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가 시작되자 아이의 모든 말은 내게 질문이 되고 답이 되었다
“점점 커지는 기쁨을 아느냐 / 수초를 닮은 물고기가 더 깊은 수심을 찾아가듯이 / 어린 새가 허공의 세계를 넓혀가듯이” 문태준 시인의 책을 읽으며 ‘점점 커지는 기쁨을 아느냐’라는 시이다. 엄마라서 그런가 시인의 수많은 시 중에서 내 마음에 콕 하고 박혔다. 등원길 버스가 출발하는데도 시선은 엄마의 품을 벗어나지 못하는 아이, 퇴근하면 내 품에 가장 먼저 달려와 안기는 아이. 시인의 시가 내 사랑의 일상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 같았다.
선배 엄마들은 아이가 크는게 아쉽다고 한다. 엄마를 필요로 하지 않는 때가 되면 더더욱. 아직 실감은 나지 않지만, 나도 조금씩 그 감정을 이해하고 있다. 스스로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휴지로 깔끔하게 뒤처리를 하는 모습을 보면 더 그렇다. 이제는 쉬쉬쉬! 하면서 나를 찾지 않는다. 한 몸이었던 아이가 독립적인 주체로 살아가는 과정을 겪고 있는데 아직까진 아쉬움보다 후련함이 크다. 그래도 조금씩은, 독립에 방해가 되는 엄마의 손길이 더해지긴 하지만.
요즘 내 가장 큰 적은 유튜브다. 정제된 언어를 주입시키고 싶었던 내 뜻과 달리 유튜브는 거친 언어로 아이의 뇌를 빠르게 세뇌시키고 있다.
“엄마 대박”
“아 나 빡쳐”
여섯살에게 나오지 않길 바라는 말들이 나올 때마다 나의 육아도우미였던 유튜브를 갖다버리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그러나 지난 정을 생각하여 바른 말과 뜻을 일러주는 것으로 대신한다.
사실 이런 단어는 뜻을 바르게 이해시키면 고치기가 쉽다. 그리고 더 예쁜말을 가르쳐주면 아이는 예쁜말을 따른다.
“대박 대신, 최고야!”
“빡쳐 대신, 으~ 화가나!”
복병은 다른 데에 있다.
포켓몬 띠부씰이 우리집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학원에 다니고부터는 언니오빠들의 유행에 영향을 받고 있는지라 띠부씰이 본격적으로 화두로 떠올랐다. 하루는 아이가 가방을 만지작거리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좋은 일 있어?”
“엄마, 있잖아 오늘 오빠가 나한테 꼬부기 띠부씰을 줬어”
“오! 기분 좋았겠다~”
“그런데 나는 오빠한테 줄 게 없었어. 그래서 편지를 써줬지~”
“무슨 편지?”
“응.. ‘나 사실 오빠를 좋아해’라고 썼어”
“음, 좋아하는 마음이 들었어?”
“응 띠부씰을 줘서 너무 좋았거든.”
좋아함의 감정을 얘기하자면 아이의 의도는 순수하고 뻔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문장 전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 사실 오빠를 좋아해”라는 전체 문장은 누가봐도 드라마에 나올만한 주인공의 대사였다. ‘사실’이라는 단어는 필요도 없고, 아이답게 “나 오빠가 좋아”라고만 써도 될 일이었다. 아이아빠는 다컸다며 웃어 넘겼지만, 나는 이 하나의 문장이 쓰렸다. 아이는 순수한 자기의 언어로 세상을 이야기 할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나 수많은 완성형 문장의 홍수는, 아이들이 언어를 뜯어살피지 못하고 뜻을 표현하는데 방해가 된다.
이런 것에 예민한 나. 나 꼰대인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