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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호 Oct 15. 2019

담장 안의 여행





선인장을 물을 주듯 오랜 샤워를 해야 했다. 힘없는 말투일지언정 미적지근한 마음 따위는 전하지 않겠다는 듯 뜨거움과 차가움을 오가는 샤워기 앞에서 오래 머리를 숙였다. 머리를 식히는 대신 분주하게 두 발을 움직여야 했다. 아차 싶다가도 뜨거움을 온몸에 부지런히 나누어야 했다. 깊은 잠에서 깬 여행의 아침.


한가한 하루가 될 것이다. 한가한 여행을 만들 것이다. 해야 할 것이 없는 하루는 드물지 않았으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달가운 것은 오랜만이었다. 텅 빈 하루는 무료했고 그런 날은 으레 보잘것없는 것들로 메우게 됐다. 소식 없는 휴대전화를 들고 찾을 것 없고 기록할 것 없는 노트북을 마주하고 마음 같지 않게 자주 웃어대는 TV 앞에 누워 내가 아닌 것들로 시간을 채웠다. 내가 없는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도 흐르고 있는 줄도 몰랐다. 해는 쉽게 지고 미처 잠들기 전에 뜨기도 했다.


며칠을 더 머물러야 하니 어디든 오래 머물러야 할 것이다. 오래 바라보기도 해야 할 것이다. 조식 시간이 끝난 숙소에서 오후 세시까지 허락된 커피를 뽑아들고 창가에 앉았다. 선인장에 물을 주듯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초원이 사막으로 변했대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속도로 낡을 것 같은 건물의 주름을 헤아린다. 펄럭이는 빨래의 손짓을 보며 바람을 느낀다. 매끈한 커피 잔을 매만지며 괜히 당신의 이야기도 적어 보았다.









눈을 어지럽히는 몇 마리의 새들이 오래된 건물과 그보다 낡은 건물 사이를 분주히 오갔다. 그 분주함이 자주 시선을 빼앗았으므로 소란스러운 거리와 낡은 건물 사이에 펼쳐진 그들의 골목이 궁금했다. 분명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으니 골목이라 해야 할 텐데, 1층과 2층의 사이를 막아 두어 아래야 어찌 되었든 사람이 다니지는 못할 것이었다. 인파로 붐비는 소란스러운 거리에 접해 있지만 다른 세상 같기도 했다. 새들만 사는 세상. 창문을 열면 새들의 세상이 펼쳐졌으므로 저곳의 사람들은 매일 아침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을 것이다. "오늘도 잘 부탁해." 하고.


새들은 집과 집 사이를 오가며 푸른 날갯짓을 펼쳤다. 지키고 싶은 몸짓 보다 가꾸려는 분주함에 가까웠다. 내 방의 액자와 책을 매만지던 오래된 일상의 고요한 날처럼, 그들의 골목을 더욱 풍성하게 하려는 평온한 날갯짓이었다.


오래 지켜온 골목이 그들에겐 소중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다 오늘의 나처럼 시간이 넘치면 4층 집 소녀의 수줍은 마음을 물어 건너편에 사는 소년에게 전하기도 했을 것이다. 소년의 옆집에 태어난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를 집집이 퍼트리기도 했을 것이다. 수다를 엿듣고 저녁 술 한 잔의 약속을 전하려 창문을 기웃거리기도 했겠지. 이별과 떠남을 전해야 했을 땐 함께 슬퍼도 했을 것이다. 대신 목놓아 울기도 했으리라.









새들의 일상을 그려보다 정말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 오래된 건물과 그보다 낡은 건물의 골목을 기웃거렸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곳에 닿을 수 없었으니, 바라볼 수밖에 없는 저곳이 근사한 보금자리인 것만 분명해졌다.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지칠 때까지 걸음을 이어갔다. 세시가 되기 전 돌아와 한 잔의 커피와 함께 다시 그들의 골목을 바라본다.


새들은 자신들의 골목을 떠나지 않았다. 쉬이 떠날 수 있는 그들이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여행은 그저 목소리를 갖지 못한 내게 주어진 하나의 숙제에 불과할 뿐인지도 모른다. 몇 번의 시도에도 여전히 더디기만 한 숙제. 굳은 결심으로 펼치고 열심히 밑줄을 긋지만 결국은 지쳐서 다른 길로 새게 되는, 그래서 앞만 거뭇하게 닳은 끝을 정해두지 않은 지난한 숙제. 그럼에도 언젠가는 뿌듯한 마음으로 완성해보고 싶은, 그런 숙제 말이다.


다음 날 아침을 먹으며 수시로 커피를 마시며 시도 때도 없이 담배를 태우며 바라봐도 그곳을 떠나는 새는 보이지 않았다. 골목 아래에는 여전한 인파가 밀려왔다 쓸려가고 있었다. 나도 이내 휩쓸려 떠나야 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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