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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황 Sep 19. 2018

퓨마보다는 인간이 월등하므로

대전의 동물원에서 우리를 빠져나온 퓨마가 사살됐다. 이를 두고 불쌍함을 느껴 인간에게 책임을 묻는 이들이 있고, ‘만약 인간이 다치거나 죽었다면?’이라는 가정을 하면서, 그런 큰일이 발생하기 전에 사살을 결정한 것은 합리적이라는 사람들이 있다. 후자의 경우 합리성을 토대로 이 사건을 객관화 시켜 바라보는 것 같지만, 이런 입장은 실제로는 인간이 스스로 확보한 지위-동물을 잡아 가두고 구경할 지위-의 당위를 감당할 만한 논리를 제공하지는 못한다는 결함이 있다.


2013년에 과천의 서울대공원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다. 호랑이사의 리모델링 공사 때문에 설표사로 임시 이동시킨 시베리아호랑이에게 사육사가 물려 죽은 일이다. 당시 우리를 정리하기 위해 사육사가 우리로 들어갔는데, 어째서인지 호랑이 하나가 격리실에서 나와 사육사의 척추를 물었다. 사육사는 사망했고, 논란이 일어났다. 결국 호랑이는 영구격리조치돼 ‘무기징역’의 집행을 받고 있다.


2년 뒤인 2015년엔 서울의 어린이대공원에서 같은 유형의 일이 벌어졌다. 어린이대공원의 사자사는 굉장히 좁다. 70평도 채 안 되는 공간에 갇혀 지내느라 정형행동을 하는 동물들이 많은 곳이었고, 스트레스를 줄여주기 위해 고기덩어리를 줄에 매달고 자극해 사자를 움직이게 만드는 프로그램을 진행한 직후에 일어난 일이다. 사육사가 사자사를 정리하러 들어갔는데, 격리실의 문이 열려있었고 사자에게 목을 물려 건대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끝내 죽고 말았다. 당연히 논란이 일어났다.


앞서 설명한 두 사건에서 일어난 논란의 한쪽 축에는 ‘사람을 죽인 동물’이므로 안락사-사형-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논란 끝에 서울대공원의 호랑이는 전시되지도 공개되지도 않는 형벌을 받았다. 주목할 만한 것은 어린이대공원의 사자다. 사자는 미국 콜로라도주의 덴버에 있는 야생동물 생츄어리로 이주됐다. 그곳은 비록 야생은 아니지만 우리가 아닌 넓은 땅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된다. 이를 이끌어낸 시민단체는 ‘사람을 죽인 동물’이라 그쪽에서 받아주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해당 생츄어리는 “그건 문제될 게 아니다”라는 답을 했다.


이 사건을 통해 이끌어내야 하는 것은 사살된 퓨마가 불쌍하다거나 퓨마의 사살은 불가피하고 합리적인 일이라는 일차원적 감상과 평가가 아니라,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현실 세계의 변화를 이끌어낼 만한 논의와 사고실험이다. 이를 위해 잠시 영미권의 환경미학의 관점과 독일어권의 환경미학에 대한 관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미권의 환경미학에서 두드러지는 학자는 아놀드 빌리언트로, 그의 환경미학에 있어 중추적 역할을 하는 개념은 ‘참여’다. 그는 자연을 대할 때 관조의 태도로 일관하면서 환경을 단순히 파노라마적 경관에 머물도록 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자연에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우리는 미적 경험을 할 수 있다. 주말에 등산을 하고 바다에서 다이빙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독일어권의 환경미학은 자연미학이나 생태미학을 토대로 정립되고 있다. 마틴 젤에 따르면 자연은 관조, 상응, 상상력이라는 세 가지 미적 차원으로 존재한다. 자연을 관조하는 태도로 지각하면서 자연과 상응하면 자연은 동시에 인간의 예술-재현이 도착할 수 없는 차원의 새로운 가능성, 즉 상상력을 제공한다.


이 두 입장에서 동물원의 동물, 즉 인간에 의해 재현된 키치로서의 자연은 어떻게 비판될 것인가? 전자의 관점에서, 동물원에 가는 행위는 사실상 참여로 해석될 수 없다. 시베리아나 사바나에 직접 들어가 호랑이나 사자의 고유 영역 내에서 그 존재를 확인하는 경험이 미적으로 가치있을 테지만 자연을 축소-재현한 동물원에 가는 행위는 미적 가치가 없다. 후자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로, 동물원은 미적 경험을 제공하지 않는 장소로 비판될 것이다. 동물원은 이미 인간이 최소한의 키치적 요소들로 재현한 곳이며, 시뮬라크르로서도 가까스로 존재하는 장소일 뿐이기 때문이다.


