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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비와 호지의 아빠 Oct 25. 2022

인도인과 영국인들에게 2022년은 어떻게 기억될까?

주인집 사랑방을 머슴집 아들이 차지하는 순간이 왔을 때...

[# 1] 사람과 국가의 미래를 바꾸는 사건들


우리는 가끔 인생의 어느 순간을 지나며 ‘지금 이 순간 이후로 나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지게 될 거야’라는 생각이 드는 경험을 한다. 원하는 회사에 합격한 행복한 순간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이별하는 슬픈 순간일 수도 있다. 때로는 그 순간이 자신의 인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을 곧바로 자각하는 순간도 있지만 때로는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아, 그 순간 내 인생이 바뀌었구나’라고 뒤늦게 자각하기도 한다.


사람뿐만 아니다. 한 나라의 역사에서도 이러한 순간은 무수히 존재한다. 1648년 현재의 독일 북서부에 있는 작은 도시인 뮌스터에 모여 앉은 130여 명의 귀족과 제후들은 30년간 유럽을 휩쓸었던 종교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한 지루한 협상을 마무리하는 문서에 서명을 마쳤다. 이들은 유럽의 이곳저곳에 흩어진 땅을 이 나라와 저 나라에 나눠주는 평범한 종전(終戰) 문서에 서명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서명한 문서는 종교와 왕조를 기반으로 하는 중세적인 국가 개념에 막을 내리고 영토와 주권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 국가를 여는 역사적인 문서였다. 이 조약으로부터 국제법과 국제조약이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이라고 불리게 되는 이 문서는 그저 단순히 30년 전쟁과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마무리한 문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1945년 2월 세계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던 시점에 크림반도의 휴양도시인 얄타에서 열린 회담에 참석한 미국, 영국 그리고 구 소련의 최고지도자들 역시 자신들의 합의가 얼마나 많은 국가들에게 영향을 미칠지, 그리고 그 이후의 세계사에 얼마나 오랫동안 그림자를 드리우게 될지 그 당시에는 가늠하지 못했을 것이다. 1944년 미국 뉴햄프셔의 소도시인 브레튼우즈에 모였던 금융전문가들과 정치가들 역시 자신들이 만들어내게 될 금융 체제가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강력하게 세계 금융질서를 지탱하게 될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바로 그 순간, 바로 그 역사적 합의, 바로 그 사건의 중요성이 올바르게 평가되는 사례들인 것이다.




[# 2] 거인은 세상을 떠나고 한 나라는 또 다른 나라를 따라잡고...


꼬박 70년을 재위하면서 영국을 포함하여 16 국가의 군주로 군림했던 엘리자베스 2 여왕이 세상을 떠난 것은 2022 9월이다. 그녀가 즉위한 것이 1952년이니,  이후에 태어난 수억 명에 달하는 영국  영연방 국가의 국민들에게는 오직 그녀만이 유일한 군주였다. 그녀는 인도가 영국으로 독립한 이후에 즉위했다. 1961, 1983 그리고 1997  3번에 걸쳐 인도를 국빈 방문하기도 했는데, ‘인도의 다양성과 풍요로움 찬사를 보낸 것으로 알려져 인도인들의 호감을 사기도 했다. 1983 그녀가 인도를 방문했을  당시의 인도 총리는 인디라 간디였는데,  세계 수억 명의 군주로서 우아하고 기품이 넘치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수억 명을 대표하는 강단 있고 카리스마 넘치는 여성 정치지도자의 만남은 인도 국내는 물론 해외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2세가 서거한 9월 초에 인도와 영국이 다시 한번 언론 기사에 올랐다. 세계 유수의 경제전문 매체인 블룸버그 통신이 기존의 통계자료 및 최근의 성장률을 기반으로 추산해본 결과 인도의 2022년 3월 말 기준 국내총생산이 8,547억 달러로서 영국의 8,160억 달러를 넘어섰다는 것이었다. 블룸버그 통신은 이어서 영국을 제치고 세계 5위의 위치에 올라선 인도 경제는 폭발적인 경제성장세를 이어가면서 영국과의 격차를 더욱더 벌리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비록 연말을 기준으로 집계되는 주요 경제기관의 공식 통계자료도 아니었지만 이렇게 기쁜(ㅎㅎ) 소식을 인도의 현지 뉴스매체가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많은 언론사들이 인도의 경제성장률, 인구 성장률, 빈곤 감축 성과 등등을 곁들인 자세한 분석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물론 두 나라의 1인당 GDP가 20배가량 차이가 난다거나, 기대수명이 12살이나 차이가 난다거나, 언론 자유 지수는 100등 넘게 차이 난다는 등의 이야기는 인도 뉴스매체에서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경제와 국가의 위상을 이야기할 때면 언제나 그렇듯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국내총생산과 같은 수치만을 발표하는 인도의 언론 습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보도행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간 자신을 식민 지배했던 주인 국가 영국을 머슴 국가인 인도가 따라잡은 것만은 기억할만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 3] 주인집 사랑채에 머슴집 아들내미가 자리 잡게 되면...


