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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비와 호지의 아빠 Jan 06. 2023

두 개의 핵보유국이 죽기 살기로 주먹다짐하는 이유

왜 중국과 인도는 21세기 한복판에서 중세시대처럼 싸우고 있나?

2022년 12월 9일, 인도 군대와 중국 군대가 또다시 맨주먹으로 한바탕 난투극을 벌였다는 뉴스가 외신을 장식했다. 21세기 한복판에 수십 발의 핵무기를 보유한 2개의 핵무장 국가가 중세 시대 마냥 주먹다짐과 발길질을 했다는 이야기다. 외신을 종합해보면 이번 충돌에서는 최소한 사망자는 없는 거 같다. 그런데, 이런 난투극이 처음도 아니다 2020년 6월에도 이미 두 나라는 수백 명이 달려들어 그야말로 개싸움을 벌였고 그때에는 인도 군인이 최소한 20명이나 사망하는 끔찍한 결과를 낳기도 했다.


도대체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는 걸까? 70년이 넘는 국경분쟁과 이를 둘러싼 복잡한 국제정치 동향을 몇 페이지에 담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맥락을 한번 짚어보면 도대체 왜 이렇게 두 나라가 치고받고 싸우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 핵심적인 맥을 한번 짚어보자.


[# 1] 중국-인도 국경분쟁의 큰 줄거리를 한번 파악해 보자...


일단, 인도와 중국과의 국경분쟁을 이해하는데 가장 첫 번째 기억해야 할 기본 지식은 핵무기로 무장한 두 개의 군사대국을 나누는 약 3,000km 국경선의 대부분은 현재까지도 양국 간 합의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두 번째로 인도와 중국이 맞닿아 있는 국경선은 크게 3개의 부분으로 나뉜다는 기본 지식도 기억하고 있으면 좋다. 아래의 지도에서 보듯이 인도 북서부의 카슈미르 지역에서 네팔에 이르는 지역은 인도와 중국이 직접 접경하고 있고, 이후 네팔과 부탄이 중간에서 완충지대 역할을 하는 지역, 세 번째로 또다시 양국이 직접 접경하는 아루나찰 프라데시 지역이다.

중국과 인도의 국경은 크게 3개의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자, 이제 1947년 인도의 독립 당시로 잠시 돌아가 보자.


영국은 1947년까지 서쪽으로는 현재의 파키스탄, 동쪽으로는 현재의 방글라데시와 미얀마 북서부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식민지배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1947년 인도가 파키스탄과 분리독립하면서 국경문제가 꼬이기 시작한다. 제대로 획정되고 국제적으로 합의된 국경선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49년 10월, 중국 본토에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게 되자 이제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큰 공산주의 국가와 획정되지 않은 국경선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1950년 중국과 인도와의 국경분쟁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중국의 티베트 침공 및 강제합병이다.




[# 2] 중국-인도 국경분쟁을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 : 중국의 티베트 합병...


UN이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에 한창 정신이 팔려있을 1950년 10월 초... 우리나라에서는 3개월 만에 서울을 수복한 국군과 유엔군이 한창 기세를 올리며 북진하고 있었지만 티베트는 중국 인민해방군의 압도적인 병력에 밀려 바람 앞의 촛불처럼 스러져버리고 말았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에 정신이 팔린 국제사회가 중국의 티베트 침략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었고, 그의 판단은 옳았다.


운남성 및 사천성과 접경하고 있는 티베트 지역이 친인도 성향을 보이기라도 한다면 중국 북서부의 신장위구르 자치구는 물론이고 그 서쪽으로 뻗어나가는 중국의 세력이 꼼짝없이 막히게 될 테니 중국입장에서 티베트는 지정학적으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여기에 티베트는 청나라에게 조공을 바치던 ‘신하의 나라’였다는 제국주의적 논리도 힘을 보탰다. 그 때문에 중국 건국 1년 만에 마오쩌둥은 서둘러 티베트를 침공한 것이고 그의 전광석화 같은 행동은 결국 성공했다. 이렇게 티베트와 우리나라의 운명은 잔인하게 갈라졌다.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하면서 인도는 매우 껄끄러운 상황에 직면한다. 우선 티베트는 서쪽부터 파키스탄, 인도, 네팔, 부탄, 방글라데시, 미얀마와 직접 접경하거나 최소한 근접해 있는 기다란 국경선을 형성한다. 게다가 중국 전체 면적의 1/8이나 되는 광활한 땅이다. 서남아에서의 지역패권국 행세를 해왔고 앞으로도 그 세력을 떨치고 싶어 하는 인도의 뒷덜미에 떠억하니 중국의 칼날이 들어온 셈이다. 그러는 와중에 중국-인도 국경분쟁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바로 두 번째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그것은 바로 1962년 중국-인도 국경전쟁이다.


