트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를 읽을까 말까는 우리의 선택일 것이다.
작품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각자에게 강렬했던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러 사람에게 두루 꼽히었던 작품으로는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바벨의 도서관>이 꼽혔다.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서 기억에 남는 작품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점과 눈여겨 읽은 것, 그 감상의 방향이 확연하게 다른 점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예를 들면 혁중님(아마 개발자)은 <바빌로니아의 복권>을 꼽으며, 무작위성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면 무작위성을 어떻게 구현해낼 것인가에 대한 흥미로운 단편이었다고 감상평을 나누어 주셨다.
백과사전의 판본에 따라 존재하기도,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 '우크바르' 항목을 추적해나가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 짧은 작품은 언어 체계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생성될 수 있는 관념, 시간, 인류의 지식 체계와 진리 등 방대한 주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픽션들」의 서문 격의 작품으로 느껴졌던 단편이었다.
인식론
조지 버클리는 기존의 추상 관념, 보편자를 부정했던 철학자이다. 틀뢴의 세계는 버클리의 인식론으로부터 출발을 한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보편적인 것과 실체를 거부했던 버클리의 철학 사상을 보여줄 수 있는 세계를 탄생시킨 것 같다. 철학적 사상을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서 써내려간 보르헤스, 이런 농도 짙은 함축성이 그의 작품 매력이다.
언어
노암 촘스키가 이미 언어 체계가 정신적 사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했기에 우리에게는 익숙한 주제일 수 있다. 언어가 우리의 사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언어 체계에 따라서 다른 시각을 가지고 인식하고 사고한다는 점 말이다.
철학적 논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主와 술述이다. 그런데 틀뢴이라는 가상 세계 사람들의 언어는 명사 중심의 언어가 아니다. 언어 속에서 명사가 없어지니 공간 중심적 사고가 불가능해지며, 관념은 시간적으로 흘러가게 된다. 시간을 파악하기 어려운 세계관 속에서 시간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만들면서 소설을 통해 일종의 사고 실험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고 실험이 가능하고 유효하다는 점에서 감탄스러웠다.
시간
언어에 따른 사고의 변화, 제약에 더해서 시간에 대한 이해 또한 달라질 수 있다. 시간도 입자성을 가지고 있어서 시간 또한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고,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이야기를 쉽게 풀어쓴 책으로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가 있다. 이 책에서는 시간이라는 것이 사실상 해체되어야 하는 개념이고, 우리는 사건의 인과성을 통해서만 파악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인과의 원인이 미래, 과거는 결과가 될 수도 있는데 이러한 개념을 문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작품인 것 같다.
판본
이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판본의 백과사전은, 인류 지식에 대한 간단하고 직관적인 비유로 느껴진다. 인류가 가진 지식은 시대와 함께 축적되고, 개정되어 왔으므로 시대에 따라 다른 판본의 진리를 믿고 섬기며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지식의 전파에는 시차가 따르므로 시간뿐만이 아니라 지리적 위치이나 소속 문화권에 따라서 또 다른 판본의 진리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동시대를 살더라도 개인에 따라 다양한 진리의 판본을 가지고 교류하고 업데이트하며 살게 된다. 이것을 극적으로 축약한 비유가 백과사전이 아니었을까.
허구
시뮬라르크 시뮬라시옹(Simulacres et Simulation), 모사에서 비롯된 세계를 잘 설명해주는 작품이었다. 에셔의 작품이 떠오르기도 한다. 원래 있던 세계에서 솟아난 또 다른 새로운 세계라는 점에서 에셔의 그림을 떠오르게 한다.
이 소설은 틀뢴이라는 허구의 생산물이 현실에 침투해 원본을 없애면서, 가상의 세계가 현실을 전복 시키며 끝이 난다.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 진본성(Originality)이 흐려진 세상을 살고 있지만, 사실상 태초부터 우리는 관념적 세상을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인터넷과 VR, 메타버스 등의 기술이 이러한 특성을 강조하고 있는 게 아닐까. 우리는 원래 허구를 살아왔다.
