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디어스 왕은 햄릿의 살인 재판에서 과연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존경하옵는 재판장님.
덴마크 왕실에 피비린내 나는 살인의 광풍을 몰고 온(V, ii, 364) 햄릿 왕자에 대한 재판(https://brunch.co.kr/@hobiehojiedaddy/97)을 맞이하여 재판장님께 한 가지 간청하고자 이 탄원서를 올립니다.
저는 덴마크의 군주인 클로디어스 왕(I, ii, 1)으로서, 이 재판의 피의자인 햄릿 왕자의 숙부이자 동시에 아버지(I, ii, 64)이며, 그에게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피해자(V, ii, 327)입니다... 아... 이제 덴마크의 왕위가 노르웨이의 포틴브라스 왕자에게 넘어갔으니(V, ii, 356), 나라의 주권을 외세에게 넘겨준 비참한 선왕(先王)이라고 소개해야만 하겠군요. 한때 형수였으나 지금은 아내인 거트루드 왕비를 잃은(V, ii, 310) 비통한 마음, 그리고 피와 땀으로 지키고 가꾼 덴마크를 노르웨이의 포틴브라스 왕자에게 빼앗긴 원통한 심정으로 탄원서를 작성했으니 부디 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제가 왜 마치 카인이 아벨을 살해하듯(III, iii, 37) 하나뿐인 형이자 선왕을 살해(I, v, 25)하는 저주스러운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는지 그 사정을 고하고자 합니다.
무릇 군주의 선택 하나하나에 왕국 전체의 안녕과 번영이 달려있는 법(I, iii, 21)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으로부터 30년 전(V, i, 143), 선왕인 제 형은 덴마크 왕국의 영토를 걸고 이웃한 노르웨이와 전쟁을 벌였습니다(I, i, 90). 마치 판돈을 걸고 카드놀이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다행히 전쟁에서 이겨 노르웨이 국왕의 목숨과 손바닥만 한 그들의 땅을 빼앗아 오기는 하였습니다만(I, i, 88), 전쟁에서 졌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군주된 자로서 선왕의 이러한 행동이 어찌 무책임하고 충동적인 행동이라 아니하겠습니까?
제 형이자 선왕의 이러한 호전적 행동으로 인해 덴마크 국민들은 노르웨이의 보복 위협에 시달려야만 했고(I, i, 72), 온 나라가 전쟁준비로 인해 고생해야만 했었지요(I, i, 104). 나라 전체를 불안에 떨게 만들어 놓고는 날이면 날마다 궁정의 정원에서 태평하게 낮잠을 즐기는(I, v, 59) 형의 모습을 보자 저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오르더군요. 저는 결단하고 행동에 옮겨야만 했습니다. 덴마크와 덴마크 국민의 안녕을 위해서는 형의 귓속에 독약을 부어야만 했습니다(I, v, 63).
제가 권력욕에 눈이 멀어 선왕의 목숨, 왕관, 왕비를 한꺼번에 빼앗았다고(I, v, 75) 비난하는 자들도 있던데, 저는 억울합니다. 수많은 국민들의 운명은 마치 바큇살처럼(III, iii, 19) 군주라는 바퀴축에 의지해 살아가는 법인데, 바퀴의 축이 잘못되면 속히 튼튼한 축으로 교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 일을 제 손으로 했을 뿐입니다. 출중한 능력을 갖고도 둘째 아들로 태어난 신세를 뒷방에 틀어박혀 원망만 한다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요.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으면서(III, i, 58) 가만히 있느니, 차라리 장렬하게 저의 운명에 저항(III, i, 60)하기로 마음먹었을 뿐입니다. 오로지 덴마크 국민을 위해 어려운 결단을 내렸을 뿐입니다.
