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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비와 호지의 아빠 May 28. 2022

나는 그녀를 추앙합니다.

As time goes by...

나이를 먹다 보니 여성호르몬이 뿜뿜해서 그런지 몰라도 눈물이 많아졌다. 젊었을 때에는 노래는 고사하고 아무리 애간장을 태우는 영화를 봐도 감흥이 없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노래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 가사가 조금이라도 슬프거나, 멜로디가 살짝만 처량해도 금세 코끝이 시큰해진다. 처음에는 노래를 듣다가 눈시울이 붉어지는 나를 보고 내 아내와 아이들이 적지 않게 당황했고, 나 역시 부끄러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뭐 그런 일이 워낙에 빈번하다 보니 아내와 아이들도 심드렁하게 반응하고("얘들아, 아빠 또 운다...", "아빠, 또 울어?"), 나도 딱히 부끄러울 것도 없다.


늙어감이 주는 자유로움이랄까... 자유롭게 내 감정을 표현해도 이제는 용서받을 수 있다.




며칠 전 '놀면 뭐하니'라는 프로그램에서 '김혜수'라는 가명으로 출전했던 댄서이자 안무가인 리헤이가 'As time goes by'를 불렀다. 가수도 아닌 댄서가 놀라울 정도의 가창력을 보여준 멋진 무대였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As time goes by'는 원곡 가수인 윤미래가 부르는 게 역시나 으뜸이다. 유튜브에서 '놀면 뭐하니'의 방송 클립을 보자마자, 윤미래가 부른 'As time goes by' 원곡을 찾아서 다시 한번 들어보았다.


어찌 들으면 읊조리듯, 어찌 들으면 말을 걸듯... 마치 석양이 지는 헤이리의 작은 카페에 쓸쓸히 앉아 있는 내 옆자리에 그녀가 나란히 앉아서 불러주는 듯하다. 너무나도 슬퍼서 멋진 그녀의 노래에 다시 한번 흠뻑 취해버렸다. 20대 초반의 젊다 못해 어린 나이에 어쩌면 이렇게도 슬픈 노래를 아름답게 잘 부르는지 그저 감탄할 뿐이다.




물론, 그녀는 뛰어난 가수이다. 하지만, 대중음악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에게 윤미래(T 또는 타샤라는 활동명으로도 활동했음)는 '우리나라 최고의 래퍼'이다. 그녀의 '검은 행복'(2007년 그녀가 발표한 4번째 앨범에 수록된 곡)은 감히 단언하건대 21세기 우리나라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곡이다. 모든 여성 K-pop 그룹에게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넘을 수 없는 곡이듯이, 모든 후배 래퍼들에게 윤미래의 '검은 행복'이 바로 그런 곡이다.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나이를 속이고 대중음악계에 데뷔한 후, 그녀가 겪은 말로 표현 못할 수많은 차별과 고통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 폭풍과 같은 시간이 지나고 이십대 중반에 이른 그녀가 비로소 세상을 용서하기 위해 내민 손짓이라고나 할까?


지금 래퍼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대중음악계에 기웃거리고 있는 수많은 후배들은 감히 범접하지 못할 실력과 그루브 그리고 아우라가 '검은 행복'이라는 곡 하나에 온전히 녹아 있다. 자신의 개인적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절절하고 가슴 아픈 가사, 귀에다 망치로 한 글자씩 때려 박는 듯 쏙쏙 꽂히는 정확하고 묵직한 딕션(diction), 그리고 음악을 듣는 사람의 영혼과 가슴을 조용하게 매만지며 위로하는 느낌은 두고두고 잊기 어렵다.   


멀쩡하게 한국에서 초중고를 다닌 토종 래퍼들이 한국어를 뭉개서 발음하는 게 멋진 거라고 착각하고 겉멋을 부리는 동안, 외국인 학교를 다닌 미국 국적의 '나타샤 리드(윤미래의 본명)'는 오히려 한국인보다도 더 정확한 발음으로 랩을 불렀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완벽한 한국어 딕션에 도달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지를 상상해보라. 온갖 듣기 거북한 비속어와 부질없는 플렉스(라고 쓰고 실제로는 돈 자랑), 별로 공감되지도 않는 중2병스러운 울분, 그리고 다른 아티스트와의 불화를 '디스'라는 문화로 포장하는 '꼴값'이 윤미래에게는 없다.


실제로 '검은 행복'이라는 노래에는 그 흔한 F word, S word 하나 없다.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해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의자에 앉아 혼자 읊조리듯 '검은 행복'을 불렀다. 허공에다가 가운데 손가락을 뻗지도 않았고 과장된 몸짓도 하지 않았다. 수줍은 듯 땅을 바라보며 그녀는 반주에 맞춰 '검은 행복'을 불렀다. 하지만, 첫 소절이 그녀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관객석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목소리 자체가 악기가 되어 공간을 가득 채웠고 관객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그게 아티스트이고, 그게 예술인 거다.


지금 젊은 세대들은 '태양의 후예'에 수록된 ‘Always’를 포함한 유명 드라마의 OST를 부른 얼굴 없는 가수로 그녀를 알고 있다고 한다. 래퍼이면 어떻고 가수면 어떠랴. 나 역시 우리나라 최고의 래퍼이면서 놀라운 가창력을 가진 그녀를 '래퍼/가수'로서 추앙한다. 그녀가 부른 '검은 행복'도 사랑하고 ‘As time goes by'도 좋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우리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노래를 많이 발표하면서 그녀가 우리 곁에 있어주기를... 그녀가 우리 시대에 같이 살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우리들의 곁에 오래오래 있어주기를... 우리 세대가 '윤미래 보유 세대'라고 기억될 수 있도록 우리 곁에 계속 머물러 주기를...


* p/s.  정권 아우님... 우리 미래 잘 부탁해요.. 그리고 조단아... 네 엄마는 정말 위대한 아티스트야... 엄마 말씀 잘 듣고 많이 많이 사랑해줘. 알겠지?



As time goes by


                                                T(윤 미 래)


마지 못해 살아가겠지 너없이도  

매일 아침 이렇게 일어나

밤새 조금씩 더 무뎌져버린 기억 속에서

애써 너의 얼굴을 꺼내어 보겠지


시간이란 누구에게나 느린 아픔을 주는지

힘든 하루 속에도 늘 니 생각뿐인 나

눈물마저도 말라가는데


As Time Goes by

난 그게 두려운걸

니 안에서 나의 모든게 없던 일이 될까봐

눈감으면 늘 선명하던 니가

어느 순간 사라질까봐

정말 겁이 나는 걸


이별이란 서로에게서 지워지는거라지만

많은 사람 속에도 늘 니 걱정뿐인 나

시간마저도 붙잡고 싶은데


As Time Goes by

난 그게 두려운걸  

니 안에서 나의 모든게 없던 일이 될까봐  

눈감으면 늘 선명하던 니가  

어느 순간 사라지게 될까봐  


내가 없는 세상이 너는 괜찮은건지  

너에게 잊을만한 추억일 뿐인지  

참으려 애를 써도 늘 보고픈 나는  

니가 아니면 안될 것 같은데  

You are the on-e  


As Time Goes by       

난 여기 있어줄께  

셀 수 없는 밤이 지나도 사랑했던 그대로  

혹시라도 너 돌아오게 되면  

단 한번에 나를 찾을 수 있게  

As Time Goes by


https://www.youtube.com/watch?v=Wf0dED4CCV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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