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며칠 사이에 바깥 풍경이 확 달라졌다. 작업장에서 마주 보이는 가재봉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지 어느 틈엔가 발가벗고 울퉁불퉁한 근육질 몸매를 자랑하고 있다. 드문드문 서 있는 소나무야 원래 정조관념이 투철하니 좀체 옷을 벗는 일이 없겠지만 아직까지 진노랑의 까실한 옷을 단단히 껴입고 있는 낙엽송은 오늘처럼 찬바람이 살살 겨드랑이를 간지럽히면 못 이기는 체 스르륵 옷을 벗을 태세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작업장 앞마당으로 낙엽송이 벗어던진 옷가지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바람이 차긴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숲으로 들어가 낙엽비를 맞아도 좋을 것 같다.
수종이 다양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산에 낙엽송만 있는 건 아닌데 이즈음에는 유독 낙엽송밖에는 눈에 안 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별 볼품도 없지만 낙엽송도 이렇게 군락을 이루고 있으니 봐줄 만하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늘씬하게 쭉 뻗은 몸매가 일품이다. 이래저래 구박만 받는 처지(https://brunch.co.kr/@hnsls/17)라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좋게만 보인다.
어슬렁어슬렁 숲으로 들어가니 벌써 떨어져 쌓인 갈잎이 수북하다. 길도 없는 숲 속을 홀로 걷고 있으니 마치 딴 세상에라도 온 듯하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수북이 쌓인 낙엽들이 바스락거리며 말을 건네 온다. 미처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지만 그때마다 두 귀를 쫑긋 세우게 된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입이 간질간질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 수천 년을 이어져 내려온 숲의 비밀을 내게 전하려는 듯해서다. 모든 비밀이 다 그렇듯 알고 나면 별것도 아닐 게 분명하지만 그래도 궁금하긴 궁금하다. 정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일까?
낙엽비를 흠뻑 맞고 돌아오는 길, 올해 처음으로 세상 구경을 했음직한 개옻나무는 새로 입은 색동옷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 아직까지도 그 옷을 벗지 못하고 있었다. 발그레한 얼굴로 수줍게 웃고 있는 모습이 첫날밤을 기다리고 있는 새색시 같다. 일찌감치 옷을 홀랑 벗어던지는 것으로도 모자라 마지막으로 남은 속곳마저 내리고 자신의 가장 소중한 부분을 자랑스레 내보이고 있는 노박덩굴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개옻나무는 미처 듣지 못했나 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