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먹고 사는 일’을 홀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집단 생활을 하는 몇 종류의 동물을 제외한 많은 동물들이 그러하듯, 인간 역시 얼추 홀로 살 수 있는 형편을 만들어내고서야 비로소 어른이 된다. 홀로 산다는 것은 실로 복잡한 이 세계에 뛰어들어 수많은 명세서를 월말에 자기 이름으로 받게된다는 것을 말한다. 월세를 부모가 감당하는 자취는,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홀로 삶이 아니다. 한 달 동안 일상이라는 것을 굴리며 소비한 많은 것의 대가를 스스로 치러내는 것, 그동안 공기 같았던 그 많은 사소한 것들이 사실은 전부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것들이라는 새삼스러운 이 세계에 대한 실감을 하는 것이 바로 어른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지점에서라면, 어른은 어른이 아닌 이들보다 믿음직하다. 이 홀로 삶을 우리는 독립이라 부른다.
독립의 요소 중에는 이처럼 ‘사는 일’을 위해 여러가지 요금을 치르는 것도 있지만 그에 앞서‘먹는 일’을 혼자 감당한다는 것을 반드시 포함된다. 무엇을 먹을 것인지, 어떤 반찬을 만들 것인지, 냉장고에 무엇이 없는지 등을 따지는 일부터 언제 불을 줄일 것인지, 어디에 담아 먹을 것인지, 설거지는 곧장 할 것인지에 이르는 고민과 계산과 생각과 행동이 바로 ‘먹는 일’이다. 마트에서 10구 들이 계란을 살 것인지 15구 들이 계란을 살 것인지 아예 한 판을 살 것인지를 결정할 줄 아는 사람이 어른이다.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중에는 이런 일도 있기 때문이다. 혼자 먹을 식사를 고민하다가 밥을 하기는 귀찮고 시켜먹기엔 과할 것 같아 장고 끝에 라면을 끓이고 마지막에 계란 하나를 깨 넣었는데 시커멓게 썩은 게 아닌가. 그 냄새는 또 얼마나 고약했는지. 가장 큰 문제는 라면을 다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끓여야 했다는 거였다. 싱크대에 라면을 쏟자 그 고약한 냄새가 온 집안을 장악했고, 국물을 제외한 그 실패한 라면을 식물 쓰레기봉투에 담아 묶으면서는 반도 안 찬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그 냄새 때문에 묶어서 버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며 들어간 시간과 사용한 체력과 버려진 라면 한 봉지와 왜소한 음식물 쓰레기 봉투의 부피를 아까워했다. 그렇게 두 번째 라면을 끓이면서 이게 다 계란을 너무 오래 냉장고에 넣어둔 탓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더랬다.
어른에게 요리는 상당히 중요한 기술일 수밖에 없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요리에 꽤 능란하다. 처음 하는 요리일지라도 레시피만 확보하면 상당한 수준으로 만들어낸다. 어제는 애인의 친구를 초대해 술상을 차렸다. 중앙아시아의 양고기 요리를 했는데, 주재원 신분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 다녀온 그 친구가 먹고는 정말로 중동의 맛이라고 평가했다. 나에게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는 이제 라면만큼 쉬운 요리가 됐고 일본의 돈지루나 중국의 훠궈, 이탈리아의 알리오 올리오나 봉골레 정도는 웬만한 식당이나 현지인 수준으로 만들어낸다. 간장게장이나 닭볶음탕, 오리찜, 서더리탕이나 아구찜도 문제 없다. 물론 이런 메인 요리만 할 줄 아는 것이 아니다. 두부조림이나 장조림, 꽈리고추 멸치볶음, 계란찜이나 더덕구이 같은 반찬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김치도 곧잘 담근다. 나는 요리 자체를 즐기는 편이고, 그러다보니 할 줄 아는 음식들이 점점 늘어나는 중이다. 그래서 나는 아주 잘 안다. 요리가 노동이라는 것을. 이게 정말 힘들다는 것을. 무엇보다 대충 한 끼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 싶은 것을 제대로 갖춰 먹는 것이 굉장한 일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느닷없을지 모르지만 해물탕 레시피를 소개하고 싶다. 이걸 만들기 위해 레시피를 검색했다면, 다음에 할 일은 무엇일까? 당연히 장을 보는 거다. 재래시장이든 대형마트든 동네 수퍼마켓이든 가락시장이든 노량진수산시장이든 일단 장을 보러 가는 것부터 요리라는 노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거다. 거기서 신선한 대구를 고르고 육수에 필요한 꽃게와 새우를 고르고, 다시마가 없다면 다시마를 사고, 마늘과 미나리와 대파와 무와 청양고추를 사고, 여유가 있다면 낙지나 쭈꾸미나 전복을 사고, 바지락이나 동죽 중에 적당한 걸 고르고, 미더덕을 사야 한다. 몇 시간동안 발품을 팔아 장을 보면 일단 발부터 무릎을 거쳐 허리에 젖산이 쌓이기 시작한다. 재료만 해도 벌써 한짐이라 팔과 손도 아프다. 물론 요즘 마트나 수퍼마켓에서 배달 서비스를 해주니 다행이긴 하지만, 당장 준비해야 하는 경우라면 그걸 다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한숨 돌릴 틈도 없이 재료 손질을 시작해야 하는데, 마늘을 빻는 일부터 양념을 만들고 육수를 만들고 적당한 타이밍에 불을 줄이는 일은 정말로 보통 일이 아니다. 