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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비와 호지의 아빠 Sep 17. 2022

다섯개의 유적지로 알아보는 인도의 종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시크교, 기독교...

[# 1] 정교하고 아름다운 석굴을 남긴채 사라진 종교... 불교


1819년 4월, 인도 마하라슈트라주의 아우랑가바드에 파견나와 있던 영국군 소속의 젊은 장교 존 스미스 대위는 무료한 시간도 보낼 겸 동료 장교들과 함께 인근 산악지역으로 호랑이 사냥을 떠났다. 와고라 강(와고라는 호랑이라는 뜻) 근처에 있는 숲속을 헤매던 그의 눈 앞에 거짓말처럼 거대한 협곡이 갑자기 나타났다. 반대편 협곡의 벽면에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는 석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에게는 더 이상 호랑이 사냥이 중요하지 않았다. 협곡의 반대편 절벽을 힘겹게 기어올라 마침내 동굴의 입구에 도달한 그는 현장에서 급조한 횃불을 손에 쥐고 동굴 안으로 한발 내디뎠다. 1,000년 가까이 세상에서 잊혀져 있던 세계 최대의 석굴인 아잔타 석굴이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기원전 2세기에서 1세기까지 그리고 기원후 5세기부터 7세기까지 두 차례에 걸쳐서 총 29개의 석굴이 그야말로 깎아지른 절벽의 벽면에 가지런히 만들어졌다. 돌을 깎아 정교한 석상을 만든 것도 모자라 몇몇 석굴에서는 석고위에 세련되게 그려진 프레스코화도 발견되었다. 1,500년 전에 그려진 그림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세밀한 묘사와 생동감 넘치는 표현으로 방문객들을 사로잡는다. 뭄바이에서 약 45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인도를 대표하는 이 관광지는 그 역사적 종교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든다. 기원전 6세기경 인도에서 탄생하여 지금도 세계 3대 종교에 하나로 성장한 불교가 왜 유독 인도에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일까? 이렇게 거대한 석굴을 만들 정도로 융성했던 이 종교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 2]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처음으로 만나던 날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진 이유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다소 엉뚱하지만 잠시 인도에 이슬람교가 전파되기 시작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7세기에 사우디아라비아 지역에서 창시된 이슬람교는 이후 8세기경에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지역까지 진출했고 결국 현재 인도의 북서부인 펀잡 지방에서 힌두교와 조우하게 된다. 각각 서아시아와 남아시아를 대표하는 두 개의 세계적 종교가 드디어 만나게 된 것이다. 이후 약 500년에 걸쳐 이슬람교는 힌두교를 밀어내며 남동쪽으로 세력을 넓혔고, 12세기 후반에는 현재의 뉴델리까지 진출하게 된다.


뉴델리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꼭 들리는 꾸뜹미나르는 인도 북부까지 진출한 이슬람 교도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쌓아올린 73미터가 넘는 거대한 탑이다. 1층은 힌두 양식으로 2, 3층은 이슬람 양식으로 만들어진 이슬람 건축양식과 힌두 건축양식이 절묘하게 어울어져 건축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이 탑은 종교사적 측면에서도 큰 의미를 갖는다. 이 탑이 완성되던 시기 즉, 이슬람교가 불교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북인도를 완전하게 손아귀에 넣은 12세기말에서 13세기에 이르는 시기가 인도에서 불교의 교세가 급격히 꺾이는 시기와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의 학자들은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이유를 놓고 ‘불교가 지나치게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이었기 때문에 도태되었다’, ‘힌두교와는 달리 인도인들의 관혼상제와 같은 일상생활에 깊숙하게 파고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부를 축적한 불교 승려들이 일반 대중에 대한 포교에 관심을 쏟지 않았기 때문이다’ 등의 학설을 제기해왔다. 물론, 상당히 일리있는 의견이다. 하지만, 불교의 형이상학적인 특성이 교세 확장에 걸림돌이었다면 동남아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까지 불교가 퍼져나와 수백년 동안 융성했던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동남아 지역을 중심으로 일상생활에 깊숙하게 파고들어 자리잡은 불교식 생활관습을 보면 두 번째 가설 또한 설득력이 떨어져 보인다. 그렇다면 좀더 설득력 있는 학설은 무엇일까?


불교가 인도에 뒤늦게 진입한 이슬람교와의 경쟁에서 도태되었기 때문이라는 종교사회학적 분석이 꾸준하게 힘을 얻고 있다. 어차피 철저한 계급사회를 옹호하는 카스트 제도에 기반한 힌두교가 수천년간 인도 전역을 지배하고 있었고, 인간 평등 사상과 해탈을 기본적 가르침으로 하는 불교는 어디까지나 이에 대항하는 ‘저항종교’ 내지는 ‘비주류 종교’였다. 상인집단과 귀족 계급의 물질적 후원에 취해 인도의 일반 대중과 이미 멀어져있던 불교는 12세기와 13세기 무렵에 이슬람교가 북인도를 장악하며 자신들을 탄압하자 제대로 된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사라지게 된다. 


