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드디어 맥베스의 목을 베었습니다.

맏아들 말콤 왕자가 아버님께 전투 결과를 보고 드립니다.

아버님, 드디어 전투가 다 끝났습니다.


용맹한 맥더프가 끝까지 저항하던 맥베스의 목을 베어(V, viii, 28) 창에 꿰어 놓았습니다(V, viii, 54). 맥더프가 친히 '폭군의 최후를 보아라'라고 써 붙여 놓았더군요(V, viii, 27). 하긴, 맥베스의 손에 자신의 가족과 부하, 시종까지 모조리 살육당했으니 맺힌 한이 많았을 겁니다.


역사는 돌고 도나 봅니다. 추악한 맥베스가, 결국 자기 손으로 창끝에 꿰어 놓았던 배신자 맥돈왈드(I, ii, 23)와 똑같은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아, 그리고 사악한 그놈의 아내도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그 저주받을 맥베스 부인도 스스로 성벽 아래로 몸을 던진듯합니다.(V, viii, 72)


시워드 장군이 금쪽같은 아들을 잃었습니다만(V, vii, 11) 다행히도 전투는 비교적 수월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V, vii, 24). 시워드 장군은 잉글랜드로(VI, iii, 134), 맥더프는 자기 고향인 '파이프 성'(II, iv, 36)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IV, iii, 126) 제가 자식을 잃은 이들 두 아비의 마음을 어찌 이해하겠습니까마는.. 아버님... 저들의 영혼에 평안에 깃들게 도와주시옵소서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갑니다.


아버지는 친히 저를 왕세자로 책봉하시고(I, iv, 38), 이 나라의 미래를 저에게 의탁하셨는데, 그 무도하고 끔찍한 살인이 벌어지던 밤(II, iii, 67), 아버님 주무시던 바로 옆방에서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세상모르고 잠에 취해있던 제 자신이(II, ii, 18) 너무나도 한스럽습니다. 아버님 이 못난 맏아들을 용서해 주소서...


부하들 하나하나에게도 겸손히 대하시며(I, vii, 16), 청렴하게 국사를 돌보셨던(I, vii, 17) 아버님...

천사와 같은 덕행을 가지신 분(I, vii, 18)이자 성인과도 같은 훌륭한 군주(IV, iii, 109)라고 칭송받으셨던 아버님...


그런 아버님 밑에서 어찌 저처럼 심약하고 부끄러운 자식이 태어났는지요?


아버님 살해의 배후로 몰릴까 두려워, 눈물 한 방울도 제대로 흘리지 못한 채(II, iii, 124) 허둥지둥 인버네스 성을 빠져나와, 저는 잉글랜드로(II, iii, 137), 그리고 제 동생 도널베인은 아일랜드로(II, iii, 138) 꽁지가 빠져라 도망갔습니다. 영국 왕 에드워드에게 환대를 받으며 머물렀지만(III, vi, 27)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었습니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용기도(IV, i, 147) 없고, 제 주위에 저를 도울 군사도 없던 저는 미칠 듯이 괴로웠습니다.


자비롭고 신앙심 많은 에드워드 왕과, 맥더프를 포함한 충직한 부하들이 이렇게 어리고 심약한 저를 믿고 스코틀랜드 원정에 동참해 준 것은 정말로 천운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곧 스쿤에서 대관식이 열립니다(V, viii, 76).

대관식이 끝나면 이제 제가 명실상부한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겠지요.. 말콤 왕세자가 말콤 국왕으로 옷을 갈아입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제가 그 무거운 왕관의 무게를 견딜만한 준비가 되어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것이 아닌 옷을 걸쳐 입는 것은 아닌지(I, iii, 108) 두렵습니다. 준비 없이 국왕이 된 자들이 얼마나 많은 나라들을 멸망으로 이끌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두렵습니다. 젊다 못해 어린 저에게 '스코틀랜드의 군주'라는 새로운 영예가 찾아왔는데, 마치 길들이지 않은 새로운 옷을 입은 듯 어색하기만 합니다.(I, iii, 145).


맞지도 않은 큰 옷을 입은 제가(V, ii, 20) 용맹한 팔콘은 고사하고 변변찮은 올빼미라도 되기는 하는 건지... 저도 자신 없습니다(II, iv, 12) 혹시라도 백성들이 '새 옷보다 옛날 옷이 더 편했다'(II, iv, 38)며 저를 비난하면 어쩌나요? 맥베스 치하에서 죽을 고생한 우리 백성들(IV, iii, 4)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을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님... 도와주세요.




그나저나 아버님... 이제 저는 누구의 발자취를 따라야 하나요?

누굴 본보기로 삼아야 하는 거죠? 아버지요? 아니면 맥베스요?

왜 그리 놀라시죠? 아버지가 아니라 맥베스를 본받겠다는 제 말에 놀라셨나요?


아버님... 저 솔직히 말씀드려서... 아버지 좀 원망했습니다. 아니, 많이 원망했습니다...

맥돈왈드와 같은 측근 중의 측근이 보란 듯이 아버지를 배신하는 마당에, 천사와 같고(I, vii, 18) 성인과도 같은(IV, iii, 109) 훌륭한 국왕 노릇한 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버님도 본인 입으로 말씀하셨잖아요 '사람 얼굴만 보고 마음속을 알아채지는 못했다'라고요(I, iv, 12)... 저는 아버님처럼 주위 사람들을 무한 신뢰하다가 제 등 뒤에 칼 꽂혀 죽는 실수는 저지르지 않을 겁니다.


