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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황 Oct 19. 2018

문화계 블랙리스트 그리고 한국의 남성성과 종교정치

최근 대통령이 유럽 순방을 하는데 배우 김규리가 동행했다고 한다. 한-불 우정 콘서트의 사회를 맡았다고 한다. 김규리는 이명박이 대통령이던 시절 대대적으로 벌어졌던 광우병 반대 집회에 참여하면서 본인의 소셜미디어에 '광우병 걸린 소를 먹느니 청산가리를 입에 털어넣겠다'는 글을 적었다. 많은 이들이 김규리 하면 개명 전 이름인 김민선이나 청산가리를 떠올린다. 그의 이름은 지난 2016년, 문화계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라있었다. 김규리는 지난 9년을 암흑기로 묘사한다.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피해를 봤다고 말한다.


김규리는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집무를 시작한 2008년부터 박근혜가 탄핵된 2017년 초까지 12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드라마와 예능을 비롯한 10 개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는 연기를 하거나 사회를 보거나 고정 패널로 참여했다. 과연 그가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기 때문에 더 많은 영화에 출연하지 못했을까? 과연 그런 이유로 더 많은 방송에 섭외되지 않았을까? 참고로 같은 기간 동안 전도연은 총 일곱 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김혜수는 여덟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김규리가 블랙리스트 때문에 피해를 본 것인지 아닌지는 사실상 알 수 없음에도, 이 사회는 그렇게-블랙리스트 피해 서사로 쓰고 읽어야만 하는 처지가 됐다. 왜 그렇게 됐을까? 우선 블랙리스트가 어떻게 작성됐는지 자세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라는 것은 특정 예술가들의 작품에 정치적 성향이나 급진적 정서가 서려있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애초에 영화나 드라마나 연극이나 뮤지컬이나 회화나 조각이나 설치미술이나 현대무용이나 한국무용이나 국악이나 피아노 독주나 오케스트라나 콘서트나 락페스티벌이나 아무튼 예술 현장에 참가해 일일이 작품을 감상하고 작품을 분석할 능력이 있는 관료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개구쟁이 스머프>를 보고, 그 작품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적 이상향을 그려낸 작품이라는 견해를 장관이나 대통령에게 전달할 수 있는 관료는 아무도 없었다는 거다. 그렇다면 과연 블랙리스트는 어떻게 작성됐나? 대부분 당시 문재인이나 박원순을 지지하는 온-오프라인 서명을 하거나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서명을 한 것이 자료로 쓰이며 작성됐다. 어지간히 멍청한 당시 정부 인사와 실무를 담당한 관료들의 작품이다. 


아무리 부실하게 만들어졌다고 해도 실제 배제가 있었다는 것을 간과할 수는 없다. 실제로 그 9년 동안 많은 문화-예술 사업들이 축소-폐지됐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일은 새 정부에서 반드시 해야 하는 과제 중 하나였다. 이런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 정부의 몰락이라는 현상의 반대급부로, 유일하게 지지를 얻어낸 정부라서 그렇다. 때문에 블랙리스트작성과 배제에 대한 책임을 지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아무에게도 법적 책임을 지우지 않았다는 것은 커다란 문제로 지적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 정부가 블랙리스트에 관한 법적 책임을 관련자들에게 묻는 대신에 선택한 것은 무엇인가? 대통령의 유럽 순방길에  ‘눈에 보일 법한’ 인물을 뽑아 ‘사적인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은 얼버무리기에 가깝다. 그렇게 '여성 배우' 김규리가 블랙리스트 피해자의 모델로 발탁되는 기묘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과연 이걸 기쁘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 사회는 심각하고 깊이있는 논의를 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절대 반가운 일이 아니다. 우선 연기력이 특출나거나 대단한 광고 수익을 올리는 여배우들도 작품이 없어서 한해 두해 쯤 쉬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 동안 전도연은 총 일곱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김혜수는 여덟 편이다. 이는 또한 한국 영화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헐리우드에서도 최근 매번 지적되는 문제다. 남성 감독이 만드는 남성 중심의 서사로 이루어진 영화에서 여성은 남성 주인공을 보조하는 수단으로 쓰일 뿐이다. 김지운의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에서 엄지원도 그랬고 장준환이 만든 <1987>에서도 김태리는 남성이 이끄는 운동권의 무대에 초청되어 이른바 '팔뚝질'을 시작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윤종빈의 모든 영화들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최근 재미있게 봤던 여성 중심의 배역과 서사를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는 부지영의 <카트> 정도다. 81만 명이 이 영화를 극장에서 봤다. 수백만 명, 많게는 천만 명이 본다는 한국의 메이저 영화를 이끄는 것은 분명히 남성이다. 40대에 접어든 남성 배우는 전성기를 맞지만, 40대에 접어든 여성 배우는 잊혀지기 쉽다.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이건 상당히 심각한 문제다. 단적으로, 이경영의 필모그라피를 보라. 


