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팡이에게도 '보는 눈'이라는 게 있나봐요

옷장 속 곰팡이와의 끝나지 않는 전투 이야기...

뉴델리에서의 첫 해를 보내고 맞이한 2021년 어느 봄날의 일요일 아침.


일주일에 한 번인 대청소 날을 맞아 그날도 어김없이 온 가족이 자기가 맡은 구역을 청소하고 있었다. 내가 맡은 마스터 베드룸(우리로 치면 안방 격)을 청소하다가 옷장을 한번 열어 보았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그날따라 유독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옷장 안을 휙 둘러보니 지난 1년간 자주 입었던 얇은 여름옷들도 있었지만, 인도의 무더운 날씨 덕에 거의 1년 가까이 꺼내보지 않은 두꺼운 겨울 옷들도 제법 많았다.


겨울 옷을 너무 오랫동안 옷장 속에 처박아 놓은 듯해서 잠깐이라도 볕이 잘 드는 베란다에 옷을 말려야겠다는 생각에 겨울옷 위주로 하나둘씩 꺼내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 겨울 코트 위에 허옇게 묻어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먼지인 줄 알았다. 손으로 툭툭 털어내고 다음 옷을 꺼내는데 거기에는 더 많이 묻어 있는 것이 아닌가? 뭔가 느낌이 싸했다. 후다닥 다른 겨울 옷들을 꺼내 들고 살펴보는데 약속이나 한 듯이 허연 것들이 옷의 이곳저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곰팡이였다.




인도의 주택은 우리나라의 아파트와는 조금 다르다. 우선, 집 안에 복도(hallway)가 있고 보통 복도의 한쪽 끝에는 마스터 베드룸이, 반대쪽 끝에는 거실이 존재한다. 그리고 마스터 베드룸과 거실 사이에 있는 복도를 따라 주방과 두 번째, 세 번째 베드룸들이 늘어서 있는 구조이다. 그리고, 일 년 내내 내리쬐는 뜨거운 햇살을 피하기 위해 마스터 베드룸을 포함한 대부분의 침실들은 남향이나 서향을 피해 북향이나 동향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햇볕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햇볕이 안 들어서 그나마 침실은 (집의 다른 공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원하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단점이 있다. 바로 습기에 취약하다는 점이다.


인도의 주택에는 각 방마다 독립된 화장실이 딸려 있다. 즉, 방이 4개면 화장실도 4개이다. 이러다 보니 세수를 한 번만 해도, 샤워를 한 번만 해도 거기서 발생한 습기가 그대로 화장실과 침실에 퍼지게 된다. 미세먼지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현지 인도인들은 수시로 침실의 창문을 열어 환기라도 한다지만, 우리처럼 미세먼지를 반기지 않는 사람들은 제대로 환기를 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침실도 북향이다 보니 그나마 습기를 없애줄 햇볕마저 잘 들지 않는다. 그야말로 곰팡이가 자라날 수 있는 천혜의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다.


또한, 인도의 건축 기술이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건축 자재가 부실해서인지 외부와 맞닿은 벽의 이곳저곳에 습기가 가득하다. 비라도 한번 내리고 난 후 거실이나 마스터 베드룸의 벽에 손등을 대어 보면 눅눅하다 못해 축축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우리나라와 달리 인도에서는 벽지를 바르지 않는다. 실내용 페인트를 칠한다)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실내 구조, 높은 습도, 방수 기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엉성한 시공 기술까지... 이제 곰팡이가 서식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조건이 다 구비되었다. 공중에 떠다니는 곰팡이 포자들이 살포시 내려앉기만 하면 게임 끝이다. ㅎㅎ




작년 봄의 '곰팡이 사태'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이번 겨울에는 생각날 때마다 침실의 옷장을 열어 환기도 하고 햇볕에 옷도 말리곤 했다. 한국에서 가져왔지만 사용하지 않고 모셔만 두었던 제습기도 종종 가동해 실내의 습도도 낮춰왔다. 하지만, 이국땅에 잠시 살러 온 우리 같은 이방인들은 이곳 인도에서 수십만 년 살아남은 곰팡이들을 당해낼 재주가 없나 보다. 잠시만 잊고 지내다 보면 옷장 속 이곳저곳, 침실 벽면의 여기저기에 허옇게 곰팡이 자국이 생기기 시작한다.


값싸고 얇은 여름옷도 많은데, 곰팡이는 유독 두껍고 비싼 겨울 옷에만 생긴다. 내 아내도 나도 모두 (좋게 말해서 검소하고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궁상맞다 싶을 정도로 옷 사는 데에 돈을 아끼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정말 몇 년에 한 번씩 큰맘 먹고, 몇 번을 고민고민하다 마련한 비싼 겨울 외투와 점퍼에만 곰팡이가 살포시 내려앉아 있다. 옷장 속에 걸려 있는 수많은 '자라', '에잇세컨즈', '유니클로' 옷에는 안 생기는 곰팡이가 어쩌면 이렇게도 귀신같이 비싸고 좋은 옷을 잘 찾아내서 거기에만 내려앉는지...


아마도 곰팡이에게도 보는 눈이 있나 보다. 걔네들 눈에도 '자라', '에잇세컨즈', '유니클로'는 들어오지 않는 것 같으니 말이다.


///


* photo by Etienne Girardet on unsplash.com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당신들이 상상하는 그런 인도는 존재하지 않는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