건축 평론가 임성훈에 따르면 자연은 인간에게 ‘좋은 삶’의 계기들을 제공하고, 자본의 이익이나 개발의 논리로 자연환경을 훼손할 경우 이 ‘좋은 삶’의 계기와 마주칠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당하고 만다. 아름다운 자연은 인간의 ‘좋은 삶’의 지평을 확대하는 공간이다. 이런 입장에서도 동물원은 이미 ‘좋은 삶’과 거리가 멀다. 동물원의 동물들은 이미 자본의 이익이나 개발의 논리로 자연을 훼손한 상태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동물원이 어떤 생물학적-과학적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교육의 장이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은 동물원이 존재할 수 있는 과정 전체를 한 번에 가려버리는 위선적인 주장이다.


지금까지 환경미학적인 측면을 통해 동물원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를 알아봤다면 이제 사고실험을 할 차례다. 인간과 다른 동물이 현격하게 구분되는 지적 형편은 다름아닌 추리능력이다. 어떤 행위를 했을 때, 그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에 대해 다양하게 상상하고, 그렇게 상상한 상황들을 서로 비교해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은 적어도 지구상에서는 인간만이 개발해낸 능력이다. 이 능력 덕분에 인간은 윤리적 사고를 할 수 있게 됐다. 이런 추리를 할 수 없는 동물의 경우는 본능적으로 판단하고 즉각적으로 행동한다. 여기에 동의한다면, 이런 견해를 전제로, 열린 문을 통해 퓨마가 빠져나온 과정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퓨마는 문을 빠져나간 이후의 상황이 어떻게 펼쳐질지를 가늠하지 않는다. 문이 열려있고, 모종의 본능적 이유로 빠져나온 퓨마는 또다시 본능을 근거로 은신할 곳을 찾는다. 이 모든 과정에 퓨마의 추리는 없다. 서울대공원의 시베리아 호랑이와 어린이대공원의 사자가 했던 행동도 마찬가지다. 이는 동물과 인간의 중요한 차이 하나를 보여준다. 자신이 처한 상황, 정확히는 환경 내부에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감각할 수 있는가에 대한 차이 말이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이를 감지할 수 있지만 동물은 그렇지 않다. 인간이 독방에 수감되어 미치는 과정과 동물이 좁은 우리에 살면서 미치는 과정이 흡사하다 할지라도 이 두 과정 사이에는 아주 극명한 차이가 있다. 인간은 변화한 환경이 가져다주는 구체적인 스트레스, 즉 상황 추론을 토대로 상상할 수 있는 여러가지 것들로부터 심리적 압박을 받지만 동물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인간은 스스로 미치고 있는 자신에 대해 잠시나마 인지할 가능성이 있지만 동물은 스스로 미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정형행동을 하게된다.


그렇다면 인간이 다른 세계의 어떤 존재에 의해 포획되고 '인간 동물원'에 전시되는 입장에 처했다면 어떨까? 만약 당신이 좁은 우리에 살게 되어 전시되고 어느날 '그들'의 실수로 문이 열렸다면 당신은 당장 문 밖으로 나갈 것인가? 그 문 밖에서 생길 상황이 최악의 경우 사살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그 전에, 당신은 그들에게 당신을 가둘 권리가 없다는 것을 어떻게 주장할 것인가? 그들이 심지어 인간의 개체수가 많기 때문에 당신에게 중성화수술을 강행하려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이 함부로 돌아다닌다는 이유로 당신을 죽이려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질문을 경유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사고실험은 이렇다. 만약 그 퓨마가 모든 상황을 알고도 자유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탈주를 시도했던 거라면? 그런 퓨마를 사살한 인간의 행위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게다가 앞서 언급한 시베리아 호랑이나 사자 처럼 ‘죄’를 지은 것도 아니잖나.


이 모든 철학적 비판과 사고실험이 쓸데없는 일일 수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하나만 짚어보자. 인간은 언제나 실수를 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2013년과 2015년에 일으켰던 비슷한 실수가 2018년에도 일어났다. 문을 제대로 닫지 않은 실수 말이다. 그런데 이런 ‘잦은’ 인간의 실수로 인한 급박한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동물원의 운영체제에 해당 동물을 능히 생포할 수 있는 시스템조차 없다면, 애초에 그런 동물원이 존재할 이유가 있느냐는 거다. 그런곳에 아이들과 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풀어놓는다는 것은 또 얼마나 비합리적인 일이냐는 말이다.


다시, 대전의 동물원에서 우리를 빠져나온 퓨마가 사살됐다. “시민에게 피해를 줄 우려가 있어 숙의 끝에 사살할 수밖에 없었다”고 관계자가 말했다. 인간이 퓨마보다 고등한 지적 생명체라면, 이를 두고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과연 인간이 해야 하는 ‘숙의’란 무엇인가?


20세기 초, 뉴욕의 코니 아일랜드의 한 테마파크에  강제 이주되어 백인들에게 전시되고 있는 필리핀 원주민들. 사실상 '인간 동물원'이었다. 사진 : News Dog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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