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전, 소위 '대관업무'라는 걸 잠시 한 적이 있다. 우리 회사와 관련된 규제를 담당하는 다양한 정부 부처(행정부 및 입법부) 담당자들이 우리 회사와 연락할 필요가 있을 경우 '대관업무'를 담당하는 우리 팀이 연락을 받아 회사 내에서 자료를 취합하거나 요청받은 업무를 처리한 후, 관련 정부 부처로 통보하는 일종의 '연락창구' 역할을 한 셈이다.
말이 좋아 '연락창구'였지 정확히 말하면 양쪽에서 얻어터지는 샌드백 신세였다. 지금이야 많이 달라졌겠지만 그때만 해도 공무원들이 고압적이고 때로는 비인격적인 언사를 써가면서 온갖 비상식적인 요구를 하는 일이 꽤 있었다. '안녕하세요'와 '안녕히 가세요', 딱 두 마디만 빼고 모든 말이 반말인 사람도 심심치 않았고, 특정 거래와 관련된 십수 년 치 자료를 하루 이틀 만에 죄다 찾아서 제출하라고 닦달하는 것은 차라리 애교스러운 축에 속했다.
우리 회사와 관련된 최종적인 인허가권을 쥐고 있는 국회의원의 보좌관들이 '어디 어디에서 술 마셨으니 가서 대신 술값 좀 결제해라'라는 전화를 걸어온 경우도 가끔 있었다. (김영란법 발효 한참 이전인 '호랑이 담배 피울 적' 일어난 일이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 한다.) 공무원을 평생 직업으로 삼고 있는 속칭 '늘공'들은 그나마 처신을 조심하는 편이라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경우가 없었는데, 어쩌다 공무원들이 된 '어공'들의 갑질은 가끔 이렇게 황당했었다.
문제는 정부 부처로부터 이런저런 요구를 받으면 (술값 대신 내달라는 요구는 물론 제외하고...ㅎㅎ) 대부분의 경우 실제 업무를 담당하는 영업부서에게 관련 자료를 요청한 후 결과물을 넘겨받아야 했는데, 이때에도 영업부서의 온갖 핀잔을 들어야만 했다. '바빠 죽겠는데, 이런 쓰잘데기 없는 자료는 왜 요청하는 거냐?', '이런 불필요하고 과도한 요구를 막으라고 당신네 팀이 있는 거 아니냐?', '과천(그 당시 정부 청사는 세종이 아닌 과천에 있었다)에 그렇게 뻔질나게 들락날락하면서 이 딴 거 하나 해결 못하냐?' 등등...
회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해결되면 당연히 칭찬도 받고 보상도 받았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딱히 질책을 듣거나 회사의 징계를 받은 경우는 없었다. '갑'중의 '갑'인 공무원을 상대로 온갖 정신적, 인격적 수모를 받으며 '을' 노릇한 것만으로도 '에휴... 불쌍한 것들... 고생했다'라는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자존심은 너덜너덜해지고 몸도 피곤했지만 마음은 편했다. 그저 빨리 국방부 시계가 돌아서 다른 팀으로 발령만 나면 되는 거였으니까...
오늘도 서울 본사에 있는 해외영업 담당 직원이 국제전화를 걸어왔다. 한국 시각으로 점심시간 끝난 지 1분도 안돼서 전화한걸 보니 꽤나 급했나 보다. 회사에서 나누는 전화통화 내용이 뭐가 있겠나? 그저 '일 빨리 진척시켜라' 아니면, '왜 빨리 진척 안 되냐?' 이 두 가지 대화밖에 없다. 아무리 그 직원이 내 입사 후배여도 그 직원은 해외지사를 '관리'하는 본사 직원, 나는 해외에서 '영업'을 담당하는 직원이니 칼같이 '갑을' 관계이다. 본사는 칼자루를 쥐고 있고 나는 그 칼 끝을 쥐고 있는 신세... 본사는 지시하고, 나는 지시하는 대로 움직여야 한다.
인도 거래처들과 통화해도 이건 도대체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모르겠다. 분명히 내가 돈을 지불하는 입장인데도 인도 거래처들에게 읍소하고 사정하고 몇 번씩 전화와 메일을 보내야 한다. 얼굴 마주 보고 일해도 일이 잘 진척되지 않는 이 나라에서 코로나가 재확산되면서 일이 굴러가는 속도는 더욱더 느려졌다. 후진국이라서 벌어지는 황당하고 어이없는 상거래 관행에는 도저히 익숙해지려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이쯤 되니 나는 본사와의 관계에서도 '을'이고 인도 거래처와의 관계에서도 '을'이다. 하루 영업시간이 끝날 때쯤이면 급격하게 피곤이 몰려온다.
길지 않은 사회생활 동안 때로는 '갑'으로서, 때로는 '을'로서 생활하면서, 대개의 경우 '갑'보다는 '을'이 되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는 생각을 해왔었다. '때리는 놈'보다는 '맞는 놈'이 되는 게 몸은 고단해도 뱃속은 편했었는데, 지금처럼 동서남북에 '갑' 밖에 없고 꼼짝없이 나만 '을' 노릇하는 상황이 오래되다 보니 살짝 피곤하고 힘들어지기 시작한다.
에휴... 또 이렇게 '을'의 하루는 저물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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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by Mihn Pham on www.unsplas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