티베트는 코딱지만한 시골동네가 아니다. 중국 전체 면적의 무려 1/8를 차지하는 거대한 지역이다.



[# 3] 중국-인도 국경분쟁을 이해하는 두 번째 열쇠 : 1962년의 중인전쟁


1962년에 일어난 전쟁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잠시 시계를 3년 정도 되돌려서 1959년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한다. 티베트 침공 직후 중국이 티베트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압박을 높여가자 결국 티베트 불교의 수장인 제14대 달라이 라마와 그의 추종자들이 1959년 티베트를 떠나 인도로 정치적 망명을 감행하게 된다. 인도는 1906년 대지진 이후 폐허가 되어서 방치되어 있던 옛 영국인들의 휴양지인 다람살라에 이들을 정착시켰다.


티베트 불교는 물론 티베트 국민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인도에 망명정부를 세우는 모양새를 보고 중국 정부가 인도를 얼마나 불쾌하게 생각했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게다가, 중국 정부는 인도, 미국, 영국 등의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서로 쿵짝이 맞아서 중국을 압박하기 위해 티베트 망명정부의 수립에 협력했다는 의심을 품기에 이른다. 1949년 중국이 건국되자마자 서구 선진국보다도 훨씬 앞서서 중국을 국가로 인정해줄 정도로 사이가 좋았던 중국과 인도의 관계는 급격하게 냉각되게 된다. 결국 1959년 이후 양국 간 산발적으로 발생하던 국경분쟁은 1962년 인도 북서부 라닥 지역과 북동부 아루나찰 프라데시 지역에서 대규모 무력 충돌로 비화되었다.


인도인들에게 인도 현대사에서 가장 부끄러운 사건을 꼽으라면 대부분의 인도인들은 1962년 중국-인도 국경 충돌을 꼽는다. 인도 북서부의 라닥 지역과 인도 북동부의 아루나찰 프라데시 지역에서 동시에 벌어진 이 전쟁에서 인도는 무기력하고 무능력했다. 우선 1962년 10월 본격적인 중국의 침공이 시작되기 거의 수개월 전부터 중국 병력들이 산악지역 적응 훈련을 하는 등 군사작전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인도 정보 당국은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뉴델리에 편안하게 자리 잡고 있던 인도의 정치인들 역시 중국이 인도를 침략할 것이라는 생각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도는 정보전에서 완벽하게 무방비상태였다.


이렇다 보니 실제 전투에서 참담한 패배가 이어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8만 명으로 구성된 인민해방군 정예병력 앞에서 1만 명에 불과한 인도군은 추풍낙엽처럼 패배를 이어갔다. 제대로 된 전투는 약 4주간 지속되었는데, 중국군은 약 700여 명이 사망한 반면 인도군은 사망자 및 실종자를 합쳐 약 3,000명을 기록했다. 산악 지역에 적응도 안 된 상태에서 2차 대전 때나 쓰던 낡은 리-엔필드(Lee-Enfield) 소총을 들고 전장에 투입한 인도군들은 제대로 된 저항도 펼치지 않고 도망가기 바빴다. 오합지졸이 따로 없었다.


전투에서 연전연패한 것도 쪽팔린데 더욱더 쪽팔린 일은 그 이후에 일어났다. 제3차 세계대전 발발 우려가 높아지면서 국제사회는 중국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미국도 인도양에 항공모함을 파견하는 등 분쟁의 양상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중국은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언했다. 그리고는 인도 북동부 지역 아루나찰 프라데시에서 자신들이 점령했던 영토 일체와 약 4,000여 명의 인도군 포로, 심지어 인도군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까지 대부분 조건 없이 돌려주고 자신들의 영토로 후퇴해 버렸다.


