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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황 Oct 20. 2018

글 쓰는 의사와 직업윤리 그리고 포르노그래피

살인사건 피해자의 담당의가 쓴 글의 문제

3년 전, 민방위 교육에 갔다가 황당한 일을 겪었다. 자신을 교통 경찰이라 소개한 강사는 사고 장면이 찍힌 폐쇄회로 화면과 블랙박스의 영상을 보여줬다. 모두 자신이 수사를 맡았던 사망사고였다면서. 민방위 교육은 재미가 없고, 다들 잠을 자거나 하기 때문에 그런 영상을 들고 나와 좌중의 집중력을 높이고 교통사고 예방 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경각심을 심어줄 요량이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내내 불쾌했다. 그의 의도와는 관계 없이 나는 미치광이의 쇼를 강제로 보는 불행한 관객이 되고 말았을 뿐이다. 교통 사고가 일어나는 생생한 장면 수십 개를 가져나와 연신 어디에서 일어난 사고고 피해자가 무슨 일을 하고 있으며 가해자는 어디에서 무슨 사업을 하고 있는지 따위를 발설하는 그 경찰관이 가리킨 영상은 일체의 가공을 거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영상이었다. 그 경찰관은 약 200 명에 이르는 일반인에게 이른바 '스너프 필름'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 없다. 나는 인권위와 국민신문고를 통해 공식적으로 문제제기했다. 당시 인권위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해 적절한 절차를 밟아 해당 경찰관의 민방위 교육 등 외부 교육을 일절 금지시켰다. 하지만 그때 봤던 그 영상들이 떠오르면,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쾌감을 억누르기 위해 발가락을 오므리고 어금니를 꽉 다문다.


지난해 봄에 나는 한 작가의 작업을 맹렬히 비판한 적이 있다. 작가는 세월호라는 사건의 사회적 문제에 파고들어 미술로 이끌어낼 수 있는 사회와 시대의 부조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을 테지만 정작 그가 택한 방식은 재앙의 순간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거였다. 뒤집힌 세월호의 선체가 가라앉는 장면이 종일 중계되던 화면을 연상 시키는 그의 작업 역시 위에서 언급한 사례와 마찬가지로 불쾌한 경험을 선사한다.  '침몰하는 세월호의 이미지'가 2010년대 한국 사회에 가장 커다란 충격이었던 이유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산 채로 수장되는 장면'이 생중계되었기 때문이다. 참극이 보도라는 형태로 화면을 통해 보여지는 것, 그러니까 하나의 '스펙터클'을 목격하게 되는 경험을 통해 한국 사회가 앓게 된 공통의 질병은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이었다. 기 드보르는 '스펙터클'에 대해 '외양의 지배'라고 표현했다. 정작 바라보아야 하는 사건의 서사나 문제는 거대한 하나의 이미지, 즉 스펙터클에 의해 완전히 가려지고 그 이미지를 바라보는 우리는 거대한 스크린 앞에서 수동적으로 화면을 바라보는 '불행한 관객'이 되고 만다. 그 작가의 작업은 첫 번째로 이 지점에서 관객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었다.

노동식 작가의 <희망고문> 다중매체 가변설치. 2015년 작품.


이 작업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세월호의 침몰 장면, 그것도 마지막에 비현실적 희망으로 에어포켓이라는 개념이 전 국민에게 설명되던 그때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을 넘길 수 없다. 이 이미지 내부에는 수장되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분명하게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 작업을 본 관객들이 그들의 죽음과 관계된 수많은 장면들을 병렬하며 감상할 수밖에 없다. 이 이미지는 그저 그 죽음만을 향해 뻗어가는데, 작가의 의도나 다른 조형적 장치들은 '죽음의 이미지' 앞에서 맥없이 매몰된다. 이는 포르노그래피의 문법과 유사하다. 오로지 하나의 감각-감정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것을 대상화 하며 그 이미지를 맹렬히 소비하는 것은 포르노그래피가 지닌 명백한 특성 중 하나다.


바로 어제, 내게 이와 비슷한 불쾌한 경험이 하나 보태졌다. 자신을 살인사건 피해자의 담당의라고 소개한 남궁인이라는 의사의 글 때문이었다. 그는 잔혹한 범죄에 분노를 느낀다면서, 피해자가 앰뷸런스로 이송돼 응급실로 들어와 죽기 까지의 상황을 아주 자세하게 묘사했다. 그는 피해자나 유가족에게 누를 끼칠 의도는 없다면서도 피해자가 절대로 동의하지 않았을 피해자의 죽음을 꼼꼼하게도 묘사했다. 나는 그 글에서 피해자를 도구로 삼아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어리석고 오만한 자아만을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피해자가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겪으면서 죽어갔는가에 관한 정보를 여과 없이 수용하게 됐다. 이는 피해자를 도구로 삼아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불행한 현장에 동참하게 만들었다는 재앙의 재현이라는 문제와 함께 의료인이라는 특수직업인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직업윤리를 유기했다는 또다른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그 글은 환자를 맹렬히 소비해 담당의였던 자신의 정의감을 드러내고있었고, 그 과정에서 피해자의 죽음을 정밀하게 묘사했다. 사람들은 남궁인의 글을 읽으며 함께 분노했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는 계속 이용당한다. 이는 정확하게 포르노의 작동 방식과 일치한다. 한가지의 감각과 감정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것을 맹렬히 대상화 하고 소비하는 그 방식. 과연 담당의에게 환자를 그렇게 소비할 권한이 있는가? 이런 일은 사실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국종 교수는 북한에서 건너온 귀순 병사의 담당의로서 언론의 카메라 앞에 나와 기생충의 길이에 대해 말했다. ‘환자’의 상태를 보고 비밀에 부쳐 함구해야 하는 ‘의사’가 직업윤리를 유기해도 좋은-합당한 순간이 과연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기실 의료인이나 법조인, 경찰관이나 상담심리사, 심지어 고해성사에 참여하는 종교인에 이르는 ‘타인의 사적 사정’을 알게되는 직업을 가진 이들에게는 사생활에 관한 각별한 감수성과 아주 단단한 직업윤리를 요구해야 한다.


