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우물가에서 무리 지어 자라고 있는 물봉선이 올해 첫 꽃망울을 터뜨렸다.
잿빛 하늘은 지금 당장이라도 비를 뿌릴 듯이 험악한 인상이다. 가만 서 있기만 해도 살갗에 물이 맺혀 뚝뚝 떨어져 내릴 듯 눅눅한 아침 공기 속에 물봉선은 저 홀로 청초함을 자랑하고 있다. 매년 이맘 때면 잊지 않고 찾아오는 물봉선이 오늘따라 새삼스럽다. 심지어는 선창가 술집 작부의 입술에나 어울릴 법한 물봉선의 분홍빛마저도 사랑스럽다. 가까이 다가가 입이라도 맞추고 싶은 심정이다.
짧지 않은 병원 생활 끝에 어머니가 퇴원했다. 여태 나이 들었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는데 병원 침대에서 링거를 꽂고 누워 계신 어머니는 이미 할머니 중에서도 상 할머니였다. 새삼 어머니의 연세가 일흔을 훌쩍 넘어섰다는 사실이 가슴에 사무쳤다. 창쪽으로 돌아누운 어머니의 굽은 등에 얼굴을 파묻고 펑펑 울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때가 되면 저절로 피었다가 지기를 거듭하는 물봉선은 어쩌면 그 자체가 순리인 듯 조금의 어긋남도 없다. 일체의 거스름도 없다. 가물면 가문 대로, 물 사태가 나면 물 사태가 난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또 추운 대로 뿌리째 뽑혀 나가지 않는 다음에야 묵묵히 제 갈 길을 간다. 가물다고, 물 사태가 났다고, 덥다고, 춥다고 불평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저 흘러갈 뿐이다.
인간의 의지란 때로 아주 위대하지만, 위대한 만큼 하찮은 것일 수도 있다. 오늘 아침 와락 껴안고 주고 싶을 만큼 물봉선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