이슬람교가 불교도를 대체하겠다는 목적을 갖고 인도에 진출한 것은 물론 아니다. 카스트 제도에 반대하고 사후 천국을 믿는 이슬람교가 어찌어찌 하여 인간 평등 사상과 및 해탈에 대한 믿음으로 대표되는 불교를 자연스럽게 대체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불교도가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던 인도 북동부의 벵골 지역과 파키스탄의 신드 지역에서는 상위 카스트 브라만들의 폭정이 시달리던 불교도들이 이슬람교의 침입이 시작되지 기다렸다는 듯이 이슬람교로 대거 개종하기도 했다. 이렇게 거대 종교 하나가 서서히 사라져 갔다.

 



[# 3] 시크교도의 성지가 유린되었다


인도 북부에서 불교가 급격히 쇠락한지 약 2세기 가량이 지난 후에 인도 북서부에서는 새로운 종교가 나타났다.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장점을 취해서 구루 나낙(1469-1538)이 창시한 시크교였다. 다만, 힌두교가 가진 미신적 성격, 번잡한 종교의식 그리고 카스트 차별을 배격하면서 인간의 평등을 주장했다. 인간 평등에 대한 시크교도의 믿음은 그들의 이름에서도 드러난다. 남성 시크교들은 모두 싱(Singh, 사자라는 뜻)이라는 성을 사용하고 여성의 경우 카우르(Kaur, 공주라는 뜻)를 사용한다. 인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성(family name)만 보아도 그 사람의 카스트 계급을 알 수 있으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함인 것이다.


타 종교에 비해서 비교적 늦게 탄생한 종교이다 보니 과거의 종교가 가졌던 폐단을 배격하는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남녀노소에 따른 차별도 배격하며, 금주와 금연, 가난한 자에 대한 자선, 허례허식 금지 뿐만 아니라, 18세기초 이후로는 종교 지도자에 대한 숭배를 막기 위해 더 이상 ‘구루’도 뽑지 않고 모든 신도가 종교지도자라는 믿음을 따르고 있다. 종교가 창시되던 당시에는 평화주의적 성격이 강했으나 이후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종교갈등 속에서 자신들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교리에 전투적인 속성이 더해지게 되었고 자신들만의 독립국가를 꿈꾸는 무장 분리 독립운동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결국 비극의 막이 올랐다.


1984년 6월 1일, 인도 북서부 펀잡주의 암리차르에 소재한 시크교의 총본산인 황금사원을 향한 인도 정부의 군사작전이 개시되었다. 시크교도들의 독립 국가를 만들려는 ‘칼리스탄 운동’의 주요 지도자들과의 평화협상이 지지부진하자 당시 인도 총리였던 인디라 간디가 시크 분리주의 운동 지도자들이 은신하고 있던 황금사원을 타겟으로 한 군사작전을 승인했다. 블루스타 작전이라 명명된 이 군사작전이 일주일 이상 지속되면서 시크교 성지인 황금사원은 큰 피해를 입었으며 무수한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인도 정부는 약 500여명의 시크교 무장 세력과 시크교도들이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암리차르의 황금사원이 인도 정부군에 의해 유린된지 얼마되지 않은 1984년 10월 31일, 인디라 간디의 경호원 중 2명의 시크교도가 그녀를 암살한다. 이에 충격을 받은 힌두교도들이 북인도 지역을 중심으로 수천명의 시크교를 살해하며 보복에 나섰다. 인디라 간디의 사망 이후 총리직을 물려받은 그녀의 아들 라지브 간디는 같은 해 11월 19일 공개석상에서 ‘큰 나무가 쓰러지면 땅은 흔들리는 법이다’라며 시크교도에 대한 폭력행위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아무리 자기 어머니의 암살과 관련된 종교집단이 미웠어도 국가의 지도자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발언이었다. 시크교도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과격 분리주의 단체인 바바르 칼사(Babbar Khalsa)가 1985년 6월 에어인디아 182편에 폭탄테러를 가하면서 300명이 넘는 승객과 승무원이 사망했다. 국제사회가 자제를 촉구하자 그제서야 양측은 보복행위를 멈췄지만 깊게 새겨진 상처는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사라지 않고 있다.




[# 4] 500년의 역사를 가진 인도의 기독교 역사


인도 남서부에 고아라는 주가 있다. 인도의 28개주 중에서 가장 면적이 작은 주로서 제주도의  2배정도 된다. 지금은 남아시아 전체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휴양도시로서 10월부터 2월까지 유럽인들과 러시아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휴가 기간 내내 사우스 고아에 위치한 고급 호텔에서 밖으로 빠져나오지도 않겠지만 해변가를 조금만 벗어나서 시내로 들어오면 뜻밖의 광경이 펼쳐진다. 바로 시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성당과 천주교식 묘지이다.


