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넘자 마법처럼 사라진 풍력발전기들...
파리 지사에서 근무하던 2015년경.
슬로바키아 북서부에 있는 질리나(Zilina)라는 산업도시에 출장을 가야 할 일이 생겼다. 파리가 유럽 항공교통의 중심이긴 해도 인구가 8만 명 밖에 안 되는 작은 도시로 가는 직항편은 없었다. 아무리 비행기 예약사이트를 뒤져도 왕복 항공료가 무려 2,000유로가 넘는 비엔나 경유 2박 3일 또는 3박 4일 일정 이외에는 불가능했다.
사무실을 너무 오래 비우기도 곤란해서 한참을 고민하다, 면담이 약속된 고객기업에게 물었더니 육상교통을 이용하면 오히려 더 싸고 시간도 절약할 수 있단다. 비엔나까지만 비행기를 타고 온 후에 거기에서 질리나까지는 택시를 타고 오란다. 금액도 왕복 300유로에 영수증까지도 정확하게 발행된다는 것이다. 일석이조였다. 회사의 출장 경비도 절약하고 출장 일정도 1박 2일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비엔나 공항에서 나를 태운 택시가 도심을 조금 벗어나자 눈앞에 풍력발전기가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무료함도 달랠 겸 개수를 헤아리기 시작하는데, 어느새 나의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을 풍력발전기가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끝도 없이 펼쳐진 풍력발전기의 행렬... 조금 과장을 보태면 지평선 끝까지 풍력발전기가 가득 찬 듯했다. 나는 220개까지 세다가 눈이 아파서 중간에 포기했다. 석유나 천연가스도 아니고 오염이 더 심한 석탄은 더욱더 아닌 인류에게 주어진 최고의 무공해 에너지인 풍력을 참으로 알뜰하게도 활용하고 있는 오스트리아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못해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비엔나에서 출발한 차는 고속도로 A6를 달린 지 불과 40여 분 만에 오스트리아와 슬로바키아의 국경에 도착했다. 그동안 우리 차는 말 그대로 ‘풍력발전기의 숲’을 헤치고 왔다. 그런데, 차가 슬로바키아 영토에 진입하자 내 눈앞의 광경은 마술처럼 바뀌었다. 그 많던 풍력 발전소는 깜쪽같이 모두 사라지고, 띄엄띄엄 보이는 인가와 공장 그리고 밋밋한 구릉지대만 이어지는 것이었다.
이쯤 되니 운전기사(슬로바키아 사람이었다)에게 안 물어볼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에는 풍력발전기가 많던데 당신 나라에는 왜 없나요?' 그러자, 그 운전기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우리에겐 석탄이 잔뜩 있는데 뭐가 걱정이에요?'. 심드렁하게 별일 아니라는 듯한 말투였다.
싸고 구하기도 편한 석탄이 풍부하게 있는데 골치 아프게 왜 풍력발전처럼 비싸고, 효율 낮고, 바람이 안 불면 전기도 못 만드는 그런 불편한 발전 방식을 굳이 도입하냐는 논리인 거다. 좀 더 단순화하자면, '값만 싸면 장땡이지, 환경이 알게 뭐냐'는 이야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산업도시인 질리나에 도착해 차 문을 여는 순간, 도시 전체를 휘감은 매캐하고 텁텁한 매연이 코를 찔렀다. 그 순간 내가 '빈자의 나라'에 도착했다는 실감이 들었다.
빈부의 격차는 단순히 누가 돈을 많이 버느냐 적게 버느냐의 차원보다 훨씬 더 깊숙하게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더 좋은 차를 타고, 더 넓은 집에서 사는 것 이외에도, 더 안전하고, 성숙된 사회와 인프라의 도움을 받아, 더 깨끗한 자연을 즐기며, 병들지 않고 장수하는 것... 그것이 '부유한 나라' 국민들이 즐길 수 있는 - '빈부의 격차'를 뛰어넘는 - '삶의 질의 격차'인 것이다.
하지만, '빈자의 나라' 국민들에게는 '부자의 나라' 국민들이 고민하는 '기후변화', '인권', '성평등'과 같은 배부른 걱정을 할 여유가 없다. ‘삶의 질’과 관련된 그런 가치들이 소중하다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도 어렴풋이나마 안다. 하지만, 당장 오늘 돈을 벌어서 하루 먹거리를 마련해야 한다. 지금 발전소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을 걱정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슬로바키아 같은 나라도 그런 지경인데, 인도 같은 나라는 오죽하겠는가? 오늘 하루 벌이가 없으면, 지금 집안에서 아빠를 목 빠지게 기다리는 대여섯 명의 자식과 늙은 부모님이 오늘 저녁을 굶어야 한다. 냉엄하고 무서운 현실이다.
일 년 내내 뉴델리 전체를 뒤덮는 매연이 시원하게 내리는 빗줄기에 잠시 씻겨 나가면서 정말 오랜만에 미세먼지 지수가 100 미만으로 내려갔다. 창문을 열고 빗줄기가 발코니를 때리는 경쾌한 소리를 듣고 있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구 13억인 이 나라가 좀 더 경제성장을 이뤄서, 이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자동차를 사고, 집집마다 에어컨을 설치하고, 더 많은 공장을 짓고, 더 많은 오염물질을 배출한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렇다고 '지구의 환경이 중요하니, 너희들은 계속 가난하게 살아라'라고 할 수도 없다. 경제성장과 환경보전의 균형이 가장 시급하게 이뤄져야 할 곳은 바로 인도와 같은 나라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 내가 적어놓은 풍력발전기 개수가 의심스러운 독자분들은 지금 당장 구글맵을 열어서 비엔나 국제공항에서 Zilina까지 경로탐색 해보시면 된다. '지도'모드가 아니고 '위성'모드로 바꾸신 후 A6 고속도로를 따라가 보시기 바란다. 도심지역을 조금만 벗어나면 20여 개, 30여 개의 풍력발전기가 클러스터를 형성해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양국 국경검문소를 넘어서자마자 풍력발전기는 깜쪽같이 사라진다. 마치 마법에 걸린 듯 말이다...
* photo from google map (대충 세어도 이 사진 한 장에서만 스무 개 가까운 풍력 발전기를 발견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