그의 의도가 선량했다며 그를 옹호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 글이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들을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일면 선량해 보이는 주장으로 포장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쓴 글은 포르노그래피와 다를 바가 없다. 황교익이 "수요미식회는 맛집 소개 프로그램이 아니"라고 했지만, 수요미식회가 여실히 맛집 소개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수요미식회에 나왔다는 것을 음식점은 적극 홍보하고, 사람들은 줄을 서서라도 먹어보려 한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 의사와 그 의사의 입장을 옹호하는 이들이 말하는 선량한 의도 역시 그 글이 기능하는 면모 앞에서 폐기되어야 한다. 그 글은 아주 여러 사람을 잔혹한 죽음의 현장에 참여하게 만들면서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그 글을 읽고 분노하든 불쾌감을 느끼든 측은함을 느끼든 그 글을 소비한 이들은 불행한 독자가 될 뿐이다. 무엇보다 이 불행의 전면에 피해자에 대한 대상화와 묘사가 깔려있다. 그 글이 유통되는 과정에서 만들어내는 이 사회의 유익한 지점은 무엇인가? 단언하는데 아무것도 없다.


의도의 선량함은 내용과 기능을 정의하고 현상을 비평하는데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아야 한다. 포르노그래피를 정의하는데 여러가지 방법과 시도가 가능하겠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사고실험에 포함된 성격을 반영한다. 제작자가 어떤 콘텐츠의 수용자-소비자의 성적(혹은 감정적) 흥분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포르노그래피가 될 수 있는 경우가 있을까? 딥러닝을 통해 최적의 이윤을 남길 수 있는 물건을 판다고 가정해보자. 나는 컴퓨터를 켜고 시스템을 가동시킨 후 직원들과 워크숍을 떠난다. 컴퓨터, 다시말해 인공지능은 열심히 자료를 끌어모아 회사에 큰 이윤을 남길 것이고, 이렇게 발생한 이윤은 직원들에게 아주 넉넉히 돌아갈 것이며 발생한 이윤 중 일부는 사회에 환원할 생각이다. 나는 선량한 사람이고, 내가 하는 일은 선량한 의도가 언제나 담겨있다. 그런데 이 딥러닝 머신은 포르노그라피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마이클 레이 Michael C. Rea의 2001년 논문은 한발 더 나아가 '포르노그라피라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는 섬의 자료를 입력받은 컴퓨터'가 플레이보이와 비슷한 잡지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고, 우리 사회에서 포르노그래피가 유통되는 이유와 같은 이유로 그 섬에서도 그 잡지가 유통되기 시작했다는 사고실험을 하라고 지시한다. 이런 경우 제작자의 의도나 관심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음에도 그 섬에서 유통된 잡지는 명확하게 포르노그래피다. 그러니 도대체 포르노그래피가 무엇인지에 관한 정의를 내릴 때 콘텐츠 제작자의 목적 또는 의도가 중요한 구실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경우를 보여주는 사고실험이다.


그러므로 남궁인이라는 글의 제작자의 목적이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의 글이 설령 수용자-소비자를 어떤 감정이나 감각의 흥분상태로 데려다 놓기 위해 쓰여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 글은 여러 의미에서 포르노그래피가 유통되는 방식과 흡사하게 이 사회를 돌아다니고 있으므로 명백하게도 포르노그래피의 범주에 묶어둘 수 있다. 이런 글을 보고도 잔혹한 범죄에 대한 알 권리를 주장하며 남궁인이라는 특수 직업인의 의도와 목적을 옹호하는 이들이 이성적으로 게으르다고 판단하게되는 이유는 포르노그래피나 불법 촬영-유포된 성폭력 동영상(리벤지 포르노)을 소비하는 남성들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는 리벤지 포르노를 두고 '알 권리'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당신의 알 권리보다 피해자의 인격이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은 경찰관의 사례에서나 작가의 사례에서나 의사의 사례에서나 변하지 않는다. 어떤 피해자도 공중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으며, 거듭 강조하지만 의사라는 특수 직업인은 자신이 담당한 환자의 사적인 사정에 대해 함구해야만 하는 윤리적 의무를 유기해선 안 된다. 무엇보다 민방위 교육에서 봤던 그 경찰관에게서도 세월호의 침몰을 고스란히 묘사한 그 작가에게서도, 화재가 된 그 의사의 글에서도 '이것을 유가족이나 피해자가 본다면 어떨까?'와 같은 상상을 성실하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내 어떤 문제의식을 공유하겠다는 그들에게서 오히려 공감능력의 부재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글은 수습할 수 없는 글이 되어버렸다. 이 문제에 대해 되도록 성실하게 반성하기를 바란다. 의사가 있어야 할 곳은 자신의 비대한 자의식을 주체하지 못하는 소셜네트워크의 현장이 아니라 환자를 대면하는 의료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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