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아주 근사하고 멋드러진 제안을 해보려고 한다. 줄줄이 나열하는 것을 성실하게 따라 밟는다면, 당신을 엄청난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우선 다음의 지침들을 따를 적당한 돈과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한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에 있겠는가? 더구나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거듭나는 데에 그정도 대가는 당연한 거 아닌가? 혹시 이런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면 새로운 직장이 생기거나 또다른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선, 당장 서점으로 향한다. 자기계발서 따위가 꽂힌 서가대로는 시선도 돌리지 말고 곧장 과학 도서가 있는 서가대 앞으로 가라. 과학 도서 중에서 가장 유명한 도서는 뭐니뭐니해도 칼 세이건이 쓴 <코스모스>다. 무려 700 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지만 그렇게 어려운 책은 아니다. 다만 도무지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 어렵다면 구글 검색창을 열어 ‘칼 세이건’과 ‘코스모스’를 검색해 남이 읽고 정리해둔 것을 읽어도 좋다. 이 책이 마음에 들었다면 브라이언 그린의 <엘러건트 유니버스>나 <우주의 구조>를 살 차례다. 만만치 않은 두께를 가진 책이고, 이 책들 역시 상당히 유명해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읽고 정리해둔 책이다.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 어렵다면 구글에서 검색하자. 이제 좀더 깊숙히 들어가볼 필요가 있다. 로저 펜로즈의 <실체에 이르는 길>과 리사 랜들의 <숨겨진 우주>도 사야 한다. 참고로 <실체에 이르는 길>은 1, 2권으로 되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좀더 유명한 저자의 대표 저서를 확보하는 것이다. 얼마전 타계한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가 적격이다. 이정도면 집에 있는 책장의 한 칸 정도는 충분히 채울 수 있을 테다. 이 책들을 모두 섭렵했다면 첫 번째 단계는 끝났다.
이제부터는 각종 다큐멘터리와 영화를 섭렵할 시간이다. 우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와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를 본다. 이미 봤어도 다시 봐야 한다. 앞선 단계에서 구매한 책들과 그 내용들을 상기하며 꼼꼼하게 본다면 금상첨화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마션>, 론 하워드 감독의 <아폴로 13>도 빼놓을 수 없다. 여기까지 왔다면 이제부터는 BBC 다큐멘터리 <코스모스>나 <경이로운 우주>, PBS 다큐멘터리 <우주에서의 1년>, 디스커버리채널의 <우주의 끝을 향한 여행>을 볼 시간이다. 이렇게 두 번째 단계도 끝났다. 이제부터는 우주나 물리학에 관련된 이슈들을 끌어모은 과학 잡지들을 구독하고 NASA에서 운영하는 각종 소셜미디어 채널을 팔로우 하면서 동시에 스위스의 CERN에서 출발한 입자 관련 소식들을 꾸준히 업데이트할 차례다. 그러면서 고대 그리스에서 출발해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와 현대에 이르는 과학사를 훑어보며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릴레오 갈릴레이, 아이작 뉴턴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주요한 업적들을 익힌다. 여기에 불확정성의 원리로 대표되는 미시세계의 물리 체계인 양자역학에 대해서 익힐 차례다. 디씨인사이드 물리학 갤러리나 나무위키를 기본으로 해서 각종 블로그를 돌아다니며 지식을 쌓는다. 수고하셨다. 여기까지 마쳤으면 모든 단계를 마스터한 거다. 이제 당신은 우주에 관한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 천문이나 우주 혹은 이론물리에 대한 책을 쓰거나 강연을 하거나 칼럼을 쓰면서 살 수도 있다. 이제 사람들에게 힉스입자의 발견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설명하면서 언론사와 인터뷰를 할 수도 있다. 이제부터 당신은 과학자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것을 실천해야겠다고 진지하게 마음 먹은 독자는 아무도 없을 거다. 고등학교 수학이나 물리 문제도 제대로 풀 줄 모르면서 위에서 언급한 것들을 읽거나 봤다는 것만으로 스스로를 과학자라 여기는 이들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유독 거리낌 없이, 자신있게 도전하는 분야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예술 같은 것들 말이다.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이 말은 20세기를 풍미한 독일 현대미술의 거장 요제프 보이스가 한 말로, 아방가르드 예술과 그를 표방하는 플럭서스라는 집단을 간과하면 오독의 소지가 다분한 문제적 문장이다. 1960년대에 활동하던 플럭서스 예술가들이 기존의 모든 예술과 문화를 거부하고 삶과 예술의 조화를 기치로 내걸었던 맥락과 함께 읽어야 비로소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될 수 있다”라는 문장이 지향하는 바가 드러나는데, 이런 맥락 없이 이 문장을 인용하다가 보면 “아무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거나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형태로 굴절되기도 하고 급기야 끔찍하고 천박한 발상을 예술이라 믿다가 실행에 옮겨 사회에 커다란 악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2018년 6월 8일, 테리 정이라는 예명을 쓰는, 본인을 그래피티 아티스트라고 믿던 정태용이라는 사람이 독일 정부로부터 서울시에 기증된 베를린 장벽에 “전세계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분단 국가인 대한민국, 현재와 앞으로 미래를 위하여 메시지를 전달하겠다”며 태극기의 요소들을 토대로 만든 조악한 문양을 라카 스프레이로 새긴 것이 좋은 예가 되지 않을까 싶다. 장벽의 반대쪽 면에는 ‘날 비추는 새로운 빛을 보았습니다’라는 카카오톡 프로필에 있을 법한 뜬금없는 문장을 큼직하게 새겨 놓기도 했다. 미학적으로 파산한 수준의 이 끔찍한 행위를 본인은 예술이라 굳게 믿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테러에 가까운 이 행위를 자랑스럽게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리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이렇게까지 대담한 경우는 드물지만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문장에서 용기를 얻어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정체화 하는 경우는 상당히 많다. 문제는 그들이 예술을 전공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이미 있었던 시도라서 참신하지 않거나 조형적으로 엉망이라 미학적 가치가 없어서 ‘예술적으로는’ 무의미한 행위를 늘어놓는다는 것. 국내외의 유명인사나 연예인이 예술가 타이틀을 아무렇지 않게 추가하는 것이 이따금 화재가 되는데,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경우와 같이 꽤 탐나는 그림을 그리는 경우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좀 우스꽝스럽다. 단순히 캔번스 앞에 앉아 앞치마를 두르고 그날의 느낌에 따라 손이 가는 대로 붓질을 해서 화면에 무언가를 채우는 것만으로는 예술작품을 만들 수 없다. 단순히 시대와 사회의 부조리함을 꼬집으며 바로 그것을 비판하기 위해 벽에 라카를 칠하는 것만으로는 예술가가 될 수 없다. 성실하게 시대와 예술을 관찰하고, 현재진행형의 미술사적 흐름을 읽어내고, 그에 따른 미학적 가치를 업데이트 하는 것도 작업의 일환이고 예술가에게 필요한 능력이다. 애석하게도 사실상 이 능력이 없으면 미학적으로 혹은 예술적으로 실패하거나 무의미한 것을 위해 시간과 돈과 체력을 쏟아내다가 잊혀지고 만다.