총리에 취임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사임하면서 후임 총리가 누가 될지에 세계적인 관심이 모이고 있다. 마가렛 대처 총리를 롤 모델로 삼아 획기적인 감세정책과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으로 영국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겠다고 트러스 총리는 호언장담했었다. 하지만, 엄청난 감세로 인해 발생할 재정적자를 메꿀 구체적 대안이 없다는 비판과 부자들에게만 유리한 조세정책에 대한 엄청난 여론 역풍은 출항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트러스호를 침몰시키고야 말았다.


애초에 이런 정치 혼란을 자초한 보리스 존슨 전 총리마저 출마 포기를 선언하고 유력한 경쟁자로 손꼽히던 사람들마저 후보 출마에 필요한 최소한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하면서 보리스 존슨 내각에서 재무부 장관을 지냈던 리시 수낙 의원이 차기 영국 총리로 선출되는 모양새이다. 1980년에 태어난 그가 유럽의 3대 경제대국 중 하나인 영국의 총리에 오르게 되면 영국 역사상 최초의 유색인종 총리이면서 1812년 이후 가장 젊은 총리로 기록될 것이다. 영국에 사는 약 140만 명에 달하는 인도계 시민들과는 다르게 그는 의사인 부친과 약사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나 영국 최고의 명문 사립고교인 윈체스터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을 거쳐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MBA)를 받았고 이후 세계 최고의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에서 근무했다. 게다가 인도 최고의 정보 서비스 회사인 인포시스의 창업자(나라야나 무르띠)의 딸과 결혼한 덕분에 이 부부가 보유한 재산 규모는 우리나라 돈으로 1조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쯤 되면 금수저가 아니라 다이아몬드 수저쯤 된다.


보리스 존슨의 충직한 동료였던 어느 어느 의원이 리시 수낙 지지선언을 했다는 둥, 경쟁자인 누구누구는 출마에 필요한 충분한 지지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둥... 인도의 몇몇 뉴스매체들은 영국 총리 선출 관련 소소한 기사들이 나올 때마다 이를 경쟁적으로 보도하는 등 거의 실시간 보도를 이어갔다. 뉴스의 종류에 상관없이 항상 선정적이고 소란스러운 인도 언론의 보도 행태를 생각하면 이 정도의 보도는 호들갑이라고 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수백 년간 자신들을 식민 지배했던 나라의 최고 지도자 자리에 인도계 이민자의 이름이 오르내린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그 자리에 무혈입성하게 되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인도인들에게 한 두 개의 문장으로 형용하기 어려운 묘한 쾌감을 주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불과 수백 년 전만 하더라도 세계를 양분하여 다스리던 무굴제국과 대영제국의 후예들은 그 이후 식민지배자와 피지배자로 운명이 갈라지면서 상반된 역사의 길을 걸었다. 어느 나라는 산업혁명을 이끌며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선 후 두 번에 걸친 세계 대전에서 승전국의 지위를 누렸지만, 어느 나라는 비참한 식민지의 질곡에 빠져 수백만 명이 굶어 죽는 끔찍한 기아사태를 겪었고, 독립 이후에도 지지부진한 경제성장을 30년 가까이 이어오다가 1990년대나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세계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이 두나라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그리고 수십 년 후에 역사를 되돌아볼 때 2022년이라는 시기는 영국과 인도의 시민들에게 어떻게 기억될까?


어느 나라는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했던 군주가 서거한 슬픈 한 해이자 자신의 식민지였던 인도에게 추월당한 우울한 한 해로 기억하지는 않을까? 그리고 또 다른 나라는 끔찍한 코로나 사태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경제가 성장하면서 자신들의 식민지배국가였던 영국을 비로소 추월한 역사적인 한 해라고 기억할까? 인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사실상 영국 내 최상위 계층으로서의 삶을 누려온 젊은 정치인은 과연 영국을 지금의 위기에서 구해낼 것인가? 여러모로 2022년은 영국, 인도 그리고 세계인들에게 흥미로운 한 해로 기억될 수밖에 없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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