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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황 Jul 16. 2019

인어공주와 보이콧재팬 사이

인어공주


사실 반인반수라는 이미지는 꽤 반역적이다. 이는 말하는 개나 하늘을 나는 뱀, 나아가 날개가 돋은 말보다 훨씬 과감한 방식으로 우리의 상식과 실제 세계를 거스른다. 개가 말하거나 뱀이 하늘을 나는 것, 말의 어깨에 날개가 돋은 것은 <보태어진 것>이지만 말의 목이 있어야 할 자리에 사람의 상반신이 붙는다거나 사람의 하반신에 어류의 몸통이 붙는 것은 마치 이종간의 교배에 의한 잡종에서 시작해 외과적 수술에 의한 접합술에 이르는 고약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해서, 곧장 머리속에서 잘려나간 말의 목과 인간의 하반신을 합쳐본다거나 생선 대가리와 인간의 하반신을 합쳐본다. 게다가 인어공주 캐릭터의 모티브라 할 수 있는 슬라브 신화의 루살카는 인간을 물에 빠뜨려 죽게 만드는 요정 혹은 요괴로 묘사된다. 잔인하기까지 하다. 이런 맥락을 장르와 세계관의 변형으로 누그러뜨렸다 하더라도 인어공주는 상당히 반역적인 이미지고, 사람들은 이 반역적 이미지를 좋아한다.

몇몇 사람들이 말했다. 인어공주는 백인이 주인공이어야 한다고. 이런 주장이 인종차별은 아니고 그저 어린 시절의 추억과 연결되어 있다고. 사람들이 추억이라는 표현을 줄곧 썼지만 사실은 <판타지>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훨씬 적확하다. 어린 시절, 인어공주라는 애니메이션과 함께 탐미한 판타지의 실체는 사실 비키니를 입은 어린 백인 여성과 닿아있다. 가슴을 가리비 껍데기로 가린 10대 후반 여성의 이미지는 첫째로는 만화라는 장르에서 한 번 완화되고 하반신이 물고기 꼬리라는 컨셉에서 재차 완화된다. 그렇기 때문에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인공들을 통틀어 가장 옷을 덜 입은 캐릭터임에도 거부감이 없다. 하지만 피부색이 달라지는 것 하나만으로 거부반응이 일어난다. 인어공주-반신반수라는 이미지의 반역에도 열광하던 이들의 반응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상상력

진정성의 추구는 인과의 관계를 성실히 추적해 설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근대적인 태도다.  1980년대까지 진정성은 분단과 제국주의, 통일과 이데올로기, 민주주의와 독재로부터 집단을 조직하고 운동의 당위를 만드는 과정에서 추구됐지만 1990년대 중반을 지나치면서 사람들은 이 진정성으로부터의 탈주를 꾀하기 시작했다. 일단 대학생들이 그랬다. 더이상 <자본론>을 교과서로 삼지 않았다. 이들은 후기구조주의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따랐다. 국가나 사회, 공동체의 작동을 위한 자아보다는 자기 개발을 통한 자아의 인프라를 구축했다. 그런 풍조의 표면에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조크든요>가 돌출되곤 했다. 체계적이고 논리정연하고 단단하고 고결한 진정성을 거부하고 즉흥적이며 감정적이고 무르며 심지어 천박한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이는 타락 혹은 퇴보가 아니다. 이는 역으로 전대의 전체주의를 드러내고 권위주의를 드러내며 또한 전대의 태도가 가진 시대적 한계를 드러냈다.

시간은 흘러 21세기가 도래했다.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이 대등하게 이 세계를 양분했다. 정치적 키워드에서 <독재 타도>가 소거된데 이어 <이데올로기>도 소거됐다. 오늘, 현실감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김일성-김정일 체제의 북한과 김정은 체제의 북한이 다르다는 것은 생생하게 감지한다. 지금까지 국가나 집단이 창세기의 선악과 나무처럼 삼아왔던 것들이 연이어 시들어버리는 것을 차곡차곡 경험하면서, 이제 세계가 훨씬 다양한 차원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들은 이 세계를 감지하기 위해 전보다 더 과감한 상상력을 동원해야 한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얼마전 트럼프와 문재인, 김정은의 판문점 번개 당시, 모 온라인 커뮤니티엔 판문점에서 트럼프와 김정은이 안 만난다는 것에 <부랄 두 쪽을 걸겠다>는 남성이 있었는데, 이제 그런 현실감각 없는 사람들이 도태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민족

민족은 가상의 공동체 집단이며 동시에 판타지다. 하나의 뿌리를 통해 뻗어온 민족이라는 설정은 심지어 유아론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에 천착하는 것은 근대적 태도와 거리가 멀다. 그러나 지난 100년동안 이 유아론적 설정의 민족 개념은 생장을 거듭해왔다. 민족은 이제 깊은 뿌리와 많은 가지로 뻗은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이 됐다. 스스로 근대화를 추진하지 못한 한반도인들은 조선과 한국 사이의 어떤 고리를 의식적으로 부정하거나 누락시켰고, 이 <엄중한 고리>에 대한 진정성 있는 판단을 유보해왔다. 일본의 제국주의에 의해 개화를 겪었다는 수동적 경험은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자존감 결핍으로 이어졌다. 이 자존감 결핍은 피해 서사의 역사관을 만들었고, 다시 피해 서사는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정언명령을 발설하고, 다시 이 정언명령은 한국이라는 공동체 내에서 민족을 강력하게 드러낸다. 또한 한국인에게 민족은 엄밀히 말해 선험적 치부를 드러내는 도구다. 그렇다. 민족은 선험으로 한국인의 정체성에 내재된 무언가다. 그러므로 또한 민족은 한국인에게 정체성 규범과도 같다. <민족에 찬동하면> 누구든 한국인이 될 수 있다. 심지어 피부색과 무관하게.

선험적 민족이 21세기의 상상력 속에서 생생하게 현현할 수 있는 이유는 유일하게 정치적으로 강력한 생명력을 지닌, 시들지 않은 선악과 나무로서의 일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가 다양한 차원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감지하는 사람들도 이 존재 앞에서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동산 위에 있는 그 나무 하나만큼은 건들지도 말고 얼씬거리지도 말라는 어떤 명령에 충실하게 따른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있듯 선악과를 따먹지 않으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뒤의 물이 앞의 물을 밀어내며 흐르지도 않고 과거와 현재가 대화하지도 않는다. 이런 상태에서 <알아야 할 역사>는 없다. 타협 불가능한 절대악이 설정된 그것은 이미 역사가 아니라 판타지에 가깝다. 판타지로서의 역사를 믿는 것은 민족에 찬동하면서 한국인이 되는 상태를 뛰어넘는다. 민족과 자신, 영토와 자신, 국가와 자신, 역사와 자신을 동일한 규모로 확대 혹은 축소시키고 동기화 한다. 때문에 내가 하는 행동이 곧 민족의 행동이 되고 영토의 기운이 되며 국가의 위상이 되고 역사의 조명이 된다. 그래서 일본 여행을 취소하는데 수수료 따위가 문제되지 않고 일본 맥주를 팔지 않는데 매출 감소 따위가 문제되지 않고 일본 차량에 주유를 거부하는 것에 차별 따위는 문제되지 않는다. 당연히 독재 타도를 이룩한 이들이 경복궁 정문으로 대통령이 등장하는 장면을 보고 아무런 문제를 삼지 않는다. 이 모든것은 동시대 한국에서 감격적 장면으로 숭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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