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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황 Sep 27. 2018

음악과 소음을 구분하기

아마도 올해 봄이었을 거다. 한국의 음식점이나 카페나 술집에서 틀어대는 음악에 대한 소감을 모 언론사 지면에 칼럼 형태로 실었던 적이 있다. 미송 합판과 유광 바니쉬를 이용해 꾸민 전형적인 한국식 이자카야에서 술을 마시는데, 정말이지 느닷도 맥락도 없는 노래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를테면 90년대의 한국 가요들이 온 가게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일행과 대화를 이어가기 힘들 정도로 음악은 우렁차게 틀어져 있었다. 나는 음악을 들으러 간 것이 아니었고, 간단한 안주와 술을 곁들여 항간에 떠도는 일들에 관한 대화를 하러 그곳에 갔던 거지만 대화는 결코 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결심한 이들이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결국 유피의 뿌요뿌요나 컨츄리꼬꼬의 몇집 앨범 타이틀곡에서 모든것을 포기하고 도망치듯 가게를 빠져나와야 했다. 이런 경험은 아주 흔하게 일어난다. 내가 아는 한국인들은 아무곳에서나 아무때에나 음악 같은 것은 틀어도 상관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렇다. 산에 가서 숲을 좀 느껴보려고 하면 어김없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휴대용 라디오로 뽕짝을 틀어대는 고령의 등산객을 만날 수 있고 개와 함께 조용히 한밤의 강가를 거닐겠다고 나서면 인터넷 쇼핑몰에서 살 수 있는 블루투스 스피커로 걸그룹의 노래를 틀어대는 젊은 자전차 라이더들을 만나게 된다. 뿐만아니다. 데이트를 하러 공원에 나온 연인들은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틀어 손에 쥐고 걷곤 한다. 공공의 장소에서 타인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하는 이들의 충만한 이기 덕분에 고요함은 절대로 즐길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이게 개인의 이기심만의 문제는 아닌 것이, 사회 전체가-강조하지만 정말로 사회 전체가 그렇다!- 전반적으로 음악과 공간을 아주 조금도 이해하려고 들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일종의 게으름이다. 지적으로도 게으르고 철학적으로도 게으르고 문화적으로도 게으르기 때문에 생긴 문제다. 일례로 서울의 올림픽공원에서는 가로등마다 스피커를 달아놓았는데, 스피커 밑에는 이런 문구가 적힌 표지판이 있다. ‘음악신청 02-****-****’ 그러니까, 엄청나게 큰 도심 녹지를 꾸려 시멘트와 자동차로부터 도시 한가운데를 비워두고도 그놈의 빌어먹을 음악을 틀어댄다는 말이다. 그러니 심수봉의 백만송이 장미가 나왔다가 곧이어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나왔다가 모짜르트 피아노 소나타가 나왔다가 트와이스의 티티가 나왔다가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가 나온다. 백로나 왜가리나 기러기나 황조롱이나 딱따구리나 너구리나 고양이나 다람쥐나 청설모는 두말할 것도 없고 거기서 조용히 사색을 즐기러 나온 사람마저도 안중에 없다. 나는 이게 정말 너무나도 싫어서 존 케이지의 사분 삼십삼초를 신청한 적도 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어디 공원 뿐인가? 몇해 전 서울의 지하철을 운영하는 회사는 출근 시간의 고객들을 위한다며 원하지도 않은 음악을 역사에 틀어댔던 적이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프로그램은 없어졌지만 이내 다른 형태로 음악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지하철 역사를 문화와 예술이 있는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서울시의 굳은 의지 덕분인지 바쁘게 오가는 지하철 이용객의 뒤통수에 대고 포교하듯 노래를 부르는 불행한 아티스트들이 여기저기로 파견됐다. 정부와 시청과 무슨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런 게으름 때문에 고요함은 절대로 즐길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공공장소에서 아무 고민도 없이 습관적으로 음악을 트는 이유는 불특정 다수에게 어떤 음악을 들려줬을 때 똑같이 반응할 거라고 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해당 장소를 경유하거나 이용하는 각각의 개인들이 백이면 백 다른 상황과 사정과 처지와 형편과 감정에 처했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조차 못하는 것은, 분명히 강조하지만 게을러 빠져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일례로 나는 2000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버즈의 음악 전부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데, 그 이유는 군대에서 증오하던 인간 하나가 아침 여섯시 기상시간마다 버즈의 음악을 틀어댔기 때문이다. 버즈의 노래들을 음악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지와는 관계 없이 개인적 경험이 그 특유의 바이브레이션과 음색을 분노로 치닫는 방아쇠를 건드리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 어느곳에서든 버즈의 음악이 나오면 기분이 나빠지고 소름이 돋아 견딜 수가 없는 탓에 공공장소에서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음악이 됐다. 이렇게 어떤 음악이 트리거로 작용하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어디 이런 경우 뿐인가? 평소에 좋아하는 음악도 상황과 처지에 따라 얼마든지 소음이 될 수 있다.


이건 공공예술에 관한 한국 사회의 인식과 포개지는 문제이기도 하다. 공공예술은 단순히 공공장소에 예술 작품을 가져다 놓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공공예술이 아니라 공공장소에 놓여진 예술작품의 의미를 넘어서지 못하므로, 공공을 위하거나 공공의 이익에 기여하지 못한다. 어떤 예술은 누구에게 감상의 대상이 되고 좋은 삶의 계기들을 제공하지만 누군가에겐 감각을 방해하고 마주치기 싫은 감정과 만나게 한다. 이런 이유로 공공예술 작품을 고르거나 만드는 것은 지방마다 각각인 화투의 룰을 통합하는 것보다 복잡하고 치밀한 논의가 필요하다. 단순히 시장의 취향과 의지만으로 추진할 만한 일이 아니다. 서울로7017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그 ‘신발 폭포’를 떠올려 보라. 그런 것은 공공과 아무런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다. (음식점과 카페, 술집과 옷가게 등을 비롯한 포괄적인 개념의)공공장소에서 다른 사람의 귀에 들릴 음악을 튼다는 것의 의미는 단순히 공공장소에 음악을 트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음악이 시공간을 가득 채우고 심지어 장소 자체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 원하지 않는 공간으로 뛰어들어오면 빛공해가 되고 디퓨저의 향기가 원하지 않는 공간에 스며들면 악취가 되듯이, 음악도 소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고요함 속에 살다가 원할 때만 음악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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