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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황 Aug 24. 2018

386 세대는 어떻게 사회의 악이 되는가

“우리편의 실수입니다. 너그럽게 생각합시다!”


‘우리편’이라는 것에 관한 비평을 시작했던 것은 광화문에서 매주 몇 만의 시민이 촛불을 들었다는 것이 뉴스의 메인을 채우던 지난 2016년과 2017년의 겨울부터였다. 하나의 그림으로부터 시작된 이 비평은 그림이 담고 있는 정신과 그 정신을 공유하는 사람들로 뻗어나갔다. 2017년 1월, 표창원 의원 등의 주최로 국회에서 미술 전시 하나가 열렸는데, 유명 갤러리도 미술관도 아닌 국회에서 열린, 큐레이터나 기획자가 만든 전시도 아닌 이벤트성 전시가 세간의 화재가 됐던 이유는 이구영이라는 작가의 <더러운 잠>이라는 그림 덕이었다. 그림은 1863년에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를 패러디해 침대에 누운 매춘부를 박근혜로, 흑인 하녀를 최순실로 바꿔놓았고 두 인물의 뒷편에는 세월호로 보이는 배가 침몰하고 있는 장면을 연출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으로 통쾌함이나 혹은 그 언저리에 있는 감정을 느끼며 좋아하던 때, 이 그림을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두 부류였다. 하나는 태극기를 들고 열심히 박근혜 씨를 옹호하는 쪽, 다른 하나는 정치적 입장과는 별개로 그 그림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공유 하는 정신이 싫은 쪽. 후자의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이 그림을 밀어냈는데, 성별을 특정할 필요가 없는 당시 대통령 박근혜 씨의 나체를 그려 여성을 성적 대상화 했다는 것과 세월호의 침몰 장면을 아무렇지 않게 묘사하고 있 다는 것이 손에 꼽을 만한 이유였다.


국회에 전시됐던 <더러운 잠>


나는 당시에 좀 다른 측면에서 불편함을 느껴 비판하기 시작했다. 해당 전시는 이른바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작가들이 모여 시국을 비판하는 각자의 작품들을 가져다 놓은 형태로, 그동안 블랙리스트 때문에 제대로된 작품 활동을 할 수 없었던 작가들에게 일종의 멍석을 깔아준 거였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그들이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정말로 블랙리스트에 의한 피해를 입어 작품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었을까? 물론 이명박과 박근혜가 대통령 집무실에서 일을 하던 9년 동안 실제로 많은 문화 예술 사업이 축소되고 예산이 깎이거나 어떤 전시나 작가 지원 프로그램 등에서 노골적으로 밀려나는 등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은 작가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모든 작가들이 그런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애초에 블랙리스트라는 것이 작품의 주제나 성격을 가지고 작성된 것이 아니라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거나 세월호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서명에 동참한 이들을 토대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 지독했던 9년의 시공간에서도 좋은 전시와 좋은 공연은 꾸준히 있었고 좋은 책과 좋은 영화들 역시 묵묵히 만들어졌다. 국회에서 전시를 했던 그 작가들이 누군지 나는 모른다. 그들의 작업실이 어디에 있고 그들이 어떻게 작업을 해왔는지에 관해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갑자기 나타나서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쏟아내고 듣고 싶은 말만 듣는 것으로 보였다. 그게 영 불편했다.


비슷한 현상은 여러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광화문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던 당시 ‘시위를 해 본 적 없는 젊은이들을 위해’ 자신의 노하우를 구구절절 적어 소셜미디어에 퍼뜨리던 어떤 50대 남성이 있었다. ‘시위는 언제 폭력적으로 돌변할지 모르니 운동화를 신고 나와라, 짐은 최소화 해야 한다, 본인이 먹을 식수를 챙겨 라, 50대로 보이는 선배들 옆에 붙어 있어라...’와 같은 내용의 글이었다. 그 남성이 지금까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시위에 나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어떤 일을 하고 살아왔는지도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갑자기 나타나 스스로 선배임을 자처하기 시작한 아저씨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영화 <1987>이 개봉됐을 때도 1987년 당시 부당한 권력의 남용에 맞서 싸웠다고 증언하는 이들이 여기저기에 나타났는가 하면 페이스북에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영화 <1987>을 찬양하는 글이 줄줄이 올라와 타임라인을 채우기도 했다. 이 영화가 촉발한 80년대 학 번들의 과거 회상 열풍이 순식간에 잦아들기 시작했던 것은 엉뚱하게도 한 재수학원의 광고 때문이었다. 서울의 유명 재수학원인 종로학원에서 고 박종철, 이한열 열사가 다녔던 학원이라는 것을 마케팅 수단으로 삼아 광고를 했는데, 도를 넘은 이 광고에 대한 비난이 일면서 전체적으로 자제하는 분위기가 형성됐고, 일각에서는 이른바 386 세대의 현재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조소 섞인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당시 마주친 기막힌 댓글 하나가 뇌리에 강하게 박혔다.


“우리편의 실수입니다. 너그럽게 생각합시다!”


국회에 전시됐던 그 그림을 두고 강한 비판을 했을 때도 비슷한 반응을 보인 사람들이 꽤 있었다. 아예 노골적으로 피아식별을 하라는 둥 내부 총질 하지 말라는 둥 하며 비판을 가하는 것 자체에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술 더 떠 진보가 언제나 분열 때문에 망했다며 화를 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 문장 안에 어쩌면 저 무리를 모아 바느질 하는 정신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편과 실수 그리고 너그러움이 가지고 있는 그 엉성하고 그릇된 연대의식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방식으로 어떤 세대가, 어떤 무리가 연대하고 있는 거라면 이 사회는 분명히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고 있을 것이고 우리가 정의라고 부르는 것은 이미 오작동을 일으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도무지 제대로된 비판을 가할 줄 모르는 이 정서에 아주 잘 어울리는 말이 있다. 이제는 사자성어가 되어버린 내로남불 말이다.


