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에 들어서며 치킨집이 상당히 많은 지분과 의미와 기록들을 한꺼번에 휩쓸어 가져갔지만 조개구이집이 엄청나게 많은 지분을 차지하며 닭튀김의 독주를 암시하던 때가 있었다. 1997년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이들이 급박한 상황에서 짧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은 적은 돈으로 창업해 ‘사장님’이 되는 거였고, 그들이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중후반까지 외식 사업에 뛰어들며 조개구이를 많이 선택했던 탓에, 물론 과장을 조금 보태서, 당시 형성된 먹자골목엔 두세 집 건너 하나가 조개구이집이었을 정도다. 그러다 2000년대 중반에 입대를 앞두고 인천의 한 부두에 있던 엄청나게 큰 조개 도매상에서 직접 조개를 샀던 적이 있다. 굳이 그 도매상에서 조개를 사와 집 옥상에 친구들을 초대해 손수 구워 먹었던 이유는 이미 2000년대 중반 무렵에 조개구이집들이 과도한 가격 경쟁을 하다가 외식으로서의 매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옆 가게보다 싸게 팔아야 손님을 끌어들일 수 있었으므로 가격을 점점 내리다가 마지노선에 내몰린 ‘사장님’들은 소자와 중자와 대자의 양적 차이를 교묘하게 흐트러뜨리는 방식으로 장사했고 그럴수록 대중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기 전까지 ‘과장님’이나 ‘부장님’이었던 ‘사장님’들이 조개구이라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조개는 익으면서 알아서 입을 벌리고, 면장갑을 낀 손님들은 알아서 조개를 먹는다. 특별한 조리법도 노하우도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창업을 택한 이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뿐만 아니라 선택의 여지도 없었지만) 종목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유행처럼 개업한 조개구이집들은 유행처럼 폐업한다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물론 그 사장님들이 모두 사라진 건 아니다. 그들은 다시 찜닭집이나 노래방을 경유해 치킨집을 운영 중이다. 서글프지만 이렇게 많은 ‘사장님’들이 유행에 편승해 가게를 열고 닫는 것을 반복하는 동안 득을 본 것은 건물주들이다.
조개구이집에 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은, 어처구니없게 읽히겠지만, 인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고, 정확히는 조개구이집과 똑같은 모습으로 유행하고 있는 인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인문학이 얼마나 유행인지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어 보이지만 굳이 부연설명을 하자면, 우리가 서점이나 텔레비전 그리고 블로그나 소셜미디어에서 인문학이라는 낱말과 마주칠 확률이 이제 버스나 지하철에서 투블럭컷 스타일로 머리를 자른 남자와 마주칠 확률과 비슷할 정도가 돼버렸다. 심지어 구청이나 동사무소에서 인문학 강의를 여는 것도 쉽게 볼 수 있는데, 이 현상의 배후에는 조개구이집을 개업했던 사장님들의 사정과 비슷한 형질의 뭔가가 있다. 사장님들 중 대부분이 자영업이나 외식산업에 대해 별로 고민하지 않았듯 지금 열심히 인문학을 입에 올리는 이들 중 대부분이 인문학에 대해 별로 고민하지 않는다. 사장님들 중 대부분이 조개의 종류나 생태, 품질을 결정하는 여러 가지 요인에 대해 잘 몰랐듯 지금 열심히 인문학을 입에 올리는 이들 중 대부분이 인문학을 잘 모른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인문학 장사꾼들을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그 많은 사장님들과 직접 비교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낄 독자들도 있겠지만 그 근간에 본인의 행위 자체에 대한 필연적이고 막중한 고민이 없다는 공통점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고개를 돌려선 안 된다. 지금 텔레비전 같은 곳에 나와 ‘인문학’ 강의를 하는 이들 중에는 대학 수학능력시험을 대비하는 학원가에서 기어 나온 사람들이 꽤 많은데, 이들은 학생 인구의 감소로 말미암아 도래하게 될 미래, 다시 말해 학원가의 종말로부터 탈출한 이들이다. 그러니 학원에서 일반사회를 가르치다 텔레비전으로 넘어와 인문학을 설명하고 있고, 이들은 입시를 위해 만들어낸 ‘레토르트 지식’을 전제로만 강연한다. 이들이 텔레비전은 물론이고 출판과 기업, 공공기관의 특강을 넘나드는 동안 이 싸구려 인문학은 공급과잉으로 이어졌다.
지금부터는 아주 쉽고 명료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쓸 것이고, 이건 인문학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미리 밝혀둔다. 누가 진짜 인문학적인 이야기를 하는지에 대해서는 쓸 생각이 없다. 다만 인문학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인문학과 관계가 없는 것들에 인문학을 붙이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발설할 수 있다. 이지성이 말하는 인문학은 인문학이 아니다. 최진기가 말하는 인문학은 인문학이 아니다. 설민석이 인문학을 말한다면 그것 역시 인문학이 아니고 조승연이 인문학을 말하지만, 그것도 역시 인문학이 아니다. 김갑수(탤런트 말고 그 머리 긴 아저씨)가 말하는 인문학도 인문학이 아니며 강신주가 말하는 인문학도 인문학이 아니다. 혜민이 나와서 인문학을 입에 담는다면 그건 인문학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강성태 같은 사람이 나와서 말하는 인문학도 인문학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텔레비전에 나와 인문학을 입에 담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말하는 인문학은 인문학과 관련이 없다고 보는 편이 좋고, 어떤 블로그에서 인문학이라는 낱말 앞에 해시태그를 달았다면 그것 역시 인문학과 관련이 없다고 보면 된다. 서점에서 인문학 베스트셀러라는 문구와 함께 쌓여있는 책 무덤을 발견한다면, 그 책 무덤에 담긴 단 한 문장도 인문학과 관련되어있지 않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은 이들이 인문학을 이야기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별 고민 없이 떠들어도 들어주는 사람이 많은 종목이기 때문이다.
장담하는데 나는 이 글에 인문학이라는 태그를 달아놓을 것이고, 이 글은 그 태그가 달렸다는 이유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될 것이다. 물론 그렇게 공유되는 이 글이 많은 사람에게 읽힌다는 뜻은 아니고, 글이 많은 이들에게 퍼지는 것은 글의 내용과는 별 관계가 없다. 두세 집 건너 하나가 치킨집이기 때문에 치킨 소비량이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인문학이라는 것이 유행이기 때문에 인문학과 관련된 글이 많이 소비될 뿐이다. 40여 분 만에 쓴 이 글은 내가 읽어도 허술하고 마음에 드는 문장이 단 하나도 없지만 이 글에 등장한 47개에 달하는 ‘인문학’이라는 단어 덕분에 생각보다 긴 생명력을 지니고 돌아다닐 예정이다. 물론 이 글은 인문학적인 사고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