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장 가까이에 인근에서는 제법 크다는 절집이 있다. 나야 절집과 별로 친하지 않으니 아무리 가까이에 있다고 한들 갈 일이 별로 없다. 절집 앞으로 흐르는 계곡이 워낙 좋아 여름철 땀이나 식히러 가면 모를까. 사실 그마저도 번잡스러운 일이다. 계곡 좋다고 소문이 나서 그런지 한여름엔 거기 가봐야 사람 구경밖에는 못하니까 말이다.
그래도 가까이에 있으니 한 해에 한두 번은 꼭 가게 된다. 근처에서 무슨 모임이 있는 경우나 가까운 지인이 놀러 왔는데 멀리 나가기는 좀 그렇고 그저 한두 시간쯤 시간을 보내기에는 또 절집만큼 좋은 데도 없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규모만 돼도 한둘은 있게 마련인 국보나 보물 같은 것은 없어도 상관없다.
아름드리 단풍나무며 느티나무 등이 즐비하게 늘어선 절집 들어가는 길도 참 좋고, 길 옆으로 흐르는 계곡은 더 좋고... 사시사철 얼굴을 달리하며 길가에 피어 있는 들꽃 구경만 하더라도 한두 시간쯤은 금방 간다.
절집 안에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서 있는 전나무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전나무를 보면 보호수가 괜히 보호수는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어느 절집이나 다 그렇겠지만 이외에도 자잘한 구경거리가 널렸으니 그럭저럭 시간 보내기에는 이만한 곳도 따로 없다.
그날은 근처에서 모임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가 찾아왔던 것은 더더욱 아닌데 왜 발동이 걸렸는지 모르겠다. 아침부터 절집에 한번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하던 일을 팽개치고 작업장을 나선 것은 점심 무렵이었다. 밥도 먹지 않고 나선 길이지만 배는 하나도 고프지 않았다. 볼 때마다 군침을 잔뜩 흘리게 만드는 단풍나무와 느티나무도 쓰다듬어 보고,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계곡 물에 낯도 씻고...
아무 생각 없이 슬렁슬렁 걸으며 절집을 한 바퀴 돌고 난 뒤, 약수까지 한 사발 들이키고 났는데도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빼먹은 게 있나 하나하나 되짚어봐도 알 수가 없었다. 절집으로 들어오면서 단풍나무와 느티나무에 인사도 했고, 대웅전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의 맑디 맑은 목소리도 들었고, 절까지 하진 않았지만 부처님도 뵈었고, 산신각도 한 바퀴 휘 둘러봤고...
아뿔싸!
그러고 보니 아직 보살님을 뵙지 못했다. 서둘러 보살님이 계신 곳으로 내려가니 보살님은 어디로 가셨는지 흔적도 없었다. 원체 엉덩이가 무거워 쉽사리 다른 데로 걸음 하실 분이 아닌데 어찌 된 심판인지 모를 일이었다. 보살님은 물론 보살님이 서 계시던 자그마한 연못까지도 감쪽같이 사라졌으니 이게 보통 일은 아니었다. 이미 절집을 한 바퀴 휘 둘러봤으니 그 어디에도 보살님이 안 계시다는 게 분명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종종걸음으로 보살님이 계실 법한 곳을 살펴봤지만 역시나였다.
여길 오게 되면 부처님은 안 뵙더라도 보살님만큼은 꼭 뵙곤 했는데 지난봄 벚꽃이 흩날리던 날 보살님을 뵌 것을 마지막으로 이젠 영영 이별인 모양이다. 아쉽다는 말로는 설명이 안될 만큼 가슴이 허전하다.
보살님이 서 있던 곳을 메우고 널찍하게 땅을 닦아놓은 게 여기다 무슨 건물이라도 지어 올릴 본새다. 주지 스님의 속내야 알 길이 없지만 보살님을 내보내고 불사를 일으켜봐야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은 마음이다.
주지 스님은 알까? 오로지 보살님을 뵙기 위해 이 절집을 찾는 사람도 있다는 걸.
이제는 다시 못 뵐 보살님 사진 한 장을 남긴다. 벚꽃이 우수수 떨어지던 날 보살님의 온화한 미소는 참으로 아름다웠노라 추억하며...
뭔가 추억할 거리가 자꾸 쌓여 간다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추억 뒤에는 늘 회한이라는 놈이 따라붙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리움, 미련, 후회... 이런 단어들은 어쩌면 추억의 또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온 힘을 다해 사랑하지 않은 탓에 두고두고 치러야 하는 대가다.
위로를 구하고자 나선 길에 낙담만 얻고 돌아갈 수는 없어서 망설임 없이 절집 옆으로 난 산길로 접어든다. 이 좋은 가을날에 나를 위로해줄 이 하나 없지만 숲 속에는 언제나처럼 들꽃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숨이 가쁘지 않을 정도로 느릿느릿 숲길을 걷는다. 무더기로 피어 있는 물봉선 옆자리에는 이질풀이, 그 옆에는 또 선괴불주머니가, 물가에선 또 고마리가 수줍게 웃고 있다. 만나는 들꽃마다 일일이 눈인사를 건넨다. 늘 곁에서 보던 물봉선에게도, 정말 오랜만에 만난 선괴불주머니에게도. 말없는 수다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나에게 들꽃에도 이름이 있다는 걸 알게 해 준 이질풀, 자기가 피면 송이버섯이 올라온 줄 알라던 나도송이풀, 취나물의 종류가 이렇게나 많은 줄 새삼 깨닫게 해 준 미역취... 알게 모르게 쌓아온 인연만큼 할 얘기가 많기도 많다.
들꽃들이 그런 것처럼 보살님도 언제까지나 영원하리라 생각했던 듯하다. 무심히 지나가면 한낱 돌덩이에 지나지 않을 것을 눈을 맞추고 생기를 불어넣었던 것은 적어도 나보다는 더 오래 이 세상에 살아 있으리라 믿었던 탓이다. 미처 이런 일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혹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보살님을 다시 뵐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단념하는 수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모두 내 마음에서 비롯되었으니 내 마음으로 거두어들이면 그뿐이나 그게 말처럼 쉬울 리 없다. 원래 이별이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