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혹시 로젠크랜츠와 길던스턴을 기억하시나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읽다 보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목숨을 잃습니다. 클로디어스 왕, 거트루드 왕비, 그리고 햄릿과 검술 시합을 했던 레어티스는 물론이고, 레어티스의 아버지인 폴로니어스, 레어티스의 여동생 오필리아도 목숨을 잃죠.
물론 이 모든 죽음이 햄릿 혼자만의 탓은 아니겠지만, 혹시라도 저승에서 햄릿에 대한 재판이 열린다면 과연 어떤 이야기들이 재판정에서 오고 갈까요? 한번 상상해봤습니다. ㅎㅎ
자... 다 같이 형사 법정으로 입장해보실까요?
제목 : 햄릿의 재판
제1막 제1장
[재판정의 피고인석에 햄릿이 앉아 있고 절친한 친구인 호레이쇼가 그 옆에 앉아 있다. 검사석에는 비교적 젊은 검사가 한껏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방청석에는 클로디어스 왕, 거트루드 왕비, 폴로니어스, 레어티스, 오필리아, 로젠크랜츠, 길던스턴이 앉아 있다. 재판장과 배석판사 2명이 입장하여 착석한다]
재판장 : 네. 사건번호 '엘시노어지방법원 1601 고합 123'... 피고인 햄릿 사건 재판 시작하겠습니다. 피고인 앞으로 나와서 잠깐 서 계세요.
[햄릿. 법대 앞에 나와 선다]
인정신문 하겠습니다.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햄릿 : 햄릿입니다.
재판장 : 피고인에게는 진술거부권이 있습니다. 일체의 진술을 거부할 수도 있고, 개개의 질문에만 답변 거부할 수도 있어요. 이 법정에서 진술한 것은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신분증 제출하세요
[법원 실무관, 햄릿이 제시한 신분증을 법대에 앉아 있는 재판장에게 전달한다]
재판장 : 주민번호 앞자리 말해보세요.
햄릿 : 710423입니다.
재판장 : 직업이 뭡니까?
햄릿 : [짧게 한숨을 쉬고] 덴마크 왕국의 왕세자(I, ii, 109)입니다. [클로디어스 왕을 손으로 가리키며] 내 아버지의 왕위를 찬탈한 저 더러운 독사(I, v, 39)의 조카이자 동시에 아들(I, ii, 64)이기도 한 저주받은 운명이죠. 같은 조부모에게서 갈라져 나왔지만 같은 종류의 인간은 아닙니다(I, ii, 65)
재판장 : 사는 곳이 어딥니까?
햄릿 : 감옥 같은 덴마크(II, ii, 251), 엘시노어 성에서 거주합니다.
재판장 : 등록기준지가 어디죠?
햄릿 : 등록기준지가 뭐죠?
재판장 : 본적이 어디냐고요.
햄릿 : 엘시노어성입니다.(I, iv, 14)
재판장 : 주소 바뀌면 법원에 잊지 말고 신고해야 합니다. 주소변경을 신고하지 않으면 피고인 없이 재판할 수도 있습니다. 앉으세요.
[재판장, 클로디어스 왕을 포함하여 다수의 피해자와 목격자가 재판정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한다]
검사님. 오늘은 첫 공판일이고 증인신문도 없는데, 저분들은 왜 다 출석해 계신 거죠?
검사 :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억울함을 좀 설명하고 싶다고 간청하면서 출석을 희망했습니다.
재판장 : [짧게 한숨을 쉰다] 하아.. 일단 알겠습니다. 검사님. 공소사실 요지 진술하세요.
검사 : 네. 재판장님. 피고인은 지난 10월 16일 21시경에 엘시노어성내 소재하는 거트루드 왕비의 내실에서 왕비와 대화를 나누던 중, 숨어서 엿듣고 있던 폴로니어스를 칼로 찔러 그 자리에서 살해하였습니다(III, iv, 25).
