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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황 Sep 10. 2018

경복궁에 무료로 입장하는 방법

잉글랜드의 의복 예절을 일일이 따져가며 남성용 수트를 차려입는다는 것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우선 날씨가 아무리 덥더라도 재킷을 벗어 던지고 셔츠 차림으로 있어선 안 된다. 원래 셔츠는 내복이기 때문이고, 재킷과 셔츠 사이에 베스트를 괜히 입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반팔 셔츠는 허용되지 않는다. 재킷 밑단의 길이는 팔을 늘어뜨렸을 때 손등 중간에 위치하도록 맞춰야 하며 소매의 길이는 셔츠가 약 2cm 정도 보이도록 맞춰야 한다. 바지의 길이 역시 구두를 살짝 덮어 걷거나 서 있을 때 양말이 보이지 않도록 맞춰야 하며 검은 구두를 신었을 때는 검은 벨트를, 갈색 구두를 신었을 때는 갈색 벨트를 착용해야 한다. 넥타이의 끝은 반드시 벨트 버클의 중앙에 살짝 닿도록 길이를 조절해 매야 한다. 하지만 이걸 일일이 지킬 이유는 없다. 적어도 영국 왕실에서 주최하는 자선파티 따위에 초대되지 않았다면 말이다. 물론 이 모든 복장 예절을 다 지켰다고 해도 버킹엄 궁전에 공짜로 입장시켜주진 않는다. 복장 예절이라고는 대통령도 지키지 않는 요즘, 수트를 완벽하게 갖춰 입은 사람에게 버킹엄 궁전 무료 입장 혜택을 준다면 어떨까 싶지만 아무래도 영국의 공무원들은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그런 의미에서 종로구청의 공무원들은 상당히 부지런하다.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관광지인 경복궁에는 한복을 입고 입장할 경우 3천 원인 입장료를 받지 않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무려 116개나 되는 종로구의 식당과 협의를 맺어 한복을 입은 이들에게 10% 할인 혜택도 주고 있다. 이유는 한복의 세계화와 대중화에 기여하기 위해서인데, 한복을 입은 관광객들에게 이 혜택을 준 이후로 경복궁 근처에는 상당히 많은 한복 대여점이 생겼다. 그곳에서 대여해주는 한복은 조선의 전통 한복은 물론 완전히 새로운 형식으로 개량되거나 재해석된 디자인의 한복까지 다양해서 한복의 세계화나 대중화에 기여한다는 목표에 상당히 근접한 것으로 보일 정도다. 수백 년 전에 왕이나 입던 옷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스타일의 한복을 보고 있자면 근대화라는 것의 의미와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의 의미에 대해 떠올릴 수 있게 된다. 기생들이 입던 것만 같은 옷을 입고 경복궁을 누비는 사람들을 보면서는 시민 혁명 시대 이후로 지금까지, 고궁이라는 특수한 장소가 모두를 위한 관광지로 탈색되어온 과정에 관한 즐거운 상상도 하게 된다. 종로구의 공무원들도 이런 성과를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들은 목표를 이룬 후에 당연히 다음 목표를 설정하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렇게 성실한 공무원들이 있는 이상 한국의 전통문화는 사라지지 않고 계승될 것이 분명하다.


종로구의 공무원들은 이미 이룬 목표를 확장해서, 앞으로는 전통 한복이 아니라면 무료 혜택을 주지 않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는데, 이 계획에 따르면 개량한복을 입은 사람들은 고궁에 공짜로 입장할 수 없게 된다. 당연히 10%의 밥값 할인도 사라진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경복궁에 공짜로 입장할 수 있는지 정확히 숙지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한국의 전통을 살리는 것이지만 사실 이런 표현에 속아서는 안 된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사실상 2차대전을 전후로 시작되었다고 봐야 하므로 한국의 전통이라면 대부분 50년대 이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때문에 이들이 말하는 ‘한국의 전통’이라는 것에 현혹되어 청바지를 입고 프로야구팀의 모자를 쓰고 가면 안 된다. 물론 등산복을 입어서도 안 된다. 프로야구팀의 모자나 등산복은 명백히 한국의 전통문화지만, 이들이 원하는 것은 사실 조선의 전통문화다. 고려나 백제, 고구려, 신라 혹은 가야의 전통 복장을 입어서도 안 된다. 정확히 조선시대의 의복을 입어야 한다.


조선의 전통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양반과 상인, 그러니까 귀족과 천민의 구분이다. 이를 구분하지 않고 조선의 전통을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조선시대에는 신분의 귀천에 따라 의복 규제가 있었기 때문에 종로구의 공무원들이 원하는 전통 형식을 따르기 위해서는 우선 본인의 족보를 따져봐야 한다. 본인이 만약 양반 출신 집안의 자손이라면 다행스럽게도 그에 맞는 한복을 구하기 아주 쉽다. 아무 한복집에 가서든 한복을 맞추면 무조건 양반들이 입던 한복을 지어주기 때문이다. 문제는 본인이 양반의 자손이 아닐 경우다. 상민의 경우엔 갓을 쓰지 않았고 상투튼 머리를 그대로 내놓고 다니거나 패랭이 따위를 주로 쓰고 다녔다. 겉옷은 흰색만 허용되었으며 이런 도포를 창옷이라 불렀다. 신발은 짚신만 신을 수 있었다. 문제는 한국에서 조선의 상민 복장을 구하기가 양반 복장을 구하기보다 훨씬 어렵다는 거다. 이런 옷을 구하느라 발품을 팔 바에야 삼천 원을 내고 입장하는 편이 합리적이다.


그렇다.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한국의 전통, 특히 한복의 멋이니 하는 것들은 죄다 조선시대 양반의 것들만을 의미한다. 알록달록한 비단으로 맞춘 당시 귀족이나 왕족이 입던 옷들만을 전통으로 여기겠다는 심보다. 그러려면 왕실의 법도는 물론 조선 사대부의 법도와 체통 역시 지켜야 한다. 외출 시에는 반드시 두루마기를 걸쳐야 하며, 저고리의 동정니는 흐트러짐 없이 입어야 하고, 대님이 보이지 않도록 골반에 엉거주춤 잘 걸쳐 입어야 한다. 영화 <관상>을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남성인 경우 반드시 갓끈이 있는 갓을 쓰고 외출해야 한다. 이 영화에는 수양대군이 야밤에 갓끈을 빌리러 김종서 대감에게 찾아갔으나 빌려주지 않아 다툼 끝에 죽이는 장면이 나올 정도니, 종로구 공무원들에게는 아마 가장 중요한 전통일 것이 분명하다. 2020년대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소중한 조선 왕족과 귀족의 전통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종로구의 공무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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