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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비와 호지의 아빠 Nov 12. 2022

서울중앙지검에서 내 인생 최초의 검찰조사를...(2)

의협심과 정의감도 때로는 이기적이 될 수도 있다는...

https://brunch.co.kr/@hobiehojiedaddy/131에서 이어집니다.



“잠깐만 쉬었다 하죠”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젊은 검사가 말했다. 조사실의 시계를 올려다보니 8: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고등학교 수업과 비슷하게 검찰 조사에 있어서도 50분 조사하고 10분 쉬는 나름의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것도 그날 처음 알게 되었다. 석고상처럼 꼼짝 안 하고 앉아 있던 검찰 조사관 한 명이 우리 일행에게 다가오더니 갑갑하면 잠시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담배나 피고 오자며 제안했다. 우리 일행 4명 중 흡연자는 단 한 명에 불과했지만 답답한 조사실을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네 명 모두 흔쾌히 따라나섰다.


"검사님. 참고인들이 잠시 흡연하고 싶다는데요."


중앙지검 옥상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담배에 불을 붙인 것은 검찰 조사관이었다. 실상은 본인이 꽤나 담배가 고팠던 것이다. 초가을을 지난 서늘한 바람이 뺨을 스쳐 지나갔다. 늦게 도착해서 여태까지 무슨 조사가 진행되었는지 알 수 없었던 내가 먼저 입을 떼었다.

“김 차장님. 지금까지 무슨 이야기 나눴어요? 주로 무슨 내용 조사했어요?”

“신용평가시스템에서 어떻게 OOO사 신용등급과 대출한도가 결정되었는지를 집중적으로 질문하더라고요.”

“아니.. 나참.. 재무정보는 시스템에서 알아서 땡겨와서 자동적으로 입력되고 그거에 따라서 등급이랑 한도는 그냥 산출되는 건데... 그걸 확인하려고 굳이 우리를 여기에 부른 셈이네요.”

“그런 거 같습니다.”

볼이 푹 패일 정도로 담배를 즐기고 있던 조사관도 굳이 우리들 근처에 머물지 않고 옥상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맨손체조를 하고 있었다. 지루하고 답답한 야근 중에 유일하게 주어지는 자유시간임에 틀림없었다.




비행기를 타고 다니다 보면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잠깐 동안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컴퓨터가 비행기를 조종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은행의 대출업무도 비슷하다. 기업의 재무상황에 갑작스럽게 빨간불이 켜지지 않는 한, 이미 공개된 재무지표가 자동적으로 평가시스템에 입력되고 이에 따라 신용등급과 대출한도가 결정된다. 이 등급과 한도를 수동으로 조정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하다. 하지만, 누가 언제 무슨 사유로 등급과 한도를 조정했는지 기록에 남기고 상급자의 결재를 받아야만 한다. 한마디로 등급과 한도를 바꿨다가 나중에 생기는 불상사를 책임지겠다는 비상한 각오를 공개적으로 은행 시스템에 남기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수의 일반 시민들은 신용등급과 한도를 은행원 개인이 또는 두어 명이 작당해서 쓱싹쓱싹 고칠 수 있다고 지레짐작한다. IMF 사태가 터지기 전인 30년이었다면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21세기에는 일어나기 어렵다.


다시 조사는 시작되었고 자정 가까이 계속된 조사는 김 차장이 얘기한 대로 신용등급 결정 절차와 대출한도 설정을 둘러싼 질문이 반복되었다. OOO사에 (대출한도는 부여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대출잔액이 하나도 없는 우리를 불러다가 이렇게까지 지루하게 묻고 받아 적고를 반복하는 이유가 뭔지를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미루어 짐작하건대 ‘OOO사가 거래하는 은행의 실무 담당자들 전체를 이런 식으로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하여 조사하고 있는 것 아닐까’라는 추측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검사가 물었다.

“거의 다 끝나갑니다. 한 시간 정도면 끝날 거 같은데 심야 조사에 동의하신다는 동의서 쓰시면 오늘 끝내구요, 그거 싫으시면 나중에 한번 더 나오셔야 해요. 어떻게 하실래요?”

1초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숨 막히는 곳에 다시 오고 싶은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약속이나 한 듯이 우리 일행은 오늘 마무리하자고 답했다.