제대로 된 저항도 못 해보고 죽도록 얻어터지던 인도가 정신을 차려보니 중국이 ‘이제 그만 싸우자. 나 갈게. 잘 있어. 안녕..’하고 자기 집 대문을 닫고 들어가 버린 모양새였다. 한 마디로 인도는 열중쉬어 자세로 ‘명존쎄’를 당한 것이다. 게다가 중국에게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인도 북서부의 악사이친(Aksai Chin) 지역을 점령한 중국 인민해방군은 그 지역에 아예 눌러앉아 버렸다. 인도 입장에서는 버젓이 자신들의 영토를 빼앗겼는데, 정작 복수를 해야 할 중국은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언하고 무기를 내려놓았다. 수모도 이런 수모가 없었다.


1962년 전쟁 이후로도 크고 작은 중국-인도 간 국경분쟁은 있었다. 하지만, 큰 줄거리로 따졌을 때 인도의 북동부에서는 중국이 ‘내 땅이요’라고 주장하는 지역(중국은 이 지역을 ‘남 티베트’이라고 부름)을 인도가 점령(인도 행정구역으로는 아루나찰 프라데시州)하고 있고, 인도의 북서부에서는 인도가 ‘내 땅이요’라고 주장하는 지역(라닥 지역)을 중국이 점령(악사이친)하고 있는 상황은 이렇게 탄생하였고,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 4] 중국-인도 국경분쟁을 이해하는 세 번째 열쇠 : 일대일로와 잠무-카슈미르 문제


수십 년간 중국과 인도가 국경에서는 으르렁거리고 있었지만, 양국 간 경제적인 교류협력은 눈부신 속도로 증가했다. 교역규모(수출+수입)는 2000년에 약 30억 달러 수준이었지만 2021년에는 무려 1,250억 달러 수준으로 커졌다. 물론 인도는 밀려들어오는 값싼 중국제 수출품 때문에 엄청난 규모의 대중국 무역적자를 계속 겪고 있지만 말이다. 1992년 이후 20년간 국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약 20여 차례 고위급 협상이 있었으나 큰 진전은 없었다.


이런 교착 상태 중에서 국경문제라는 연못에 중국이 커다란 돌멩이 하나를 집어던졌다. 바로 ‘일대일로’ 계획이었다. 2013년을 전후하여 중국 지도부가 공개한 ‘일대일로(발표 당시에는 One Belt One Road라고 불렸으나 이후 Belt and Road Initiative로 개칭)’ 계획을 인도 입장에서 해석하자면 ‘테러질이나 일삼는 파키스탄과 중국이 경제적으로 밀착하겠다는 선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일대일로 계획의 일환으로 2015년에 발표된 '중국-파키스탄 경제 회랑(China-Pakistan Economic Corridor : CPEC)'에 포함된 중국의 최종 목표를 한마디로 줄이면, 현재 남중국해를 통과해 수 주에 걸쳐 이동하는 물류 움직임을 중국의 신장위구르와 파키스탄의 과다르(Gwadar) 항구를 연결하는 육로로 전환시킴으로써 중동으로부터의 에너지 수입 통로와 중동 및 유럽으로의 수출 통로를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CPEC 발표 후 중국이 파키스탄에 투자한 금액은 어림잡아 270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키스탄을 ‘싼 값에 인도를 억제할 수 있는 애완견’으로 여기는 중국의 남아시아 정책으로 인해 인도는 중동으로 나아갈 길이 싹둑 잘리게 되었다. 중국이 ‘일대일로’ 정책으로 장군을 불렀으니 인도가 멍군을 부를 차례가 되었다.