고아를 무역항으로 개척한 포르투갈 상인들을 따라 천주교가 이곳에 발을 디딘 것은 1510년이었다. 영국이 인도의 북부를 오랫동안 점령했듯이 남인도의 진주인 고아에는 포르투갈 세력이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다. 그 덕분에 지금도 고아 인구 네명중 한명은 천주교도이며 고아는 물론 카르나타카의 맹갈로르까지 넓게 퍼져있는 천주교도들은 페르난데즈, 호아킨, 알바, 미쉘, 핀토 등의 포르투갈 식 이름이나 성을 사용하고 있다. 한편, 인도의 독립 이후 고아를 인도로 돌려달라는 인도의 계속된 요구를 포르투갈은 무시하고 있었다. 1961년 12월 인도는 고아에 대한 침공작전(오퍼레이션 비제이)을 개시했고 단 이틀만에 고아 주재 포르투갈 군병력이 투항하면서 고아는 450년 만에 인도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인구 기준으로 인도의 1위 및 2위 종교가 힌두교 및 이슬람교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세 번째로 신도가 많은 종교가 기독교이고 전체 인구의 약 2.3%에 달하는 2,780만명(2011년 인도정부의 인구센서스 기준)에 달하는 주요 종교라는 점을 알고는 놀라게 된다. 특히나 19세기 이후 미국 출신 개신교 선교사들이 활발하게 활동한 북동부 8개주에서는 개신교 신도수가 상당히 많다. 2011년 인구센서스 기준으로 나갈랜드주는 88%, 미조람주는 경우 87%, 메갈리아주는 네명중 세명이, 마니푸르주는 10명중 4명이 기독교인들이고 이들 대부분은 개신교를 믿고 있다. 그리고, 이들보다 최소 300년 가까이 먼저 인도의 남서부에 해안지역에 발을 디딘 천주교 세력 또한 만만치 않은 세력을 형성했고, 고아와 케랄라 등 남부에서 꾸준히 신앙을 지켜왔다. 하지만, 점점 인도의 기독교도들 특히 힌두교가 우세한 인도 북서부에 사는 기독교도들의 신앙생활은 점점 기세를 더해가는 힌두교 근본주의 물결 앞에서 위협을 받고 있다. 


[# 5] 힌두교의 성지 바라나시


인도의 종교를 살펴보는 우리의 여행은 다섯 번째 도시이자 힌두교의 성지인 바라나시에 도착했다. 우타르 프라데시주에 속하는 이 도시는 인도라는 단어를 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널리 알려진 도시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인도에 대해 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환상과 편견이 모두 압축되어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힌두교에서 가장 성스럽게 여겨지는 갠지즈 강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생의 막바지에 다다른 힌두교도들 중에서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이곳에 자기발로 찾아오는 사람도 적지 않다.


바라나시 만큼 서양의 가치관과 인도의 가치관이 강하게 충돌하는 도시도 흔하지 않다. 대표적으로 장례 풍습을 살펴보자. 서구인들과 우리와 같은 동아시아인들에게는 입관도 하지 않은 시신을 사망한지 불과 하루만에 장작불에 올려놓고 노천에서 태우는 장례 문화가 이질적이다 못해 야만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화장터에는 여자들은 갈 수 없고 남자들만 갈 수 있다니 이 또한 명백한 남녀차별로 보인다. 망자를 올려놓은 장작더미에 불을 붙이기 직전에 망자의 입속에 넣어주는 다섯가지 성스러운 물건이라는 것이 소똥과 소오줌 등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웬만큼 문화적 다양성에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도 비위가 상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화장을 마친 두개골이 완전하게 타지 않고 온전하게 남아 있으면 상주는 두개골을 두드려서 깨뜨려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들으면 솔직히 오만정나미가 다 떨어지는 느낌이 들 것이다. 제 아무리 육신에 갇혀 있던 혼을 풀어주기 위한 행위라고 하지만 불과 어제까지 숨이 붙어있던 자기 아버지의 두개골을 이 세상 어떤 아들이 멀쩡한 정신으로 깰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힌두교도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라는 것은 고통으로 가득찬 윤회의 사슬을 끊고 영원한 자유를 얻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그렇기에 언뜻 보면 야만적이기만 한 그들의 장례의식은 수천년이 흐른 지금도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정말로 이들의 장례문화가, 이들의 종교 전통이, 그리고 이들의 사회 관습이 미개하고 전근대적인 것일까? 섣불리 답하기 어렵다. 오히려, 서구인들이나 우리와 같은 동아시아인들이 이들을 이해할 준비가 안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창조에서 시작하여 심판과 멸망으로 끝맺어지는 직선적인 종교관을 가진 서구인들과 사실상 종교라 부를 수 없는 유교라는 정치철학의 지배를 수백년 동안 받아온 동아시아인들에게는 몇 번을 들어도 헤깔리는 수많은 힌두교 신들의 이름과 윤회니 뭐니 하는 이상한 개념은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저들은 손을 들어 달을 가리키고 있지만 우리는 그 손 끝만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일과 일을 더해서 이가 되는 논리의 언어로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저들은 운과 율로 직조된 슬프지만 아름다운 시의 언어를 인생을 읊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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