블랙리스트보다 심각한 문제는 바로 문화-예술계의 남성 편향적 구조다. 이 구조는 아주 오래됐고, 현재도 한국 사회에 미만한 성차별 기제를 작동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이 남성중심적 구조는 박근혜 정부의 인사들이 블랙리스트를 작성할 때 그랬듯이 누군가가 어떤 정치인을 지지하고 어떤 사회 문제에 주목하는지 따위를 가늠하는 수준에 미치지도 않는다. 단순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어떤 세계에서 누군가를 차치하고 배제한다. 심지어는 '블랙리스트'를 비판하고 문제삼는 데에도 남성중심적 기제가 작동하는 것을 우리는 똑똑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홍성담의 정치풍자가 그랬고, 이구영의 그림이 그랬다. 이 둘은 정치인 박근혜로부터 느닷없이 여성성을 호출해 조롱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들이 이명박을 헐벗겨 성적으로 조롱한 적은 없다. 물론 그런 시도를 했다고 해도 남성이 화면 안에서 벗겨지는 것과 여성이 화면 안에서 벗겨지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으며 전자는 후자에 비해 성적 수치심을 유발시키는 장치로 소비될 가능성이 없다*.


홍성담이나 이구영 등이 채택한 이런 방식의 정치풍자는 동시대의 흐름, 페미니즘이 이야기하는 미소니지와 실재하는 성차별을 일체 파악하지 않은 게으른 남성성의 표본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그들이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피해를 봤다는 사실은 애석하기 짝이 없지만, 그들은 그 피해를 이야기하면서도 끝내 여성의 벗은 몸을 전시하는 수준에만 머물렀다. 그들의 이런 구시대적 방식은 블랙리스트가 아니었어도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소위 '한남 문학'의 컨템포러리라 볼 수 있는 이외수나 류근이 가지고 있는 정서에 대한 세간의 비평을 보면 알 수 있다. '화냥기'라는 표현에 대한 문제제기는 류근이 말한 것처럼 '문학이 버려야 하는 말들이 너무 많아졌다'고 푸념할 만한 것이 아니다. 이런 방식의 문제제기는 그동안 게으른 태도로 세계와 시대와 사회를 읽어내던 남성성의 한계를 자각하게 만드는 중요한 열쇠다. 이 열쇠를 걷어찬다면, 대중 예술가로서 존속할 이유도 필요도 없어진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시대와 세계가 요구하는 것을 읽어내지 못하는 예술가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니 이외수나 류근 같은 예술가들이 맞이할 미래는 사실상 은퇴 뿐이다.


나는 그래서 김규리라는 여성 배우가 '블랙리스트의 모델로 발탁된' 이 현상이 우습게 느껴진다. 한쪽에선 남성들이 열심히 여성을 배제하는데 말이다. 고작 여성 배우 한 명을 위로하는 것으로 퉁치고 넘어갈 만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심지어 블랙리스트 피해자라는 예술가들마저 앞장서서 여성을 도구로 삼고있으면서 말이다. 김어준은 미투 운동이 정치적 공작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방송에서 했다. 실로 대단한 착각이고 엄청나게 병든 정신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의 발언권이 축소된 적은 커녕 사과 한 마디가 없다. 앞서 언급한 이외수나 류근이나 홍성담이나 이구영도 변명만 늘어놓았을 뿐, 사과 한 마디 한 적 없다.


물론 이 거대한 촌극은 정치와 정치인을 믿음의 대상으로 섬기는 그릇된 종교적 성향으로인해 탄생했다. 앞서 언급했듯, 블랙리스트 예술가들은 정치인의 지지 서명을 통해 묶여졌고 그것은 사실상 신앙고백에 준하는 일이었다. 블랙리스트 뿐인가? 정치인을 우상화 하는 현상은 온-오프라인을 가리거나 좌-우를 가리지 않고 여실히, 열열히, 곳곳에서 일어난다. 이승만을 국부로, 박정희를 영웅으로 만들었듯 노무현과 문재인을 우상으로 여기고 민주당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며 믿는 이들은 소수가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사람들이 믿는 정치-정부는 사람들을 위해 사실상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현 정부도 블랙리스트 작성에 참여한 실무자 등에 대한 법적 책임을 추궁하지 않고 있다. 그런 와중에 눈에 잘 띄는 누군가를 앞세우는 것은 마치 종교적 성인을 앞세워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이 종교적 정치의 중심에도 물론 남성성이 들어서서는 차별과 배제를 열심히 작동시킨다.




*이와 관련해 읽어볼 만한 책은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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