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변명' 매거진을 새롭게 시작하며...
얼마 전부터 고전을 다시 찾아 읽는 재미에 빠졌다. 줄거리만 대충 알고 있거나 젊었을 때 후다닥 읽고는 잊고 지냈던 고전들을 손끝에 걸리는 대로 읽었고 그중에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도 서너 개 있었다. 고전을 다시 읽는 즐거움은 기대 이상이었다. 과거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작가의 숨겨진 의도나 표현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속으로 '무야호~~~'를 외치곤 했다.
책도 굳이 필요 없었다. 21세기 아닌가? 이미 인터넷에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이 공개되어 있으니 노트북 한 대면 충분했다. 그의 펜 끝에서 창조된 스코틀랜드의 황야와 덴마크의 고성, 고대 로마와 이탈리아 베로나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코로나 사태로 모든 종류의 모임이 취소되면서 자유시간이 늘어난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작년 봄부터 주체할 수 없이 늘어난 자유시간을 1년 넘게 의미 없이 낭비하다가 올해 4월 문득, 달력 위에 나의 시선이 멈춰 섰다. 4월 23일... 세계 영문학도들이 비공식적인(?) 셰익스피어 생일로 기념하는 날이었다. 그리고, 나는 매우 즉흥적으로 결심했다. 눈으로만 휘리릭 셰익스피어를 읽고 노트북을 덮어 버리지 말고, 한번 '손으로 천천히' 읽어보면 어떨까?
그렇게 나의 '셰익스피어 원문 필사하기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다.
언제까지 몇 개의 작품을 필사하겠다거나 하루에 얼마만큼 필사하겠다는 그런 구체적인 계획은 하나도 안 세웠고, 앞으로도 세울 생각 없다. 나이가 50이 되다 보니 인생을 살아오며 끝까지 마무리한 일보다 중도에 그만둔 일이 더 많다. 아마 이 일도 '하다가 중간에 때려치운 일'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마음 편히 먹고, '언제든지 중도에 포기하기'를 목표로 삼았다. 쓸 수 있는 데까지만 쓰리라... 아니 내가 쓰고 싶은데 까지만 쓰리라... 한 작품이라도 마무리하면 다행이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미련 갖지 않기로 했다.
무슨 작품부터 '느리게 읽기' 시작할까 그리 오래 고민하지 않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맥베스를 1번 타자로 타석에 세웠다. 17,121 단어로 구성되어 셰익스피어 희곡 중 4번째로 짧을 뿐만 아니라, 10명 남짓되는 등장인물들이 쉼 없이 죽어나가는 박진감 넘치는 전쟁 액션물(?)이라서 첫 번째 상대할 타자로는 부담이 적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올해 4월 23일 맥베스의 제1막 제1장, 첫 번째 마녀의 대사부터 천천히 옮겨 적기 시작했다.
When shall we three meet again?
In thunder, lightning, or in rain?
그리고, 약 한 달 반이 지난 지금...
아직 안 때려치웠다. 계속 쓰고 있다.~~
17세기 시인의 문장을 새롭게 곱씹어 읽으면서 21세기 문명의 혜택을 많이 받았다. 가장 고전적인 작가를 가장 현대적인 방식으로 다시 읽는 일은 흥미로웠다. 다양한 학습 보조 사이트(https://www.sparknotes.com), 셰익스피어 관련 전문 사이트들 (https://shakespeare-navigators.com/, http://www.shakespeare-online.com/, https://www.opensourceshakespeare.org/) 들과 다양한 유튜브 클립 (Course Hero, Nerd Study, Crash Course) 을 길잡이 삼아 스코틀랜드 광야, 인버네스 성, 파이프 성, 잉글랜드, 던시네인 언덕을 종횡무진 누비다 보니 어느새 제5막 제4장에 다다랐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스코틀랜드 반란군이 잉글랜드 연합군과 함께 작전회의를 하고 있으니 브런치 독자분들은 잠시 목소리를 낮춰주시기 바란다. 쉿. 저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보자.
이제, 그 유명한 '핏자국이여 사라져라'라는 독백을 부르짖었던 레이디 맥베스는 잠시 후에 자살할 것이며, 살아 움직이는 버냄 숲의 나무들이 던시네인 언덕까지 전진할 것이다. 그리고, 맥베스와 맥더프의 물러설 수 없는 혈투 끝에 맥베스의 목은 뎅거덩 잘려나가 창 끝에 꽂힐 것이다. 그리고, 목이 빠져라 전투의 결과를 기다리는 젊은 왕세자에게 이 소식이 보고될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생전에 37편의 희곡을 집필하면서 835,997개의 단어를 사용하여 약 1,200여 명의 인물을 창조했다.(https://www.opensourceshakespeare.org/views/plays/plays_numwords.php) 셰익스피어 이후의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치고 셰익스피어의 등장인물에게서 원형을 찾지 못할 인물은 없을 정도로 다양한 인물 군상이 만들어졌다.
난 그중에서 주인공이 아닌 악인들에게 관심이 갔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주인공(protagonist)의 입장이 아닌, 악인(antagonist)들의 입장에서 다시 살펴보면 재미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매거진 제목을 처음에는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악당들의 변명'으로 지을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악인뿐만 아니라, 다양한 조연들의 입장도 한번 살펴보면 더 흥미롭겠다는 생각이 들어 매거진 제목을 조금 바꿨다.
각 작품별로 짧게 작품 소개하는 글을 한편 쓰고, 작품당 2명, 많으면 3명 정도 인물의 입장에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재해석해보고자 한다. 나는 영문학을 전공한 전공자도 아니고 내 현재 직업 또한 영문학과 전혀 상관없다. 그저 셰익스피어 작품을 좋아하는 아마추어 애호가일 뿐이다.
따라서, 이번 매거진의 글을 쓰면서, 작품의 기존 줄거리를 대부분 그대로 존중하되 문학적 상상력은 ‘아주 약간만’ 가미하기로 했다. 글의 형식은 그때 그때 자유롭게 바꿀 예정이다. 다만, 셰익스피어 원전에서 직간접적으로 인용한 표현은 굵은 글씨로 강조하고 그 출처를 밝힐 예정이다.(예를 들어, II, i, 99 라면 이는 2막 1장, 99번째 줄이라는 뜻이다)
그의 작품 중에 인간 감정의 깊은 바닥을 들여다보는 작품들이 많다 보니 다소 폭력적이고 성적인 표현이 등장할 수도 있을거 같다. 이 점은 미리 독자분들에게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글을 꺼리시는 분들은 이 매거진 읽지 않고 건너뛰시기를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권해드린다.
///
p/s. 안나 제임슨의 매혹적인 비평서 '셰익스피어의 여인들'과 브런치 작가 '요릭'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 photo by Elaine Howlin on unsplas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