나렌드라 모디 정부는 2019년 10월, 잠무-카슈미르 자치령의 헌법상 지위를 연방 직할지(Union Territory)로 변경하는 개헌안을 마침내 통과시켰다. 한마디로 주민 자치권을 빼앗은 것이다. 그리고 이전까지는 카슈미르 지역의 종교적, 사회적 특수성을 인정하여 타지 사람의 카슈미르 이주도 제한하고 타지인이 집이나 땅을 사는 권한도 제한해 왔는데 이제 그런 제한 없이 자유롭게 이주와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중국이 신장위구르 지역에서 펼치는 ‘한족(漢族)을 이사시켜서 현지 주민 힘 빼기’ 전략을 인도가 따라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표면상으로는 그저 카슈미르 지역의 헌법상 지위만 조금 바뀐 거 같은 대수롭지 않은 조치이지만 속을 뜯어보면 그 내용이 상당히 정치/경제적인 특징이 있다. 일단, 주민 자치령이 뉴델리의 직접 지배를 받는 연방 직할지로 바뀌었다. 회교도와 불교도가 주를 이루는 이 지역에 힌두교도들이 자유롭게 이주하여 경제와 정치를 장악할 길도 완벽하게 보장되었다. 게다가 이 지역에서 반발 시위가 일어나자 나렌드라 모디 정부는 인터넷은 물론 통신까지 차단하고 쥐 잡듯이 강경진압에 나섰다. 힌두근본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힌두스탄(힌두인들의 나라)’의 이익에 반한다면 언제든지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인접한 중국에 보내는 무언의 경고였다.


2020년 양국간 무력충돌이 일어났던 3곳이 붉은 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 5] 두 거인이 충돌할 때 (When two titans clash)...


멀리는 영국의 식민지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런 ‘장군멍군’의 상황 속에서 2020년 6월 중국은 라다크 지역에서 다시 한번 ‘장군’을 외쳤고 양국 간 물리적 충돌이 발생한 것이다. 인도군 20명이 사망한 이 충돌이 있기 약 5주 전에 소규모 대치 상태가 있었다는 사실은 나중에서야 밝혀졌다. 2022년 12월의 대치 상태가 사망자 없이 종료되었지만 인도 언론들은 ‘2020년 6월처럼 몇 주후에 더 큰 물리적 충돌이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추측하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렇다면 양국의 국경분쟁은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


대부분의 국제정치학자나 군사전문가들은 뾰족한 해결방법이 없다는 데에 동의한다. 일단, 분쟁지역이 3,000km나 될 정도로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에 국경 분쟁을 한꺼번에 해결할 이른바 ‘패키지 딜’이 나올 가능성이 매우 낮다. 그렇다고 북서부 지역과 북동부 지역을 나눠서 국경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오래 걸린다.


둘째로, 중국이 너무 커졌고 또한 너무 느긋하다. 인도의 다섯 배에 달하는 거대한 경제력과 약 세배에 달하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국경 분쟁에서 인도를 압도하고 있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인도인들의 생각대로 중국은 악사이친 지역에 목매달고 있었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자신들의 땅인 신장위구르 지역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면서 이제는 신장위구르 지역을 ‘악사이친 대체재’로 확실히 변모시켜 놓았다. 자신들의 경제는 더 발전할 테고 신장위구르 지역을 계속 활용하여 파키스탄 및 중동과 계속 교류를 하면 될 테니 중국은 느긋하다. 악사이친이 예전만큼 긴요한 곳이 아니라는 거다. 더 시간이 지나면 지금 남중국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이 사용하는 방식 즉, 압도적인 군사적 경제적 차이를 바탕으로 인접국을 천천히 굴복시키는 전략이 인도를 상대로도 통할 것이라는 중장기적인 전략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인도는 이 상황에서 조급해하고 있나?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내심 국경분쟁이 싫지 않은 분위기이다. 약 1년 반 앞으로 다가온 총선에서 현 나렌드라 모디 총리의 3연임을 목표로 하고 있는 집권 인도인민당(BJP)의 입장에서는 그리 나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파키스탄이든 중국이든 외부의 적이 뚜렷이 드러날 경우 ‘인도판 북풍’은 선거에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자기네들 내부 정치에서 국경 분쟁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코로나 사태 등으로 인한 실정을 만회하는데 국경분쟁만큼 좋은 소재는 없다. 분쟁의 평화적 해결은 필연적으로 상당한 수준의 양보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표를 얻는 데 도움이 안 된다. 결국 이래저래 양국 정부가 국경분쟁이라는 먹잇감을 놓고 적대적으로 공생하는 관계는 쉽사리 끝나기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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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부 편집을 거쳐 딴지일보에도 게재되었습니다.

https://www.ddanzi.com/ddanziNews/760749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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