지금은 제 면전에서 금빛 찬사(I, vii, 33)를 바치는 저 영주들이 언제 저를 배신할지 모릅니다. 저들도 야심과 욕망이 가득 찬 자들입니다. 맥베스와 똑같은 자들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저들 중에 자신의 욕심에 걸맞은 실행력과 용기를 가진 자(I, vii, 39)가 있다면 그놈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는 뻔한 거 아닌가요? 그런 자들에게는 제아무리 '피를 부른 행위는 반드시 피로 죗값을 치른다'(I, vii, 7)는 고루한 이야기 떠들어봤자 소용없을 겁니다.




이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지금 누가 제일 두려운지 말씀드릴까요? 도널베인입니다. 네.. 아버지의 아들이자 저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저는 제일 두렵습니다. 저와 피를 나눈 단 하나뿐인 동생이 아일랜드로 도망간 이후로 연락을 끊었습니다. 형인 제가 목숨을 걸고 던시네인 성 탈환을 위한 전투를 벌이는 현장에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V, ii, 8). 이 땅의 적법한 군주이자 국왕이 될 제가 하나뿐인 동생을 가장 필요로 하는 바로 그때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고요!!!


게다가 얼마 전부터는 자기 자신의 미래가 어찌 될지 궁금해하며 미래에 대한 예언을 듣고자 마녀들을 수소문하면서 돌아다닌다는 해괴한 소문마저 돌고 있습니다. 그 세 마녀들에게 '달콤한 예언'(IV, i, 96)이라도 듣고 싶은 모양인 게지요. 저의 가장 가까운 피붙이(II, iii, 140)가 제 등 뒤에 칼을 꽂을지도 모르는 상황인 거 같습니다.




아버님.. 이제 제 넋두리 듣고 나니 좀 이해되시나요?


저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람이 두렵습니다. 제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두렵습니다. 강직하고 충성스러운 맥더프는 목숨을 걸고 용맹하게 싸웠습니다. 하지만, 젊고 미숙한 저에게는 백성들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맥더프가 부담스럽기만 합니다. 그가 제2의 맥베스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요? 적당한 시기에 그를 제거해서 후한을 없애야 하지 않을까요? 로스나 레녹스같은 귀족들이 저를 등지고 맥더프의 편에 합류할지 모르는 일인 거 같습니다.


그리고 이왕 말 나온 김에.... 아버지도 세 마녀들의 유언 아시죠? 뱅쿠오의 아들들이 왕이 될 거라는...


저의 이 죽을 고생이 결국 뱅쿠오의 자손들을 왕 만들기 위한 것인가요?(III, i, 69) 뱅쿠오의 아들 플리언스가 살아서 도망갔는데(III, iv, 19), 결국 제 아들이 아니라 그놈이 왕이 되는 건가요? 그렇다면 제가 나서서 플리언스를 찾아 죽여야 할거 같군요. 아비 뱀뿐만 아니라 아들 뱀도 처단해야 할 테니까요(III, iv, 28)? 상처는 입었지만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지지 않은 그 빌어먹을 혈통(III, ii, 13)을 제 손으로 끝장내야겠네요...




아... 아버님... 어쩌다 제가 이렇게 사악한 마음을 먹게 된 거죠?

아. 제 마음에 전갈이 가득 찬듯합니다. (III, ii, 36)


군주는 원래 외로운 자인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저에게 힘을 주십시오. 아버님의 자비로움, 아버님의 선함을 저에게 허락해 주소서... 다만, 저는 아버지처럼 사람을 함부로 믿지 않을 겁니다 필요하다면 맥베스보다도 더 사나워질 겁니다. 언제든지 스코틀랜드 최고의 악한(IV, iii, 233)이라도 될 겁니다.


어차피, 정직한 사람보다 사기꾼들이 더 많은 이 세상(IV, ii, 57), 해를 끼치면 칭찬받고 착하게 살면 오히려 위험한 이 속세의 세상((IV, ii, 75)에서 왕좌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제 앞에 놓인 걸림돌을 모두 제거하고야 말겠습니다. 필요하다면 백성들이 '새로운 왕에 비하면 맥베스가 순한 양과도 같았다’(IV, iii, 52)는 말을 듣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돌고 도는 역사, 그 거대한 수레바퀴를 뭐 하러 제가 멈추려 애써야 하나요?



이제... 대관식이 끝나고 제가 왕좌에 앉고 나면, 미래의 정적이 될만한 놈들부터 하나둘씩 무력화시켜야겠습니다. 확실히 내 편으로 만들던지 아니면 확실하게 제거하던지... 어느 놈부터 시작할까요?


도널베인이 제2의 맥베스가 되기 전에 제가 먼저 선수를 쳐야 하나요?

아니면, 국민들한테 인기가 치솟고 있는 맥더프나 장차 국왕이 될 거라는 플리언스를 먼저 죽여야 하나요? 손봐야 할 놈들은 많은데 시간이 없네요...


아버님... 저에게 힘을 주세요...

그리고 이 극악무도한 일을 끝까지 망설이지 않고 실행할 용기와 추진력을 주세요..

아버지가 못 지킨 왕좌를 제가 지켜내 드린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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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널베인의 행적에 대한 묘사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맥베스(1971)'를 모티브로 했습니다.

* 괄호 속 인용문의 위치는(막, 장, 줄번호)로 표기했으며, shakespeare-navigator.com를 참조했습니다.

* photo by Josh Cris Gayle on unsplas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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