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기독교인이 다 그런 건 아니다.”
사회와 정치 그리고 문화를 포함한 오늘날의 한국에서 기독교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방법은 없다. 여러 가지 범죄를 저지르고 지금은 구속된 전 대통령 이명박이 십수 년 전 서울시의 시장이던 때 한 교회의 행사에 참여해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하겠다”고 했던 것을 돌이켜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기독교인이 아닌 이들로부터 논란이 일어나긴 했지만 딱히 그 말이 이명박의 정치 행보에 걸림돌이 된 적은 없었잖은가. 오히려 서울시를 봉헌한 결과 대통령에 당선되는 응답을 받았다고 믿는 편이 합리적이다. 이건 한국 기독교 역사가들이 눈여겨봐야 하는 일인데, 십일조도 아니고 원고료도 아니고 강의료도 아니고 그렇다고 벤츠나 베엠베도 아니고 또 자기 명의로 되어있는 부동산도 아니고 서울시 자체를 봉헌하겠다던 기독교인의 출현이 어떤 결과물을 만들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곱씹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아, 물론 이명박이 구속된 것은 신의 뜻이나 그의 신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명박이 서울시를 봉헌하겠다고 했던 때, 나는 서울에 있는 한 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있었다. 아직도 기독교라는 낱말과 마주치면 그때 만났던 교수 하나가 자연스럽게 따라 나온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내 주변엔 그렇게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 교수는 나에게 기독교인의 표본 같은 존재가 됐다. 그는 이따금 교수 연구실에 학생들을 불러 모아 ‘어디서 모셔온 만나기 힘든 분’을 소개하고는 안수기도를 청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어디서 모셔온 만나기 힘든 분’은 방언을 하며 열심히 기도했다. 그런가 하면 학생들과 기도 모임을 만들기도 했고 연구실에 목사나 전도사를 불러와 차를 마시는 일이 많았다. 술과 담배는 입에 대지도 않았고 언제나 진지했다. 그는 특히 학교 근처의 식당들에서 만드는 음식의 간을 싫어했는데, 한 번은 교내 행사 후 마련된 회식 자리에서 적어도 네 명이 함께 먹어야 하는 닭도리탕에 느닷없이 물을 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휴, 이렇게 짜게 먹으면 몸에 안 좋아.”
이렇게 사랑이 넘치는 그는 항상 성실함이나 꾸준함이 예술가에게 가장 좋은 도구라는 이야기를 하고 다니면서 전시나 학기말에 닥쳐서 밤샘 작업을 하는 학생들을 꾸짖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에 그가 다급하게 십수 명의 학생들을 불러다가 자신의 작품 제작에 투입시킨 적이 있는데, 그때까지 그토록 다급하게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긴장했던 모습이 역력한 그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밟힐 정도로 선명하게 떠오른다. 전시를 하루 앞두고 작품을 완성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지배당한 불행한 예술가의 얼굴은 쉽게 잊을 만한 형질의 것이 아니다. 아무튼 그는 또 느닷없이 열댓 명의 학생들에게 노동을 시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상황도 겪어봐야 전시를 할 수 있는 거야.”
조금 얌체 같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정도로 그를 의미 있는 존재라고 새겼을 리 만무하다. 내가 대학원에 입학했던 해 3월에 있었던 일을 빼놓을 수 없다. 3월은 학부 신입생들이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술에 취해 있는 시기였고, 항상 학구적인 이미지를 추구하던 그 교수의 눈에 그 모습은 마치 사탄의 무리에 희롱당하는 어린 양 떼로 비춰졌던 모양이다. 하루는 신입생들을 죄다 모아서 금속 조각을 위해 마련된 작업실에 가더니 철로 만든 자신의 작품을 그라인더로 연마하라고 지시했다. 느닷없는 이 지시에도 불구하고 신입생들은 진지하게 교수의 말을 들었는데, 그날 교수가 신입생들에게 했던 말을 옮기자면 대충 이런 말이었다.
“너희들한테 직접 그라인더 쓰는 방법을 알려줄게.”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가 지시한 노동의 대가로 돈을 받아본 학생은 아무도 없다. 그를 얌체라고만 표현할 수 없는 건 그가 상당히 야비하고 음흉했기 때문이다. 그는 학생들 간의 연애에 간섭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누가 누구와 연애를 하는지, 누구와 누가 언제 헤어졌는지 속속 알기를 원했고 수업 중에 연애 중인 학생들에 관해 이야기 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않았다. 그게 학생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거라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수업 중에 예술가로서 작품을 구상하는 단계와 작품을 제작하는 단계 또 그런 때 가져야 하는 예술가의 태도에 대해 설명하면서 비밀 연애 중이었던 두 학생을 가리키며 이런 질문들을 쏟아내기도 했다.
“너는 쟤를 왜 좋아하니?”
당황한 학생들이 우물쭈물하며 제대로 된 대답을 내어놓지 못하면 “예술은 왜 하니?”라는 질문으로 환원해 결국에는 모든 것이 학생들을 훌륭한 예술가로 만들기 위한 자신의 교수법이라는 결론과 강제 만남을 주선하는 식이었다. 동성애를 비롯한 성 소수자에 대한 편견은 말할 것도 없다. 나는 학교에서 세계관과 미적 감각을 아주 깊이 나눌 수 있는 동갑내기 동성 친구와 줄곧 붙어 다녔는데, 둘이 술을 마시거나 같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목격하면 으레 “둘이 사랑까지는 안 된다”는 걸 농담이라고 뱉어댔다.
그는 여전히 대학교수로서 또 개신교 교회의 장로로서 이 사회의 지성과 문화와 정신적 기제가 작동하는데 일조하는 중이다. 크게든 작게든 아주 열심히 임하고 있고, 그 정신의 축에는 기독교 신앙이 있다. 그렇기에 그의 모든 말과 행동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하고 있다. 물론 그는 얌체이자 야비하고 음흉하고 파렴치한 사람이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와 문화를 관통하는 기막힌 한 문장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문장이 바로 신앙생활의 근간이자 원동력이라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이 문장이 없으면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다.
“모든 기독교인이 다 그런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