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본인의 예언이 과연 실현될 것인가? 아니면...
[2016년 12월 : 파리지사 근무를 마치는 송별회 자리...]
2014년부터 2016년까지 3년간 파리지사에 근무하면서 같은 업계에 있는 일본 회사 직원들과 가끔 술자리를 하곤 했다. 술 한두 잔을 들이켜고 나면 그 일본 회사의 파리지사장은 '일본의 젊은이들이 점점 더 해외 근무를 꺼려한다. 외국어도 배우기 싫어한다. 이런 현상이 일본의 경기 침체 시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나는 일본의 미래가 매우 걱정된다.'라는 이야기를 입버릇처럼 했었다.
실제로, 그 회사의 파리지사에는 30대 중반의 직원이 근무 중이었는데, 그 젊은 나이에 파리지사가 벌써 3번째 해외근무라는 것이었다. 파리처럼 근무환경이 좋은 나라도 모두들 오기 싫어해서 해외 근무 의향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만 사람을 뽑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3년간 자주 만나다 보니 그 일본 회사 사람들과 제법 친해졌다. 내가 파리를 떠나기 직전 송별회 자리에서 그는 꽤 취기가 오른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머지않아 한국 젊은이들도 일본 젊은이들처럼 해외근무를 기피하게 될 것이다. 너희 한국도 조만간 일본처럼 될 것이다.‘ 자기의 속마음을 잘 이야기하지 않기로 유명한 일본인의 입에서 나온 말 치고는 상당히 직설적인 말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고개를 저었다.
[2021년 5월 : 서울 그리고 뉴델리...]
오늘 본사와 연락을 나누다가 이번 7월 정기 인사발령 이야기가 나왔다. 해외로 근무하러 나갈 의향이 있는 직원이 거의 없는 눈치다. 아프리카는 물론 중남미, 러시아, 심지어 중국 지사에도 지원자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활환경만 따진다면 중국이나 러시아도 그리 불편하지는 않을 텐데, 그런 나라마저 가기 싫다는 것은 '이런 코로나 시국에 해외에서 살기는 싫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점점 해외 근무를 희망하는 직원수가 줄어들고 있었는데, 이번 코로나 사태가 아예 낙타의 등을 꺾는 마지막 지푸라기가 되었다.
내가 회사에 처음 입사했을 20여 년 전만 해도 해외 근무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해외 지사의 수도 많지 않았고, 대부분 우리나라보다 잘 살거나 '조금 못 사는' 나라에 지사가 많다 보니 해외에 나가겠다는 사람들이 그야말로 인사팀 문 앞에서 회사 주차장까지 줄 서 있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였다.
해외 근무의 혜택은 많았다. 좋은 생활환경, 본사보다 여유로운 업무량, 자녀의 특례입학 기회, 운이 좋으면 힘 있는 정부부처 공무원이나 언론인들과 인맥을 쌓을 수 있는 기회까지... 그 당시에는 해외근무수당도 적지 않아서 해외근무 한번 할 때마다 아파트 평수가 늘어난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았다. 그 코스에 성공적으로 올라탄 사람은 암묵적으로 회사 임원 후보군으로 편입될 정도였다.
20여 년 사이에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일단, 우리나라의 생활환경이 비약적으로 좋아졌다. 세계 최고 수준의 IT 인프라, 놀랄만한 수준의 의료 서비스(해외에 살면서 병원 한번 경험해보신 분들은 격하게 동의하실 거다), 안락한 아파트 생활 등등... 그리고, 모국어를 쓰며 내 입에 익숙한 음식을 먹으며, 내 친구, 가족, 친지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산다는 것이 주는 편안함은 두말해서 무엇하리.
반면, 대부분의 한국 회사들의 영업망이 점점 더 넓어지면서 아프리카와 중남미까지 해외지사가 만들어졌고, 이제 해외영업 직군들이 근무해야 할 '못 사는' 나라들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그렇다고 선진국 근무가 특별히 인기 있는 것도 아니다. 젊은 직원들일 수록 이미 여러 선진국을 여행하거나 생활해본 경험도 많아서, 기성세대와는 달리 '선진국'에 대한 환상도 크지 않다. 그들에게 해외는 그저 '말이 잘 안 통하는 살기 불편한 또 다른 생활의 현장'일 뿐이다.
'선진국이라고 별거 없어요. 오히려 더 느리고 불편하고,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도 많고요. 우리나라가 훨씬 나아요.'
젊은 세대에게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둥, '노오오오력'이 부족하다는 둥, 진취적이지 못하다는 둥, 이런 꼰대 같은 설교 늘어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기성세대들이 겪었던 끔찍했던 노동력 착취, 감정 노동, 빈번한 사생활 침해를 '근면과 성실'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할 생각도 전혀 없다. 나는 단지, 이제 우리 사회도 '열심히(!!!)' 사는 사회에서 '행복하게(~~~)' 사는 사회로 바뀌었다는 거 인정하고, 이러한 변화에 걸맞게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은 거다.
생활환경이 열악한 나라에 가기 싫다는 젊은 세대의 등을 억지로 떠밀지 말고, 힘든 지역에서 안전하게 일할 수 있도록 회사가 돈 좀 들여서 확실하게 안전조치도 강구하고 경제적으로도 더 많은 인센티브를 부여하자는 거다. 정치상황이 조금 불안한 곳이라면 방탄차량을 구입해주고 의료시설이 미비한 곳이라면 돈 아끼지 말고 ‘에어 앰뷸런스’ 서비스에 가입하면 된다.
어차피 내수 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든 대외의존적 경제를 가진 우리나라에서, 누군가는 환경이 어려운 나라에 나가서 계속 근무해야 한다. 해외 나가기 꺼려하는 젊은 직원들에게 '패기와 근성', '노오오오력' 타령하며 억지로 채찍질하지 말고, 보람을 느끼며,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으며, 행!복!하!게! 일할 수 있도록 사회 전체적으로든 아니면 개별 회사의 입장에서든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짜 보자는 이야기이다.
그리하여, 최소한 ‘우리는 일본처럼 되지는 않았다'는 말을 후배 세대들에게 자랑스럽게 해 줄 수 있는 그런 사회를 만들자는 거다. 한국에서 일하건 해외에서 일하건 우리의 젊은 세대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보람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사회와 회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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