진술서를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시간도 주어졌다. 모 정치인은 질문에 답한 시간보다 진술서를 확인한 시간이 더 오래 걸려다던데, 우리는 몇 페이지 되지 않는 진술서를 그렇게 오래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은행 내 업무처리 절차를 줄줄 불러주었고, 그걸 받아 적은 검사의 진술서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그냥  업무처리 매뉴얼을 읽기 쉽게 옮겨 적은 수준의 글이었다. 진술서를 읽어 내려가다가 맨 마지막 부분에 내 눈이 멈췄다. 진술인의 이름에 김 차장의 이름이 적혀있는 것이었다. 내가 시험을 보느라 늦게 검찰청에 도착하는 바람에, 먼저 도착해서 조사를 받기 시작한 김 차장이 답변을 시작하면서 그의 이름이 적혀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참고인 진술서라고는 하지만 검찰에서 작성된 문서에 자신의 이름이 남는다는데 유쾌할 사람은 없다. 어쩐지 몇 시간 전부터 김 차장의 얼굴 표정이 썩 유쾌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그 순간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대로 모른 척한다면 참고인 진술서에 내 이름이 남지 않을 테고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검찰청을 빠져나가면 끝이라는 안도감이 가장 먼저 찾아왔다. 하지만, 당장 내일부터 사무실에서 김 차장을 마주치게 될 텐데, 부하직원한테 진술서 서명하게 만들고 자신은 얌체처럼 빠져나간 상사가 된다면 김 차장을 포함해서 내 팀의 부하직원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걱정되기도 했다. 잠시 후, 우리가 여기에 피의자 신분으로 온 것도 아니고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서류가 피의자 조서도 아니며 내용 또한 크게 부담스럽게나 문제가 될만한 내용도 아니라는데에 내 생각이 도달했다. 그렇지 않아도 착하고 소심한 김 차장이 저렇게 울상이 되어 있는데... 이럴 때 멋진 상사인 척 ‘제가 김 차장 대신에 서명하겠습니다’라고 나서는게 여러모로 이득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이기심 회로'가 빠르게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검사님. 이 진술서에는 제가 대신 서명하겠습니다. 전체적으로 다 읽어봤는데 사실관계에도 어긋난 게 없고, 게다가 제가 제 부하에게 서명하라고 시켜놓고 저만 빠져나가면 당장 내일부터 제가 무슨 낯짝을 들고 제 팀원들에게 업무지시를 하겠습니까?”

나하고 제대로 눈도 안 마주치고 컴퓨터 모니터만 들여다보던 검사가 그날 밤 처음으로 고개를 들고는 나를 응시했다.

“뭐, 그러세요.”

잠시 후 검사는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고 조사관에게 진술서를 건넸다. 조사관은 서류 맨 끝에 적혀있던 김 차장의 이름을 붉은색 두줄을 그어 삭제하더니 나에게 건넸다. 내 손으로 직접 내 이름을 적고 지장을 찍으라는 거였다.

이름을 적고 지장을 찍고 나니 이제는 집에 돌아갈 일만 남았다. 조사관들의 안내를 받아 건물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니 어느새 시간은 새벽 1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갑자기 내 뒤에서 나를 따라오던 김 차장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팀장님. 감사합니다.”

“징그러. 저리 가. 나 남자 안 좋아해. 여자 좋아해.”




내가 뭐 엄청난 정의감과 의협심에 불타서 부하직원을 감쌀 생각에 진술서에 대신 서명하겠다고 나선 것이 아니다. 나 역시 진술서 서명 안 했다가 자칫 회사 내에서 ’‘부하직원을 벼랑 끝으로 밀어버린 못된 상사’라고 낙인이 찍힐까 두려웠던 거다. 그렇게 되면 내 회사 생활이 피곤해질 거 같아서, 그래서 서명하겠다고 나선 거였다. 만약 이게 참고인 진술서가 아니고 피의자 조서였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거다. 나 서명 못한다, 네가 해라. 팀장님 이걸 왜 제가 서명합니까? 그냥 네가 서명해... 아니.. 당신이 그러고도 상사야? 뭐야? 이 자식이 직장 선배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뭐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독이 든 잔을 미루는 꼴 보기 싫은 장면이 펼쳐졌을 거다.


나에게 고맙다며 인사하는 김 차장을 보면서 ‘내가 서명하길 잘했구나’라는 생각까지 하고 나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 모든 행동이 멋진 상사가 부하직원을 감싸는 모습으로 보이겠지만 실상 내가 이렇게 행동하겠다고 나선 이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독하게도 이기적인 이유였던 것이다. 그리 대수롭지 않은 문서에 서명하기를 꺼리는 부하직원을 멋지게 감싸면서 결론적으로는 앞으로 내 팀에 있는 팀원들에게 충성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한 것이었다.




“호호 아빠의 직업이 검찰까지 불려 다닐 정도로 위험한 직업이었어?”

집으로 돌아오니 나를 기다리다 지쳐서 설핏 잠들었던 아내가 깨어 나에게 실없는 말을 던졌다.

“그러게 말이야... 나도 내 직업이 이렇게 위험한 직업인 줄은 몰랐네.”


그날 밤 한참 동안 잠이 오지 않았다. 나의 행동을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저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뿐이었다. 그날 나는 그리 멋진 상사도 아니었고 존경받을만한 선배도 아니었다. 그저 이기적인 의협심을 촌스럽게 발휘한 비겁한 소시민이었다. 그래 놓고는 잠시나마 '나는 멋진 상사야'라는 자뻑에 취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속 가장 밑바닥에 있었던 것은 이기심이었다. 여기서 멋진 척하면 나중에 부하직원들 부리는데 도움이 될 거라는 지독한 이기심 말이다. 의협심도 이기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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