엄마로부터, 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불 앞을 떠나지 않는 것이라 배운 나는 멸치와 다시마와 파뿌리와 고추와 무와 마늘 등을 넣고 육수를 끓이는 십수분 동안 불 앞에서 육수를 성실하게 관찰한다. 그렇게 만든 육수 몇 스푼과 고추장과 된장, 고추가루와 다진마늘과 간장과 청주와 소금을 넣고 버무려 양념을 만든다. 경험상 이런 양념은 바로 쓰는 것보다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을 주고 각각의 재료들이 저마다의 맛과 향을 충분히 공유할 수 있도록 한 후에 쓰는 편이 좋다. 이제 대구를 적당한 크기로 손질하고 꽃게는 등 껍질을 떼어낸 후 반으로 자른다. 이 모든 과정 중 가장 먼저 해야 했던 것은 바지락의 해감이다. 해감은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적당한 크기의 보울에 바지락을 넣고 스테인레스 숟가락이나 포크 두 개를 얹어 소금물을 부어 빛을 막을 수 있는 뚜껑으로 덮어 냉장고에 넣어두면 바지락들은 밀물이 들어온 줄로 알고 머금었던 뻘을 뱉어낸다. 이제 커다란 전골용 냄비에 부채꼴 모양으로 무를 썰어 깔아두고 꽃게와 새우와 바지락과 미더덕을 만들어둔 양념과 버무려 얹는다. 육수를 모두 부은 후 강불로 끓인다. 끓기 시작하면 대구를 넣는다. 처음부터 넣으면 생선 살을 구성하는 조직이 약해져 부숴져버릴 수 있다. 끓으면서 나오는 거품을 중간중간 제거하다가 7분 정도 끓었을 때 불을 줄이고 대파와 청양고추를 넣는다. 낙지는 불을 끄기 1분 전에 넣어야 한다. 2분 이상 익은 낙지는 대구와 반대로 조직이 치밀해져 질겨지고 무엇보다 쪼그라들어 크기도 작아진다. 해물탕은 너무 오래 끓이면 텁텁해지기 때문에 총 15분 정도만 끓인다. 불을 끈 후 다듬은 미나리를 넣고 냄비 뚜껑을 닫아 미나리의 숨을 죽인다. 이 사이에 쌀을 씻어 밥을 해야 하고, 식탁에 올리기 전에 반찬을 준비해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먹어치운 후에는 반드시 설거지를 해야 한다. 기름기가 있는 것과 아닌 것, 술이나 물을 담았던 컵과 잔을 따로 씻는다. 생선 뼈는 일반쓰레기로 버려야 하는데, 곧장 버리면 물기가 쓰레기의 발효를 촉진해 집안에 악취를 풍기기 십상이라 따로 모아 말려 버리는 것이 좋다. 설거지까지 끝내면 비로소 장보기로 시작한 요리라는 노동이 끝난다.
해물탕이 집들이 대표 음식이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음식 솜씨가 없는 새댁들이 하기에 손도 많이 안 가고 편한 음식이라 손님을 맞이할 때 내기에 좋은 음식이었다는 거다. 읽기만 해도 느껴지겠지만, 해물탕은 쉬운 요리가 아니다. 아니, 세상에 쉬운 요리란 없다. 직접 해보면 알 수 있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 해물탕은 해볼 법한 요리가 아니다. 들어가는 재료부터 한 끼니에 없앨 수 있는 양이 아니고, 경제적이지도 않다. 적어도 너댓명 이상이 모이는 상황에서 메인 요리로 할 만한 음식이다. 이렇게까지 글을 쓴 이유는 그런 말을 한 사람이 ‘맛 칼럼니스트’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길게 늘어뜨린 글은 모두 황교익을 겨냥하고 있었다. 나는 아주 여러번에 걸쳐 그가 음식 칼럼니스트도 요리 칼럼니스트도 아니고 ‘맛’ 칼럼니스트인 이유를 확인했다. 떡볶이가 원래 맛이 없는 음식인데 사회적으로 맛있다고 세뇌된 음식이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도, 혼밥이 마음의 병이고 사회적 자폐라는 말을 했을 때도 그랬다. 그는 요리라는 노동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사람이 ‘먹는 것’에 대해 말할 때 그는 맛에 대한 이야기 밖에 할 게 없다. 음식과 요리에는 반드시 사회와 시대의 맥락이 반영된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이 아는 오래되고 편협한 세계관으로 맛에 대해 이야기 한다. 남도 음식이라는 개념이 1980년대 이후에 생긴 정치적 용어라는 그의 설명도 틀렸고, 평양냉면에 양념장을 넣는 것은 평양냉면의 맛을 해치는 일이라고 지적했던 그의 설명도 틀렸다. 남도-전주 음식은 조선시대부터 그 맛이 뛰어나기로 자자했고 매운 맛의 유행은 세계적인 추세로, 옥류관의 평양냉면은 근 10년 사이에 다대기를 넣어 먹는 것으로 변화했다. 그는 이런 것들을 비판하는 이들을 두고 고작 페이스북에서 권위에 기대 자기 방어만 하는게 고작인 사람이다. 글 쓰고 말하는 사람에게 공중의 비판과 비평이란 자기 글과 말에 대한 명세서 같은 것인데, 그는 그 명세서를 받으면 읽지도 않고 자기 편드는 사람들 앞에다가 찢어버린다. 그러면 수많은 ‘좋아요’를 받는다. 무엇보다 혼자서 밥을 해 먹을 엄두조차 내지 못할 사람이기도 하고. 이렇게 먹고 사는 일을 혼자 해내지 못하는 사람이 ‘원래’, ‘제대로’, ‘사실은’, ‘본연’ 같은 단어를 앞에다 두고 하는 모든 말이 어른 흉내로 보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대개 이런 사람을 꼰대라 부른다. 그런데 이게 어디 황교익 뿐인가? 너무나도 전형적으로 한국의 남성들이 매일 보여주는 모습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