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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황 Sep 07. 2018

공공미술 작품을 고르는 방법

대학에 다니던 때, 정말 불행하게도 학부 교수와 일부 학생들의 주도로 교정에 세울 공공조각 제작에 참여하게 된 적이 있다. 당시 교수는 스무 명 남짓의 학생들에게 어떤 작품을 만들 것인지에 관한 각자의 아이디어를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성실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상당히 영리한 몇 학생을 제외한, 물론 나를 포함한 대부분은 아이디어 스케치를 가지고 교수 연구실에 모여 각자의 작품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구상과 비구상 작품이 고루 섞인 학생들의 아이디어들 중 대부분은 엉성하기 짝이 없는 미학적 논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돌이켜보면 그 이유는 아이디어 생산자가 학부생이어서가 아니라 애당초 공공미술 작품을 구상하기에 한 달이라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공공公共이라는 말의 의미를 떠올려보면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준비 기간인지 쉽게 가늠할 수 있다. 굳이 사전적 의미를 가져다 놓자면, 재미없지만, 사회 구성원에게 두루 관계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선 이 일을 기획한 최소한의 사회 구성원이라고 할 수 있는, 각기 다른 미적 감수성과 사회적 시력을 가지고 있는 스무 명의 의견을 모으는 것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약 2만 명이 넘는 대학 전체 학생의 미적 감수성과 사회적 시력 따위를 일일이 판단하고 그들과 두루 관계된 쪽으로 작품을 구상하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 교수의 지지를 받은 것은 상당히 괴상한 설정의 어떤 학생의 작품 구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예술고등학교 출신의 다른 학생의 작품이 선정됐다! 앞선 문장을 느낌표로 맺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예술고등학교 출신이라는 것의 의미는 스무 명 중 같은 학교 출신의 동기들이 적어도 네다섯 명은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 공공미술 작품의 선정 방식은 바로 이런 거다. 2만 명과 두루 관계된 작품을 구상할 수 없다면 스무 명 중 고교 동창이 가장 많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파악하면 된다. 당시 만들어낸 것은 무려 6미터 높이의 명성황후 좌상과 그 뒤에서 느닷없이 어슬렁 걸어 나오는 호랑이였다. 이 작품은 합성수지로 만들어졌고, 무려 5년이 흘러서야 철거됐다.


올덴버그-브룽겐 부부의 <스프링> 2006 

대학 밖이라고 딱히 사정이 다르진 않다. “서울시립미술관으로부터 올덴버그를 포함한 3명의 세계적 작가를 추천받은 뒤, 올덴버그로부터 시안을 제출받아 시 미술장식품분과위원회 검토를 거쳤다.” 지금은 구속된 전 대통령 이명박이 수돗물로 청계천이라는 것을 만들었을 때로 넘어가서, 당시 서울문화재단 이사장이던 유인촌이 클래스 올덴버그와 코샤 밴 브룽겐 부부의 <스프링>2006 을 청계광장의 공공조각으로 선정하면서 언론에 공식적으로 남긴 말이다. 당시 시민단체와 미술계에서는 도대체 왜 이 작품이 선정됐는지에 관한 여러 가지 잡음이 많았다. 엄연히 공공미술임에도 작가 선정을 위한 시민 공청회는커녕 철저한 보안에 가려져 진행된 밀실 행정이었다는 것을 문제삼았다. 게다가 올덴버그가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한 번도 한국에 방문해 청계천을 답사하지 않았다는 것과 작품 제작비가 35억원에 달한다는 것도 화제가 됐다. 그들은 덧붙여 이 작품이 도심 생태 복원이라는 의미를 담은 청계천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주장도 했다. 이 모든 반박에 대해 반박할 수 있다. 당시 서울시립미술관으로부터 추천받았다는 작가는 올덴버그 부부와 조나단 보로프스키 그리고 안토니오 곰리였다. 조나단 보로프스키와 안토니오 곰리는 물론이고 사실 이 글을 읽으며 청계광장에 우뚝 솟아 있는 그 ‘소라’의 원래 제목이 <스프링>이었음을 알게 되는 이들이 대다수일 거라는 확신에 차서 하는 말인데, 올덴버그라는 이름도 이 글을 읽으며 다시금 떠올리는 이들도 상당히 많을 것이다. 이건 우리의 무지를 새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미술이라는 것 자체가 원래 그렇다고 말하는 거다. 많은 사람이 지난해 서울시장 박원순이 <서울로7017>을 개장하며 설치를 강행한 논란의 공공미술 작품 ‘신발 폭포’를 기억할 테지만 작품의 원래 제목과 작가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은 천만 명의 서울 시민 중 1%도 안 될 것이고, 물론 1%는 그 작품과 관계된 사람들이거나 그 작품에 대해 글을 써야만 했던 애석한 사람들일 것이 분명하다. 사람들은 광장에 어떤 작품이 들어오는지, 어떤 작가가 만들었는지 잘 기억하지 않는다. 다만 작품이 크면 클수록, 주변의 장소와 어울리지 않아 눈에 띄면 눈에 띌수록 랜드마크의 역할을 수행할 것이고, 공공미술 작품은 그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하는지에 따라 구성원 두루와 관계를 맺는다. 가령 경향신문사와 광화문 사거리 사이의 어디쯤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면 분명 이런 말을 해본 적이 있을 테다. “그 망치질 하는 사람 보이지? 거기 앞에 있을게”라고. 지금 와서 밝히지만, 그 작품은 조나단 로보프스키의 작품이다. 


