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외국민투표, 그 (은밀한 듯 평범한) 실제 모습...

해외에서 8년 살았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재외국민투표를 하게 되었네요..

동이 트지 않은 새벽..


아내가 서둘러 외출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뉴델리 한국대사관에서 진행되는 재외국민투표에 참관인으로 봉사하기 위해서이다. 아침 7시까지 도착해야 한다며 서둘러 나간 아내는 늦게까지 투표장을 지켰고, 저녁 식사 시간이 다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1967년에 도입되었던 재외국민 투표가 1972년 10월 유신으로 폐지된 지 40년 만에 부활한 것은 2012년이었다. 재외국민투표는 지방선거에서는 실시되지 않고,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는 대선과 총선에서만 실시된다. 대선과 총선이 우리 가족의 해외 거주 시기와는 단 한 번도 겹친 적이 없어서 나와 내 아내에게도 이번이 생애 첫 재외국민투표이다.




재외국민 투표장을 하루 종일 지킨 아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더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우선, 자기와 같이 참관인 봉사를 한 사람들과 나눈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가장 먼저 저녁 식탁에 올려놓는다. 인도에 오래 거주해온 교민들, 주재원으로 잠시 몇 년간 머무는 사람들, 주재원으로 나왔다가 정착한 사람들 등등 다양한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들이 제법 즐거웠단다. 하루 종일 집에만 갇혀 있다가 오랜만에 한국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온 아내는 피곤하지만 꽤나 즐거운 표정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의 이야기는 재외국민투표에서 한껏 경험한 '국뽕'으로 옮겨갔다(^_^;). 우선, 우리가 한국에서 투표할 때 흔히 보던 투표함, 칸막이, 투표용지 인쇄기 등등이 외교행낭을 통해 공수되어 대사관 강당에 그대로 설치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봤던 투표소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었다는 거다. 깔끔하게 출력된 투표용지, (인도 답지 않게) 깨끗하게 준비된 모든 설치물들... 인도에서 오래 살아온 나이 드신 교민 한분은 이 모든 것을 직접 보고는 감격에 겨워 탄성을 터트리셨다고 한다.


"아유... 이런 자랑스러운 모습을 인도 사람들에게도 좀 보여줘야 되는데...."


아내를 감탄하게 만든 작지만 신박한 기술도 있었는데, 그것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부정선거를 방지하기 위한 기술이었다. 매일매일 투표 시간이 종료되면 투표함의 입구는 특수한 테이프로 밀봉된다는데, 그 테이프는 한번 붙였다가 떼면 즉시 색깔이 변색되는 특수한 테이프라는 것이다. 참관인 사전교육에서 테이프가 변색되는 모습이 시연되었는데, 앉아 있던 참관인 봉사자들이 그걸 보고는 일제히 '어머나'라며 탄성을 터뜨렸단다. 사소한 듯 보이지만 반드시 필요한 좋은 기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가 워낙에 면적이 넓은 나라이다 보니 뉴델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다 보면 투표장까지 오는 일 또한 고역일 수밖에 없다. 자기 차량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자가용이 없는 교민들에게는 세계 최악의 수준을 자랑하는 대중교통 수단을 타고 수백 킬로미터를 여행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분들을 위해 대사관에서 예외적으로 왕복교통편도 제공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이번 재외국민투표에는 다람살라와 같은 불교 유적지에 장기 체류하는 한국 승려분들이 대사관의 도움을 받아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금은 냉정하고 속물적으로 생각해보니, '민주주의는 유지 비용이 많이 드는 정치체제일 수밖에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ㅎㅎ) 당장 재외국민투표에 들어가는 돈만 해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한국의 투표장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기계와 장치들을 전 세계로 보내 설치하고, (비록 한국 기준으로는 최저시급에도 못 미치는 형편없는 금액이긴 하지만) 유료로 참관인들을 모집하고, 심지어 대사관 차량까지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보내 유권자들을 운송해주는 이 모든 것들이 돈 없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 막대한 비용은 모두 우리 국민들이 힘들게 벌어서 낸 세금에서 나오는 지출이다. 나라 살림살이에 드는 돈은 많고, 결국 재외국민 투표 관련 예산이 조금씩 삭감되고 있다고 한다.


"재외국민투표 관련 예산이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고 하더라구. 이번 선거에서는 참관인들에게 제공되는 도시락 값이 모자라서 대사관 직원들이 개인 돈을 좀 갹출해서 그나마 먹을만한 도시락을 예약했대..."




