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조연인 세상
#피프티피플 #정세랑작가 #창비 @changbi_insta
사건이 아닌 인물에 중심을 둔 소설을 오랜만에 읽었다. 고등학교때는 영화를 많이 보고,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던것 같은데, 내 고등학교 시절 오랜 시간을 들여 읽었던 책이 이문열의 삼국지와 박경리의 토지였다. 한두권짜리도 아니고 그 긴 장편들을 두번씩 읽다보니, 고등학교가 다 끝나가고 있었다. 학교에서 만나는 맨날 똑같은 사람들. 그 사람들 마저도 모두 비슷비슷해보여서 친구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던 시절이였다. 소설속 인물들은 나의 훌륭한 선후배친구들이 되었다. 어떻게 살아야 이런 다양한 인간군상을 묘사할 수 있는건지 박경리 작가의 삶이 궁금하기도 했고, 부럽기도 했다. 꽤 오랜 시간 삶과 사람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있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정세랑 작가의 피프티 피플을 손에 쥐고, 무슨 이런 제목이 다 있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목차를 보니 진짜 50명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였다. 한명한명에 할당한 페이지가 길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어느 한명도 소홀히 다루고 있지 않다. 박경리 작가에 비하면, 정세랑 작가는 한참 어린 나이에 이런 구성을 시도할 수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 소설은 50명(정확하게는 51명)의 이야기를 병렬로 연결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들을 연결하는 특별한 줄거리가 존재하지도 않고, 복선이 존재하지도 않다. 간혹 여기에 나왔던 사람이 다른 편에 슥슥 지나가기도 하지만, 특별히 인상깊은 관계를 맺지도 않는다. 작가는 간혹 사람들이 몸을 움직이거나, 춤을 추는 장면들이 나오고 결과적으로 전원이 춤을 추게 하여 ‘모두가 춤을 춘다’라는 가제를 생각했다고 하지만, 이 소설은 마지막에 영화관 화재라는 대형 참사로 마무리 하고 있다. 다행히 이 소설의 품위를 지켜준건 대형 참사의 사망자가 0명으로 마무리 되었다는 것이다. 대형 사건을 끝에두고 소설은 흘러가고 있지만, 인물들을 몰이하지 않고 각자의 삶을 살도록 한 것이 이 소설의 감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승전결없는 병렬구조의 글을 읽는거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끝까지 책을 놓지 않았던 것은, 하나하나의 장, 한명한명의 이야기안에 작은 긴장감들이 빼놓지 않고 존재하기 때문이다. 낮은 전류가 각기 다른 주파수로 흐르다 간간히 튀어오르는 느낌이 있다. 또한 전체를 흐르는 사건이나 연결고리가 없기때문에, 어느 장에서 시작하든 크게 상관없지만, 인물간의 교차가 존재하기때문에 인내를 가지고 읽어보는 것 또한 기대감이 부풀어오르는 재미가 있다. 형식이 너무 압도적인 글이라, 왜 이런 식으로 글을 쓴 건지 중간쯤 짜증이 살짝 밀려오기도 하지만, 잘 참아내고 끝까지 읽으면 작가의 말에서 정세랑 작가의 고백을 만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주인공인 세상. 아니 모두가 조연인 세상. 그런 세상이 더 행복한 세상이라는데 동감한다. 윤여정 배우의 ‘뜻밖의 여정’을 보면서 이 프로그램의 주인공은 윤여정이 아니구나 느꼈던것처럼. 윤여정 배우가 ‘조연이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윤여정의 여정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했고, 우리의 여정에도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나홀로 주인공인 영화가 되는 것보다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끝으로 마흔이 되어버린 나에게 조희락의 한줄은 몇번을 되새기게 하였다.
조희락 - “서른은 사실 기꺼이 맞았다. 도무지 뭘해야할 지 모르겠는 20대가 너무 힘들어서 서른은 좋았다. 마흔은, 마흔은 조금 다른것 같다. 삶이 지나치게 고정되었다는 느낌, 좋은 수가 나오지 않게 조작된 주사위를 매일 던지고 있다는 느낌 같은게 있다.”
그림은 #concretegarden #이슬아작가 @lllllllll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