최근 서울시가 한강철교 부근에 설치해 흉물 논란에 휘말린 지용호의 작품 <북극곰> 2018

이쯤에서 공공기관이나 기업의 관계자들을 위해 공공미술 작품을 고르는 방법을 정리하자면, 우선 무조건 크고 무조건 눈에 띄는 것을 고를 것을 추천한다. 물론 작품의 의도나 간략한 설명을 청동판 같은 비싼 금속에 새기겠지만 아무도 그런 것은 인스타그램에 올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최근에 흉물 논란이 일고 있는 서울시의 한강 공공미술 작품은 여기에서부터 실패했다. 지용호 작가의 <북극곰>2018은 사람들이 놀라기에 충분히 작은 크기다. 대학원에 다니던 때, 한 학생이 만든 등신대 크기의 후드티 입은 인체 조각상이 있었다. 그 학생은 자신의 작품을 마치 아니시 카푸어의 작품처럼 광택이 전혀 없는 검은 안료를 이용해 마감했다. 학기가 끝나면 대부분의 학생은 작품을 집에 가져다 놓을 수 없다. 열 평도 안 되는 자취방에 백팔십 센티미터 크기의 조각상을 가져다 놓는 것은 말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정으로 미술대학 건물에는 어쩔 도리 없이 서 있게 된 학생들의 작품들이 도처에 있다. 상상력을 총동원해서, 밤에 컴컴한 복도 끝에 놓인 그 시커먼 존재와 마주친 상황을 떠올려 보라. 기절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 작품 때문에 기절했던 학생이 학교에 항의했던 일도 있었다. 이 모든 건 작품의 크기 때문이다. 백팔십 센티미터의 인체 조각은 사람 혹은 귀신이라고 착각할 수 있는 크기다. 논란의 <북극곰> 역시 너무 작아서 문제가 되는 거다. 밤에 그 작품과 마주친 사람들이 실제로 괴물과 마주쳤다고 착각했기 때문에 불쾌함을 토로하는 거다. 만약 그 작품이 집 한 채 만했다면, 재치있는 문구들이 해시태그와 함께 생산되고 있었을 테다. 논란이 아예 없는 것도 문제다. 당신이 공공미술 작품을 선정하는 일을 맡게 됐다면 일부러라도 논란을 일으킬 만한 작품을 고르는 것이 좋다. 아무런 논란 없이 조용히 설치되어 도대체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공공미술 작품에 대해 상상해보라. 그건 이미 공공미술이 아니다. 그런 공공 미술 작품으로는 절대로 약속 장소를 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올림픽공원 북동쪽에 있는 <안데스> 조각상 앞에서 만납시다”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 조각상은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작품의 미적 가치나 미학적 의미 따위는 그냥 전문가의 해석에 맡기면 된다. 애초에 그 전문가가 어떤 미적 감각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미적 세계관을 추구하는지 따위야 공공미술의 선정과는 별 관계가 없다. 당신이 선정할 수 있는 전문가는 이미 유명하거나 지인 둘 중 하나기 때문이다. 공공미술을 선정하기 위해 되도록 많은 사람의 의견을 반영하겠다고 공청회를 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공청회에 참여한 이들 개인의 미적 감각이나 사회적 시력, 다시 말해 다분히 사적인 영역의 의견이 반영되는 것은 이미 공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청계광장의 그 <스프링>을 반대하던 사람 중에는 서울대학교에서 도시조경과 풍수지리를 연구하던 교수도 있었는데, 그는 “풍수지리적으로 좋지 않아 국운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의견을 신문에 내기도 했다. 단언하는데, 당신이 고르게 될 공공미술 작품으로는 그 누구도 확실히 만족시킬 수 없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벌써 눈치챘을지도 모르지만, 이 문장을 만나기 위해 당신은 이 글을 성실히 읽은 거다. '공공미술'이라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공공을 위한 미술 작품을 고르겠다는 것은 당장 북한산에서 유니콘을 찾겠다는 것과 같다. 차라리 도시의 쓰레기 문제를 얼마나 획기적으로 처리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훨씬 공공公共을 위한 미美적 가치를 추구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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