재외국민투표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인터넷을 뒤져보니 몇 가지 추가적인 사실도 알게 되었다. 국내 투표에 비해서 유권자 1인당 소요비용이 거의 50배에 달하다 보니(https://www.hankyung.com/politics/article/202005279236Y), 전 세계를 통틀어 100개도 안 되는 투표소가 설치될 수밖에 없다(https://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1011312.html). 인도나 중국처럼 넓은 땅에 흩어져 사는 재외국민에게는 투표권 행사가 그림의 떡인 경우가 많다. 투표하러 가는데 하루, 투표하는 데 하루, 돌아오는데 하루, 총 3일이 걸린다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다.(https://www.yna.co.kr/view/MYH20210920001500038)


투표소가 설치되면 그나마 다행이다. 아프리카나 남미의 경우 해당 국가에 단 한 개의 투표소가 설치되지 않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해외 유권자들의 투표율은 매번 선거 때마다 한자릿수에 머물러 있다. 이 때문에 외국의 사례처럼 우편투표를 도입하여 비용을 낮추자는 주장과, 비용이 좀 더 늘어나더라도 해외 투표소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서로 맞서고 있는 상황인 듯하다.


흔히들 '자유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와 같다'라고 한다.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자유와 민주의 가치는 중요하다는 뜻이리라. 국민주권을 행사하기 위해 목숨까지도 버리는 사람도 있는 마당에 그깟 세금 좀 많이 쓰이는 게 뭐가 문제냐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반면에 돈만 많이 들고 참여율은 형편없는 이런 제도는 합리적으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둘 다 맞는 말이다.


다만, 이 세상에 완벽한 정치제도와 관행이 어디 있을까? 2012년에 도입되어 이제 갓 10년을 시행한 재외국민투표 제도 또한 변하는 시대상과 예산 제약 등 다양한 상황을 고려하여 계속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전 세계에 흩어져 살지만 자랑스러운 한국 국적을 계속 보유하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 국적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기 위한 진지한 고민이 계속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주중에는 회사 일 때문에 바빠서 투표장에 못 갔는데, 재외국민 선거는 해외에서 생업에 바쁜 주재원들의 편의를 위해 주말에도 투표가 진행된다. 고맙고 다행스러운 마음뿐이다. 이번 주말에 투표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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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을 덧붙이자면...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많은 희생을 치르며 민주주의를 지켜낸 프랑스의 경우는 어떨지 궁금해져서 좀 조사를 해보았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우선, 해외 유권자들에게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기 위한 참정권을 주는 것은 비슷하다. (사실 프랑스 뿐만이 아니고 해외 유권자에게 참정권을 보장한 나라는 제법 많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프랑스 사이에는 아주 중요한 차이점이 있는데, 프랑스에서는 해외 거주 유권자를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해외에 사는 유권자들은 자신들의 주민등록지 선거구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을 뽑는다. 즉, 나는 인도에 거주하지만 총선 때 내가 뽑는 국회의원의 선거구는 (예를 들어) '성북 갑'인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그 국회의원은 자신의 선거구인 성북구 주민을 대표할 의무가 있을 뿐 나와 같은 인도 거주 한국인들의 민의를 전달할 의무가 없다.


히지만, 프랑스의 경우 전 세계를 11개 선거구로 나누어 각 지역에 거주하는 국민들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을 따로 뽑는다.(https://fr.wikipedia.org/wiki/Circonscriptions_l%C3%A9gislatives_des_Fran%C3%A7ais_%C3%A9tablis_hors_de_France) 해외살이하는 재외국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의견을 본국 정부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이제 세계 10위권의 경제적 위상을 갖추게 된 우리나라가 한번 진지하게 도입을 고민할 필요가 있는 제도라는 생각도 들었다.


마지막으로, 깨알 정보 하나를 투척하자면(^_^;) 프랑스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나라는 스위스(2022년 기준 프랑스 전체 재외국민 선거인단 161만 명 중 10%가 넘는 17만 명)이다. 총 11개의 선거구 중에서 스위스와 인접 리히텐슈타인은 제6선거구에 해당하는데, 현재 이 지역 국회의원은 한국계 프랑스 입양인인 Joachim Son-Forget(한국명 김재덕) 의원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Constituencies_for_French_residents_overs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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