하정우나 솔비 같은 ‘그림 그리는 연예인’이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갖추는 것은 일반적으로 미술을 공부하고 한 번의 전시 기회라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많은 작가들에 비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쉽다. 연예인 뿐만 아니라 ‘소녀연합’으로 유명한 사회 활동가 홍승희 역시 자신의 정체성 중 일부를 예술가로 규정하고 있고, 본인의 활동을 예술 활동이나 퍼포먼스라고 주장하며, 많은 사람들은 거부감 없이 그를 받아들인다. 홍승희 씨가 법정에서 예술 표현의 자유를 외칠 때, 바로 그 현장에서 무죄 판결을 향한 논리를 작동시키기 위한 정치적 장치로서의 예술 말고, 그의 그래피티나 퍼포먼스가 미술사적으로 또는 미학적으로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논하지 않는다. 미술계 내부에서 비평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동시대의 작가들이 이론적인 구조를 탄탄히 만드는 것을 중요한 작업의 일환으로 삼는 것과는 사뭇 비교되지 않는가? 이 책에서 예술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것은 무모하고 동시에 무의미하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진짜 예술을 하고 있고 누군가는 가짜 예술을 하고 있노라고 폭로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누가 얼마나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는지에 관해서는 두말할 것도 없고 누구의 그림이 얼마나 그럴듯해 보이는지에 대해서도 딱히 관심이 없다. 다만 저 문제적 문장이 시대적, 미술사적, 미학적 행간 없이 성경의 구절이나 시대를 관통하는 명언 처럼 소비되면서 사회에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에 관해서라면 얼마든지 지적할 용의가 있다. 그리고 이건 가치있는 비평일 테다.
오마이뉴스라는 언론사가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시민기자’의 글로 대부분의 지면을 채우지만, 기실 모든 시민이 저널리즘을 이해하고 기자로서의 직업 윤리나 가치관을 체화하는 것은 불가능한 노릇이기에 모든 시민이 기자가 될 수는 없다. 오마이뉴스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회원 가입을 하고 정말 누구나 기사를 작성할 수 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기사를 작성하고 있지만 그렇게 쓰인 기사가 편집부를 거쳐 주요 기사로 배치되고 원고료를 받게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것도 간과할 수는 없다. 시대와 사회를 읽어내는 안목과 그것을 글로 정리하는 능력, 다루는 주제에 따른 적절한 분량의 글로 줄이거나 늘리는 기술은 쉽게 얻을 수 있는 형질의 기능이 아니다. 모든 시민이 이런 기능을 가췄을 리 만무하다. 어도비 사가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를 개발해 사진 보정과 디자인 작업의 장벽을 무너뜨렸지만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사진가가 되고 디자이너가 될 수 없다. 스마트폰으로 4K 화질의 영상을 매일 찍을 수 있고 쉽게 편집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영화 감독이 될 수는 없다. 어떤 학위가 기준이 된다는 것을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전기 화학의 기초를 다진 마이클 패러데이는 정규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과학자다.
이제 다시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말로 돌아와서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 말은 1960년대에, 극단적이고 반예술적인 전위예술가 집단인 플럭서스를 대표한 예술가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될 수 없다”는 인식을 향한 조소 섞인 도전이었고, 이 발칙한 도전이 예술계에 의미있는 파란을 일으키던 시대는 일찌감치 막을 내렸다. 그러므로 2018년 오늘 우리 사회에서라면, 이 말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 가능성을 확인할 때와 이 말이 발화될 자유를 위해서만 의미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말은 민주주의적이다. 누군가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주장하거나 본인의 행위를 예술 활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 말이 가지고 있는 민주적 가치를 고스란히 계승하며, 그것은 동시에 누군가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자유이기도 하다. 다만 그 주장과는 관계없이 예술적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되도록 진지하게 논할 필요가 있다. 그나저나 그 베를린 장벽은 원상복구도 불가능하다는 뉴스를 접했다. 개나 소나 예술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취미는 취미란에 적고 장래희망은 장래희망란에 적고 직업은 직업란에 적어야 하지 않겠나.
* 이 글은 미디엄에도 게재했습니다. https://medium.com/eltitnu/개나-소나-예술가-d82e3732cdd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