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베스(Macbeth)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필사했다
드디어 다 읽고, 모두 옮겨 적었다... 만 칠천 백 이십 일개의 단어 모두를...
지난 4월 23일, 비공식적인(?) 셰익스피어의 탄생일을 즈음해서 약간은 즉흥적으로 '셰익스피어 작품의 원문을 필사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창한 문학적 동기는 없었고, 그저 셰익스피어 작품을 '가장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프로젝트의 첫 번째 작품인 맥베스를 약 한 달 반 만에 모두 필사했다.
"셰익스피어의 변명"이라 이름 붙인 이번 매거진의 첫 작품으로 선택한 맥베스에 대한 소개글을 어떻게 쓸까 잠시 고민했었다. 이미 대부분 알고 있는 줄거리를 지루하게 다시 적느니, 내가 이 작품을 셰익스피어의 연극 중 가장 좋아하는 몇 가지 이유를 적은 글로 대신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작품에 대한 소개글로 대신할까 한다.
첫째로, 일단 짧아서 좋다. (^_^;)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가장 길이가 짧고, 그의 37개 전체 희곡작품 중에서도 4번째로 짧다. (참고로, 맥베스는 17,121 단어, 리어왕은 26,145 단어, 오셀로는 26,450 단어, 햄릿은 무려 30,557란다). 가장 길이가 긴 햄릿과 비교하면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이다. 햄릿을 무삭제 공연하면 다섯 시간은 족히 걸린다는데, 맥베스는 약 2시간 반이 넘는 정도의 공연시간이라고 한다. 연극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견딜만한 길이'라고나 할까?
둘째로,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성 캐릭터인 '레이디 맥베스(Lady Macbeth)'가 등장한다.
남자의 사랑만을 바라보다 비극적 최후를 맞거나(햄릿 속의 오필리아,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질투에 눈이 먼 남자에게 어이없이 살해당하거나(오셀로의 데스데모나), 남자에게 '길들여지는' 여인(말괄량이 길들이기의 카트리나)이 아니다. 주체적이고 당당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한 여인이다.
헬렌 미렌(Helen Mirren), 주디 덴치(Dame Judi Dench), 플로렌스 퓨(Florence Pugh), 마리옹 코티야르(Marion Cotillard) 등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과거와 현재의 유명 여배우들이 이 역할을 연극이나 영화에서 연기한 것도 이 캐릭터가 뿜어내는 매력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이 캐릭터는 연극이 진행되는 짧은 시간 동안 역동적으로 변모한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는 맥베스를 무섭게 몰아붙여 결국에는 덩컨 왕을 살해하게 만드는 등 사실상 극을 주도한다. 하지만, 극의 후반부에는 죄책감에 시달린 후 정신착란 증세를 일으켜 결국 자살하는 최후를 맞게 된다. 이렇게 입체적이고 변화무쌍한 캐릭터가 400년 전에 창조되었다는 게 새삼 놀라울 따름이다.
셋째로, 짧은 공연시간에도 불구하고, 10명 가까운 등장인물들이 쉴 새 없이 죽어나가는(?) 박진감 넘치는 전개가 매력적인 작품이다. 맥베스보다 훨씬 긴 오셀로에서 고작(?) 네 명 밖에 안 죽고, 길이가 거의 2배에 육박하는 햄릿에서 맥베스보다 적은 수의 사람이 죽는 것을 생각해 보면, 피비린내를 원하시는 독자에게는 맥베스가 최고의 작품이라 하겠다(^_^;)
넷째로, 전투 장면으로 시작해서 전투 장면으로 끝나는 현대식으로 표현하자면 '액션물'에 가깝다. 연극이 시작되자마자 1막 2장에서 맥베스와 그의 동료인 뱅쿠오가 스코틀랜드를 침략한 아일랜드와 노르웨이 연합군을 얼마나 용맹하게 무찔렀는지가 묘사된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5막은 전체 내용이 맥베스가 던시네인(Dunsinane)성에서 말콤과 맥더프가 지휘하는 반란군을 맞아서 싸우다 죽는 전투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심지어 연극의 가장 마지막에 맥더프가 맥베스에게 말한다. "My voice is in my sword." 한마디로, 입 닥치고 나의 칼을 받아라.. 이거다. (^_^;)
자기 삼촌을 죽일까 말까 주야장천 고민하거나(햄릿), 광야를 미친 듯이 배회하다가 감옥까지 끌려가서 자기 딸의 시체를 마주하는(리어왕)... 그런 늘어지는 줄거리 없이, 깔끔하고(^_^;) 속도감 있게 액션 위주로 전개된다. 맥베스야 말로 셰익스피어 작품 중 가장 액션으로 가득 찬(action-packed)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빠른 전개와 화려한 전투 장면 덕분에 맥베스는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고 대부분 성공을 거두었다.
다섯째, 선과 악의 뚜렷한 대비가 있고, 읽는 사람을 몰입하게 만드는 '선과 악'에 대한 뛰어난 통찰이 있다. 맥베스와 반 맥베스파로 나누어지는 뚜렷한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분 덕분에 연극 속의 대립 구조가 명확하고 이해하기 쉽다. 게다가,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의 대사와 행동으로 드러나는 '악의 본질'에 대한 무서우리만치 솔직한 성찰을 듣고 있노라면 독자들은 마치 자신들의 속마음을 들킨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된다.
여섯째, 역사적 배경을 알고 읽으면 더 재미있다. 이 작품은 1600년대 초반에 쓰였는데, 엘리자베스 1세에서 제임스 1세로 왕위가 계승되던 당시의 불안한 정치 상황이 짙게 반영되어 있다. 1603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후손 없이 죽게 되자, 누가 왕위를 계승하느냐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1567년에 이미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즉위하여 한참 스코틀랜드 왕 노릇을 잘하고 있던 제임스 6세(굳이 촌수를 따지자면 엘리자베스 여왕의 6촌 동생쯤 되겠다)가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국왕 자리까지 득템(?)하게 되었다. 이후, 이름을 제임스 1세로 바꾼 후, 1625년까지 생존하면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통합 국왕으로서 영국을 다스렸다.
깨알 같은 TMI(^_^)가 몇 개가 더 있는데, 일단, 제임스 1세가 마녀나 마술 같은 것에 매우 심취해서 '악마학'이라는 책까지 쓸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자기의 혈통인 스튜어트 가문이 뱅쿠오의 후손이라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눈치 빠른 셰익스피어도 이것을 알고 (실제로는 맥베스의 반역에 동조했던) 뱅쿠오를 정의롭게 살다가 폭군에게 살해당한 인물로 묘사했다고 한다.
일곱 번째, 연극 자체로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맥베스는 '저주받은 연극'으로도 유명한데, 연극 연습이나 실제 공연을 제외하고는 극장에서 '맥베스'라는 이름을 입 밖에 내면 불운이 생긴다는 미신이 줄곧 이 연극을 따라다녔다. 실제로, 지난 400여 년 동안 맥베스 공연을 앞둔 극장에 불이 나거나 배우들이 크게 다친 경우들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연습이나 공연 때를 제외하고는 배우들이 '스코틀랜드 연극(the Scottish Play)' 또는 맥비(MacB)라는 별명으로 이 연극을 불렀고, 혹시라도 실수로 '맥베스'를 입 밖으로 내뱉었을 때 불운을 씻기 위한 일종의 '씻김굿 (cleansing ritual)'까지 있었다고 한다.
뭐, 믿거나 말거나요...ㅎㅎ
전 그럼 이만... Exeu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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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글쓴이가 직접 찍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