제가 햄릿 왕자를 미워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미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 몸에서 난 후사(後嗣)가 없는 마당에 제가 죽고 나면 누가 왕이 되겠습니까? 제가 사랑하는(IV, i, 19) 햄릿이 당연히 제 뒤를 이을 예정이었지요. 제 조카이자 아들인 햄릿은 고귀한 군주의 성품을 이미 갖추었는 바(III, i, 157), 장차 햄릿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줄 계획(III, ii, 341)임을 저 또한 여러 번 천명한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햄릿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네. 미쳐버렸습니다(II, ii, 92).
광기를 이기지 못하고 궁전 이곳저곳을 헤매는 것(II, i, 75)까지는 어찌어찌 참아줄 만했지만, 죄 없는 폴로니어스를 극악무도하게 살해(III, vi, 24)하고는, 나이 어린 그의 딸마저 결국 자살하게 만들었습니다.(IV, vii, 164). 지체 높은 자들이 광기에 사로잡혀 날뛰는 것은 절대로 방관하면 안 되는 법입니다(III, i, 188).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기 때문이죠. 걱정과 두려움에 잠 못 드는 날들이 계속되었습니다.
햄릿의 이러한 사정을 잘 모르는 덴마크 국민들은 그저 맹목적으로 햄릿을 사랑했습니다(IV, iii, 4). 군주의 덕망과 지혜에 수많은 국민들의 안녕이 걸려있는 상황인데(III, iii, 8), 덕망과 지혜는 고사하고 광기에 미쳐 날뛰는 햄릿을 더 이상 내버려 두면 안 된다고 생각되었고(III, iii, 2) 결국 영국으로 보내 버리기로 결정한 것입니다(III, ii, 169). 햄릿을 방치해 두는 것이 단순히 저와 제 아내뿐만 아니라 모든 덴마크인들에게 위험천만한 일이 되어버리기 전에 말입니다(IV, i, 14). 영국 왕에게 햄릿을 죽이라고 편지를 쓴 것 (IV, iii, 65)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어그러졌습니다.
제 편지를 훔쳐본(V, ii, 18) 햄릿은 덫에서 빠져나와 목숨을 건졌고, 결국 덴마크로 돌아와 우리 왕실을 그야말로 피바다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일의 시작은 인간이 하지만, 그 마무리는 하느님이 하신다더니(V, ii, 10)... 한 치 앞의 미래도 모르던 우리 모두는(IV, v, 43)는 결국 이렇게 이곳 지옥에 모이게 되었네요. 어느 여행자도 돌아가지 못한 '저승'이라는 이 나라(III, i, 80)에 저와, 제 아내를 포함해서 너무 많은 육신과 영혼이 갇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덴마크 국민들은 이제 노르웨이의 통치를 받게 되었구요(V, ii, 389)...
아... 너무나도 원통합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이 가파르고 가시나무로 가득 차 있다고 했던가요?(I, iii, 48) 하지만, 지옥으로 가는 지금 이 길도 그에 못지 않게 험준하고 고통스럽군요. 저는 그저 덴마크를 위해, 덴마크 국민을 위해 결단을 내리고 그걸 행동에 옮겼을 뿐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서른살이 되도록(V, i, 162)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빈둥거리던 햄릿(I, ii, 113)은 도대체 덴마크를 위해, 덴마크 국민을 위해 무엇을 했나요? 솔직히, 아버지 잘 만난 착해빠진 백면서생(白面書生)이 왕이 될 자격이 있기나 했나요?
해야할 일을 하지않고 미뤘던 인간은 벌받지 않고 어찌하여 해야할 일을 과단성 있게 실행에 옮긴 제가 왜 벌을 받아야 하나요? 누군가는 결단 내리고 실행에 옮겨야 할 일을 비로소 행동에 옮긴 것이 천년만년 유황불에 불타는 처벌을 받아야할 죄라면 그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라는 것은 결국 저처럼 결단력있는 영웅들에 의해 발전하는 것 아니던가요?
존경하는 재판장님...
한마디만 해주십시요... 제가 과연 유죄인가요? 제가 정말 죄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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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막, 장, 대사 라인은 shakespeare-navigator.com의 번호를 참조했습니다. 즉, (III, iii, 36)은 제3막 제3장의 36번째 줄의 대사를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