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왕 노릇 해보고 싶지 않나?

레이디 맥베스가 우리에게 묻는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만 것인가?


저 불충스러운 반란군들과 저주받을 잉글랜드의 연합군이 결국 우리 성을 포위했다(V, iv, 10).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내 남편이자 스코틀랜드의 새로운 군주이신 맥베스 국왕 앞에서 아첨하던(V, iii, 27) 영주들은 하나둘 반란군에 합류했고(V, iii, 1), 이제 이 을씨년스러운 던시네인 왕궁에는 주인 잃은 빈 갑옷들만 나뒹굴고 있다. 사냥개들에게 포위당한 채 기둥에 묶인 곰 신세로구나(V, vii, 2)




이 모든 끔찍한 일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궁금한가?


척박하고 좁아터진 글라미스 땅에 처박혀서(I, iii, 48) 하루하루 시간을 때우던 남편이, 아일랜드와 노르웨이의 연합군이 스코틀랜드를 침략하자 가장 앞장서서 적진에 뛰어들었다. 엄청난 전공을 세운 남편은(I, ii, 38) 순식간에 전쟁영웅이 되었다. 던컨 왕은 우리 남편의 용맹함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다가(I, ii, 24; I, iv, 15) 결국에는 너무 기뻐서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I, iii, 93). 순진해 빠진 멍청한 늙은이 같으니라고(I, iv, 12)...


하긴, 내 남편이 배신자 맥돈왈드의 몸을 배꼽부터 턱주가리까지 단숨에 두 동강 낸 것도 모자라(I,ii, 22) 그 수많은 적병들을 모조리 도륙해서 피바다를 만들었으니(I, ii, 39)... 늙은 왕이 감탄할 만했다.




전령이 전해준 남편의 편지(I, v, 1)에는 마녀들의 예언대로 남편이 코도르 영주로 책봉되었다고 쓰여 있었고(I, v, 7), 이젠 스코틀랜드의 왕이 될 일만 남은 거였다(I, v, 9). 그 예언이 금방이라도 이뤄질 것 같은 확신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I, v, 58).


하지만... 주변머리 없이 어리바리한 남편(I, v, 17).


야망이 있긴 한데(I, v, 19) 정작 실행에 옮길 독한 마음은 없으니(I, v, 20)... 그 인간의 마음이 약해져서 일을 그르치면 안 될 노릇이었다. 모든 계획은 내가 나서서 세워야 했다.(I, v, 73). 다만, 아버지를 닮은 던컨 왕의 잠든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약해져서 차마 내 손으로 죽이지는 못했고(II, ii, 13), 결국 남편이 없는 용기를 쥐어짜 내서 간신히 실행에 옮겼다.(II, ii 14).




그렇게 아이처럼 순하디 순한 눈동자를 가졌던(II, ii, 51) 남편이 언제부터인가 변하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첫 번째 악행을 저지르는 게 어려웠을 뿐이었다. 왕의 피가 묻은 단검을 경비병들 옆에 놓고 오라는 내 말에(II, ii, 46) 두 번 다시는 그 방에 못 들어간다고 징징대던 인간이었는데...(II, ii, 48). 이제는 나와 상의하기는커녕 알리지도 않고 뱅쿠오와 그 아들 플리언스의 살해를 지시해놓고(III, i, 103), 나에게는 '뱅쿠오가 파티에 오면 친절하게 대하라'며 뻔뻔한 거짓말까지 하고 있었다(III, ii, 30)...


아, 내 남편이 결국 스코틀랜드 최고의 악한(IV, iii, 233)으로 전락해버렸도다.


남편의 병사들이 파이프 성을 습격하여 맥더프의 가족과 하인들까지 모조리 살육한(IV, iii, 204) 바로 날 밤. 의기양양하게 침실 문을 열어젖힌 남편은 마치 겁탈이라도 하듯 내 몸을 탐했다. 거칠게 내 옷을 벗기고 지옥에서 온 사냥개(V, viii, 4)가 사냥감을 쳐다보듯 내 알몸을 훑어보던 남편의 두 눈동자... 히번득거리는 광기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평소에 내가 알던 남편이 아니었다.


그때 알았다. 남편이 결코 헤어나올 수 없는 '핏물의 강'에 빠져버렸다는 것을(III, iv, 135)... 한번 저질러진 일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III, ii, 12; V, i, 68), 그리고 여태까지 저지른 일들이 너무 악해서, 지금 개과천선 해봤자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말이다.(III, iv, 137) '새끼 양을 훔쳐서 교수형 당하느니 어미 양까지 훔쳐버리자' 남편은 이렇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 이후로 남편은 나를 찾지도 않았다. 전쟁 준비에 몰두하며 밤잠도 잊은 듯했다. 내 손에 묻은 저주받은 핏자국은 아무리 씻어도 사라지지 않았고(V, i, 35), 내가 몽유병에 시달리며 밤마다 성안을 헤매고 있을 때(V, 1, 5)... 남편은 내 곁에 없었다. 미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었다.




아, 어차피 언젠가 한 번은 죽을 목숨(V, v, 17)...


반란군들이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V, vi, 1), 저 더러운 잉글랜드 놈들에게 능욕당하기 전에, 그 옛날 로마 사람들처럼(V, viii, 1) 명예롭게 내 손으로 목숨을 끊어야겠다. 인생은 그림자 연극 같은 것(V, v, 24), 죽도록 수고해도 손에 쥔 것은 없구나(III, ii, 5)...


이젠, 아무 미련이 없다(V, v, 28). 그래도 이 멋진 나라의 왕비 노릇 한번 해보았으니 여한은 없구나.


내 유서를 읽는 당신들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나와 내 남편에게 쭈욱 동조해 왔다는 거... 말 안 해도 나는 다 안다. 아무리 부정해봤자 당신들의 장미꽃 밑에 숨겨진 뱀 대가리(I, v, 66)를 내가 발견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나? 순진한 척하는 위선적인 꼬락서니 집어치워라.


당신들이 살고 있는 '현대' 세계도 나와 내 남편이 살고 있는 11세기 스코틀랜드와 비슷할 거라 확신한다. 다만, 칼과 창만 들지 않았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 않는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솔직히 말해봐라...


목적을 이루기 위해 꼭 수단이 정당할 필요는 없다는 데에 당신들도 동의하지 않는가?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앞세웠던 자들이(III, iv, 135) 항상 승리했다는 것을 당신도 이미 알지 않나?


솔직히 고백하라...


나의 유서를 읽는 독자들이여... 이제 그만 혼자서 성인군자 인척 하지 말고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그대들의 욕망(I, iv, 51)을 솔직하게 인정하라. 당신들도 나와 내 남편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게다가 마녀들의 예언까지 듣고 나서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면, 우리처럼 단검을 손에 들고(II, i, 34), 던컨 왕의 침실을 향해 서슴없이 걸어 들어갔을 것이라고(II, i, 62)...


어서 솔직히 고백하라...


비록 당신들의 과거 행실이 당신들을 지옥으로 이끈다 해도(V, v, 22), 적어도 한 번쯤은 당신도 왕 노릇 해보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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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괄호 속 인용문의 위치는(막, 장, 줄번호)로 표기했으며, shakespeare-navigator.com를 참조했습니다.

* photo : 'Ellen Terry as Lady Macbeth' by John Singer Sargent, originally from wikipedi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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