이 단편은 세르반테스의 역작 「돈키호테」를 새로운 방식으로, 그러나 완전히 동일한 텍스트로 새로 재창조해낸 피에르 메나르의 「돈키호테」를 다룬다. 시대적 맥락에 따라서 같은 말도 다른 의미가 되어 버리는 점을 환상적으로 표현해낸 작품이었다.
재생산이냐 창조냐
....... '진리'의 어머니는 역사이자 시간의 적이며, 행위들의 창고이자 과거의 증인이며, 현재에 대한 표본이자 조언자고, 미래에 대한 상담자다.
「돈키호테」 1부, 9장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피에르 메나르의 「돈키호테」는 완전히 동일한 텍스트이다. 그러나 저자가 다르다. 각 저자가 살아온 시대와 모국어가 다르다는 점에서, 이 완전히 동일한 텍스트들이 다른 맥락을 지니게 될 수 있으며, 완전히 상이한 성질의 텍스트로 해석될 수 있다. '동일한 텍스트'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가히 코페르니쿠스적인 사고의 전환처럼 느껴진다. '하늘 아래 새로운 말은 없다'는 말에 정확하게 대치되는 주장이다.
활자는 단단하지만 텍스트는 유연할 수 있다. 이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돈키호테의 다양한 판본의 삽화를 들 수 있지 않을까. 삽화가에 따라서 동일한 작품 속의 인물과 풍경, 상황을 얼마나 다양하게 해석하여 이미지화했는지 살펴보자. 극단적 비교를 위해서 영문 「돈키호테」 초판본의 삽화와 살바도르 달리의 일러스트를 가지고 와봤다.
독자는 텍스트의 해석에 있어서 자신의 투영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우리가 가진 시대적, 사상적 제약 때문에 작품은 오히려 풍부해지고 무한해질 수 있다는 보르헤스의 지적은 매우 날카로우면서도 아름답다.
동일 텍스트의 무한한 해석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의 연장으로, 특허권과 저작권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하나의 원리가 무한한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다면, 과연 표절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을까? 지식 공유를 통한 창작 활성화를 위한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운동과 원작자의 권리의 편에 선 유희열의 표절 논란, 이 상반된 주장들이 떠올랐다. 생각해볼 만한 주제가 아닌지. 메나르는 표절 작가인가? 그의 작품에는 새로움이 없나?
시간이 어찌나 빠르게 날아가는지, 단 두 편을 다룬 채로 모임을 마무리해야 했다. 대욱님의 이야기처럼 보르헤스의 언어와 지식, 관념에 대한 생각이 매 작품마다 다양하게 녹아들어 있어 각자 느끼는 재미와 해석이 달랐는데, 이를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이해하는 과정이 너무 즐거웠다. 나머지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연말에 작은 모임을 열어 마저 나눌 수 있기를.
다음 글은 로베르토 볼라뇨의 「칠레의 밤」과 돌아오겠습니다.
1. M. C. Escher, Double Planetoid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File:Escher_Double_Planetoid_1949.jpg
2. Quijote en el Museo Casa Natal de Cervantes, Alcalá de Henares
Portal de promoción de la cultura de España, http://www.xn--espaaescultura-tnb.es/es/propuestas_culturales/cervantes-documentos.html
3. Salvador Daíl, Ilustration of Don Quixote
Salvador Dalí Museum, https://thedali.org/exhibit/discovering-dali-in-book-illustrations-part-1-2/
1. 루이스 호르헤 보르헤스, 「픽션들」, 민음사
https://ridibooks.com/books/509001091
2. 카를로 로벨리,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쌤앤파커스
https://ridibooks.com/books/1648000236
3-1. 미겔 데 세르반테스, 「돈 키호테」, 열린책들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299
3-2. 미겔 데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살바도르 달리 에디션)」, 문예출판사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73056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