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퇴위아섬 테러와 강서구 PC방 살인사건으로 견주는 두 사회의 모습
2011년 7월 22일을 기억하는가? 노르웨이 오슬로와 오슬로에서 약 30km 떨어진 우퇴위아섬에서 발생한 폭탄-총기 테러로 77명이 사망하고 200명 이상이 부상당한 날이다. 사건을 되짚어 기억을 재생시키면 아마 이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한 사람의 편견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기억할 수 있을 테다. 당시 우퇴위아 섬에는 약 600 명의 10대 학생들이 집권 여당인 노동당이 주최한 캠핑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다. 테러범 아네르스 브레이비크는 오슬로 정부청사에 폭탄이 실린 차량을 이용해 테러를 저지른 직후, 폭탄 테러에 시선이 집중된 틈을 타 우퇴위아섬으로 향했다. 경찰복을 입은 그는 오슬로 테러를 언급하며 학생들을 보호하러 파견 나온 것이라 속여 섬에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학생들을 향해 총을 조준해 사격을 시작했고 건물 안에 숨은 학생들에게는 경찰이니 안심하라고 말하며 다가가 방아쇠를 당겼다. 그는 심지어 죽은 척 하는 학생들이 있을까봐 확인사살까지 했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들에게 아무런 반항 없이 체포됐다.
이 테러는 극우주의자였던 아네르스 브레이비크 한 사람 때문에 발생했다. 그는 체포된 후 경찰 심문을 통해 더이상의 이민자를 받지 말 것, 현재 들어온 유색인들을 노르웨이에서 추방할 것 등을 요구했다. 그는 인종차별 뿐만 아니라 노르웨이의 오늘을 만들고 있는 정치적 사회적 근간, 노동자와 여성과 성소수자와 이민자에 대한 차별 철폐 원칙에도 반대했다. 세계를 망치는 것이 바로 이런 원칙을 내세우는 이들이라 여기고 노동당에서 주최한 캠프에 테러를 가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는 직접 ‘가장 소중한 것을 잃는 고통’을 가하기 위해 청소년들이 있는 캠핑장에 테러를 가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단 한 사람의 잘못된 정신, 누군가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이렇게 끔찍한 폭력으로, 돌이킬 수 없는 폭력으로 구현될 수 있다는 것에 노르웨이는 물론 이 소식을 접한 국제사회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한국의 언론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테러범이 생활하는 감옥의 시설을 조명했다. 안락한 침대와 볕이 잘드는 창문, 넓직한 책상은 웬만한 원룸보다 나았고, 숲으로 조성된 산책로와 잘 정돈된 마루바닥이 있는 실내 체육관은 마치 대학 캠퍼스에나 있을 법했다. 테러범이 그런 곳에 기거하게 된다니, 많은 한국인들은 기겁했다. 물론 노르웨이 사회도 분노로 동요했다. 이런 사람에게도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다는 것에도 분노했고 이런 사람이 정신병을 주장하며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 정신감정을 받을 거라는 소식에도 분노했다. 하지만 이런 감정적 동요가 그 어떤 사회적 제도나 장치의 작동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법원은 적법한 절차를 철저하게 동원했고, 변호사는 변호사로서의 소임을 다하는가 하면, 법정 밖에서는 이 사고를 사전에 막을 수 있었는지의 여부를 판단하고 총리나 정부의 책임은 없는지에 대한 상세하고 두꺼운 보고서가 작성됐다. 브레이비크가 ‘심신미약’으로 감형을 받거나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하게 되지는 않았다. 스스로 입장을 바꿔 자신이 얼마나 논리적인지, 얼마나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저지른 일인지에 대해 피력했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사회는 이런 테러범에게 이 사회가 얼마나 잘 짜여진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이 구조가 정교하고 정확하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줬다. 이 사회를 망치기 위해 나타난 것이 무엇이건 고작 그런 것 때문에 흐트러지고 망가질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명료하게 보여줬다. 그렇기 때문에 브레이비크는 노르웨이의 헌법에 따라 법적으로 보호 받으며 재판에 임할 수 있었고, 문장으로 명시된 형법에 따라 대가를 치르게 됐으며, 그 과정에서 변호사는 변호사로서 할 수 있는 소임을 다했고, 브레이비크는 다른 범죄자나 죄수들이 누리는 것과 똑같은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한국은 그야말로 차별과 혐오의 사회다. 제노포빅과 호모포빅을 드러내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으며, 미소지니나 여성 차별이 미만해 스스로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할 정도의 사회다. 장애인이나 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공기처럼 만연하다. 여기에 학력과 출신지가 더해져 차별의 항목이 늘어나고 심지어는 외모에 대한 차별과 혐오도 아무렇지 않게 방송으로 유통-소비되는 사회다. 차별할 수 있는 수단을 총동원해 차별하고 혐오해선 안 되는 모든 것을 혐오한다. 노르웨이의 7월 22일 테러는 차별주의자 혹은 혐오주의자 한 명이 만들어냈지만 한국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활동하는 수많은 차별주의자와 혐오주의자들이 매일같이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제주도에 피신해온 시리아인들은 한 명도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성소수자들에 대한 루머와 가짜뉴스를 주류 개신교 사회에서 생산하며 혐오를 확산시킨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택시기사들은 최소한의 정치적 올바름마저 포기하게 만드는 인간들이라는 글을 적어도 수많은 공감을 얻어내고, 영화에서 조선족을 범죄의 온상으로 그려내도 흥행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불법 촬영물이 작품이라 떠받들어지며 소비되는 사회에서 남성들은 그저 여성이 군대에 가야만 평등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군대가 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며 수많은 반민주적 행위를 일삼고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동안 아무도 그래선 안 된다고 지적하지 않았으면서 말이다.
강서구 PC방 살인사건으로 많은 이들이 분노하고 있다. 피해자의 담당의는 피해자의 상태와 죽어가는 과정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묘사하면서 피해자를 도구로 분노에 기름을 부었고, 사건을 담당한 경찰들은 체포한 피해자의 얼굴과 신상을 전면에 공개하며 사회와 대중이 마음껏 분노할 시간을 마련했다. 가해자를 엄벌에 처하라는 청와대 청원은 100만 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했으며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체포된 가해자의 외모 비하가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강서구 PC방 살인사건은 우리에게 결과적으로 노르웨이의 2011년 7월 22일 테러와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따금 나타나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사회를 동요하게 만드는 누군가에 의해 그때그때 무너질 텐가? 우리 사회는 어떤 기준과 원칙을 가지고 작동하고 있는가? 기준과 원칙이 어느 순간을 틈타 변명과 합리화를 늘어놓으며 직무를 유기할 기회를 엿보고 있지는 않나? 우리가 슬프거나 분노하게 되거나 혹은 심지어 기쁠 때에는 작동하지 않아도 되는 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 여기는 어떤 모습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