오필리아 : [흐느끼기 시작한다] 오.. 아버지. 당신을 차가운 땅에 묻는다 생각하니 눈물을 멈출 수가 없네요.(IV, 5, 69)
검사 : 또한, 레어티스와의 검술 시합 도중 클로디어스 왕을 독이 묻은 칼로 찌른 후(V, ii, 322) 그에게 독이 든 술잔을 억지로 마시게 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였습니다(V, ii, 327). 그리고, 연인이었던 오필리아에게 극심한 정서적 학대를 가하여(III, i, 121) 자살을 교사했다는 것이 공소의 요지입니다. 이상입니다.
레어티스 : 오 가련한 나의 동생. 익사하고 말았어(IV, Vii, 185)
[배석판사 1, 공소장을 유심히 읽다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당황한다. 공소장의 앞뒤를 계속 넘겨 본다]
재판장 : 피고인, 공소장 부본 송달받았죠?
햄릿 : 네.
재판장 : 변호사님. 공소 사실 인부하세요.
배석판사 1: [다급하게 재판장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재판장님. 피고인의 살인교사 혐의가 지금 공소장에 빠져있는 거 같습니다. 검찰 측에 확인해봐야 할거 같은데요.
재판장 : [배석판사1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뭐라고요? [공소장을 넘겨본 후 햄릿의 살인교사 혐의가 빠진 것을 확인한다] 변호사님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검사를 매섭게 노려본다] 검사님. 지금 피고인의 살인교사 혐의가 공소장에서 누락된 거 같은데요? 피고인이 클로디어스 왕의 편지를 위조하는 바람에 영국에서 살해당한(V, ii, 371) 피고인의 어릴 적 친구 2명... 아... 그 피해자들 이름이 뭐였죠?
검사 : [당황하여] 아.. 네. 재판장님. 그게.. 그 두 사람은... [허겁지겁 서류를 뒤진다] 아. 길던크랜츠와 로젠.. 아.. 죄송합니다. 길던스턴과 로젠크랜츠입니다.
재판장 : [어이없다는 듯] 검사님. 공소장에 혐의 사실 누락한 것도 모자라서 피해자 이름도 까먹은 거예요?
검사 : 재판장님. 송구스럽습니다. 법원이 허락하신다면 공소장을 변경하고자 합니다.
재판장 : 어떻게 일을 했길래 이렇게 기본적인 것 하나도 챙기지 못합니까? 하아.. 나참.. 검찰 측에서 피의자의 살인교사 혐의를 추가하는 취지로 공소장을 변경한 이후에나 공소 사실에 대한 인부가 가능한 것으로 판단되므로 금일의 공판은 여기에서 마무리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당황한 방청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공소사실 인부와 증거목록 인정, 증인신청 등의 추후 절차는 다음 기일에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재판은 11월 16일 오후 2시입니다. 폐정합니다.
[재판부가 법정을 빠져나간 후, 어리둥절한 방청객들도 뒤를 따르고, 슬픔에 빠진 오필리아를 레어티스와 폴로니어스가 부축해서 퇴장한다. 책상에 허탈하게 앉아 있던 젊은 검사도 서류를 챙겨 재판정을 빠져나간다. 길던스턴과 로젠크랜츠만 제외하고 전원 퇴장]
길던스턴 : [격앙된 목소리로] 자네도 봤지? 심지어 검사 양반도 우리의 이름을 기억 못 하고 있어. 이런 개죽음이 또 어디에 있겠나?
로젠크랜츠 : [퇴장한 검사가 흘리고 간 공소장 서류를 집어 들고 천천히 훑어본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 왕자님은 피고인석에 앉아 있고, 우리는 여기에 앉아 있고... 왕자님은 우리 둘을 훌륭한 친구라 부르고 환대해주셨고(II, ii, 224 & II, ii, 273) 신사답게 대해주셨는데(III, i, 11)... 어쩌다 왕자님과 우리들 사이가 이렇게 된 것이지?