문제의 종로학원 광고


1984년생인 나에게 영화 <1987>은 과거를 바탕으로 만든 신파극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얼마나 맹렬하게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웠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평가할 만한 것이 아니지만 그건 훌륭한 일 이었고 본받을 만한 일이었다. 허나 그들이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라면 얼마든지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이와 관련해 꽤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한국전쟁 당시 고향을 떠나는 과정에서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부산에 와서 정착한 후 파독 광부가 되었다가 베트남전에도 참전하는 등 한국의 현대사와 생을 함께한 어떤 남성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국제시장>에 이화정 기자는 “아는 슬픔”이라는 평을 했고 박평식 평론 가는 “구슬픈 젓가락 장단”이라는 평을 했다. 둘 모두 혹평이다. 그런데 영화 <1987>에는 각각 “스필버그 영화 처럼, 단단하고 묵직하다”, “뜨겁고 아프다, 감사”라는 평을 남겼다. 내가 보기엔 둘 모두 신파인데? 이보다 좀더 극적이고 낯뜨거운 일화도 있다. 2018년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남북 단일팀 구성이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때다. 올림픽 개막을 코앞에 두고 갑자기 북한과의 단일팀을 구성한다는 것은 4년에 한 번 열리는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훈련해온 비인기종목 선수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이 계획의 주체는 다름아닌 국가, 그러니까 정부였고 피해를 입을 입장에 놓인 이들은 개인이었다. 당시 20대와 30대를 중심으로 반대 여론이 거세게 일어났다. 정치적 입장과는 관계 없이 온라인 공간 여기저기에 국가에 의한 무조건적 개인의 희생은 부조리한 일이라는 것을 골자로 삼은 이야기가 올라왔다. 이 발상이 민족주의적이며 한편으로 국가주의적이라면서 이런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것이 다름아닌 파시즘이라는 날카로운 비판을 하는 청년들이 많았다. 나는 이때 전 장관이자 전 국회의원인 유시민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국가주의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 JTBC


유시민은 한 라디오에 출연해 “국가주의란 국가와 개인과의 관계에서 국가를 우선에 두는 것이며, 국가주의의는 국가를 위해 개인은 응당 희생할 수 있어야 하고, 국가를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어야 하고, 심지어 국가를 위해서는 반드시 제한해야 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덧붙여 시민들 개개인의 복지나 개개 인의 이익과는 차원이 다른, 국가의 이익 혹은 전체의 이익이라는 것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국가주의라고 말하며 국가주의자들이 옹호하는 국가보안법에 대해, 공익이 사익에 우선한다던 히틀러의 예를 들어 국가주의가 개인의 자유와 권익을 침해하는 파시즘에 대해 비판했다. 심지어 그는 출판기념회에서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서 또 주권자로서 민주주의를 위해 일상 생활에서 이른바 미시 파시즘, 즉 비민주적인 여러 문화와 관행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학에서 전통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사발식 등을 거부하고 직장에서 스스로 독재적 행태를 보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며 가정에서도 작은 폭력이라도 행사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던 그가 JTBC의 썰전에서 올림픽과 남북 단일팀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 하면서는 북미 아이스하키 유명 선수들이 출전하지 않는 상황이라 아이스하키의 흥행이 저조할 수 있기 때문에 국제아이스하키연맹 차원에서 적극 환영했다는 말을 꺼내더니 “선수들의 출전 시간이 줄어들 지언정 출전 가능성은 열려있다”고 국가를 대변했다.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선임된 감독의 입장에선 곤란한 상황일 수 있다는 지적에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머리 감독이 이 정도는 괜찮다고 했대요~”


미시 파시즘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유시민이 갑자기 이 국가주의적 행태를 대변하면서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는 정도를 구분짓는 것은 ‘우리편의 실수입니다. 너그럽게 생각합시다!’라는 댓글과 정확히 포개진다. 사실 본인 도 이런 자신의 ‘내로남불’을 의식했는지 곧장 2030세대의 공정성에 관한 감각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해당 논란에 대해 단일팀을 밀어붙인 국가주의자들이 듣기에 거슬리지 않는 말과 그것을 비판하는 청년들이 듣기 좋은 말을 번갈아 한 번씩 하며 우리편과 실수 그리고 너그러움이라는 그 그릇된 연대의식을 마음껏 드러내며 본인 역시 거기에, 그 연대 내부에 속해있음을 확인시켜준 셈이다.


2018년 현재 30대인 나의 눈에 비친 저 ‘아재’들의 문제는 바로 이런 것이다. 이 사회 어디에든 갑자기 나타나 자기들끼리 뭉쳐다니며 주인공을 자처하고 선배를 자처하고 우두머리를 자처하고 화자를 자처하고 전문가를 자처하고 대변인을 자처하다가는 본인들이 주장하던 가치관에 반하는 언행들을 해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논란이 일렁이면 서로가 서로를 열심히 변호하며 연대를 다져간다는 것. 그 연대를 통해 거대한 집단을 가능하게 만들고 어떤 세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을 지켜내면서 스스로 존재의 당위를 확보한다는 것. 이 중심에 우리편과 실수 그리고 너그러움이라는 허술하고 나태하고 낯뜨거운 정서가 있다는 것. 이 정서가 얼마나 팽배한지, 얼마나 단단한지를 살펴보면 이 세대가 얼마나 유해한지에 대해서도 파악할 수 있으리라.



*이 글은 미디엄에도 게재했습니다. https://medium.com/eltitnu/옥탑방에선-아무것도-할-수가-없다-3e47efd97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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