길던스턴 : 뭐? 친구? 나참. 자네는 억울하지도 않아? 우린 그저 햄릿 왕자가 왜 정신이 이상해졌는지를 염탐하라는 클로디어스 국왕의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야(II, ii, 15). 신하로서의 의무를 수행한 것에 불과하다고. 그런데, 그 이유 때문에 죽임을 당한 거야. 단물만 쭈욱 짜내고 버리는 스펀지처럼(IV, ii, 19) 버려졌지.
[짧게 한숨을 쉰다] 하아... 왕자님은 우리가 클로디어스 왕의 명령을 받아 본인을 감시하러 온 것을 일찌감치 눈치채셨고(II, ii, 292), 나에게는 '나를 피리처럼 만지작거릴 수는 있겠지만 나를 연주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지(III, ii, 372). 그때 왕자님의 서늘한 얼굴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 결국 왕자님은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던 거야.
로젠크랜츠 : 반면에, 우린 아무것도 몰랐던 거지. 왕이 우리에게 쥐어준 편지가 '영국 땅에 도착하자마자 햄릿 왕자를 죽이라'라고 영국 왕에게 요청하는 내용(IV, iii, 65)일 줄도 몰랐었지. 그리고 편지의 내용을 알아차린 왕자님이 자기 대신에 우리 둘을 죽이라고 편지를 위조한 사실도 몰랐지. 순진한 우리들은 그 위조된 편지를 영국 국왕에게 전달해줬지(V, ii, 49). 우리 스스로의 손으로 우리 둘의 목숨을 벼랑끝으로 밀어버린 셈이지. 결국 우린 철저하게 이용만 당했어. 두 명의 절대권력이 무섭게 싸우는 한 복판에 운 나쁘게 끼어든 미천한 목숨이었을 뿐이야(V, ii, 60).
길던스턴 : 어서 가세. 가서 탄원서가 되었던 청원서가 되었던 뭐라도 써보세... 양쪽에서 이용만 당하고 비참하게 죽은 이 신세를 어디에라도 하소연해야만 내 심장이 터져버리지 않을 거 같네..
[로젠크랜츠와 길던스턴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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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각 막, 장, 대사 라인은 shakespeare-navigator.com의 번호를 참조했습니다. 즉, (V, i, 161)은 제5막 제1장의 161번째 줄의 대사를 의미합니다.
(2) 셰익스피어 연극에 익숙한 독자들도 햄릿에 등장했던 로젠크랜츠와 길던스턴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 1948년에 영국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가 감독/주연한 영화 햄릿에서는 이 두 캐릭터가 통째로 잘려나가기도 했죠. ㅠㅠ 햄릿에서 가장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것도 모자라 완전히 잊혀진 이 2명의 캐릭터가 너무 불쌍해서였는지, 영국 극작가 톰 스토파드(Tom Stoppard)는 이 둘을 주인공으로 한 연극을 만들기도 했고, 1990년에는 이 연극을 기반으로 영화도 만들어졌습니다. 제목은 'Rosencrantz and Guildenstern are dead'입니다. 주연중 한 명이 전설적인 배우 게리 올드먼입니다..ㅎㅎ 유튜브에 영화 전체가 무료로 공개되어 있으니 한번 보세요. 그냥 보셔도 재미있기는 합니다만, 연극 햄릿의 대사, 특히 햄릿의 독백과, 햄릿이 이 2명과 나누는 대사에 대해서 좀 익숙해지신 상태에서 보시면 정말 그 재미를 120% 느끼실 수 있습니다...
(3) 햄릿이라는 연극은 12세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셰익스피어에 의해 희곡 자체가 쓰여진 시점은 1601년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결국 햄릿의 나이가 30세(V, i, 161)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1571년생이라고 가정하여 주민등록번호를 적어봤습니다. 햄릿의 생일은 셰익스피어의 출생일로 추정되는 4월 23일을 좀 빌려왔습니다. ㅎㅎ
(4) 형사법정은 고사하고 경찰서에도 한번 안 가본 제가 어떻게 하면 현장감 있게 형사법정을 묘사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인터넷을 열심히 뒤져서 형사법정의 재판 순서를 공부한 후 이번 글을 작성하기는 했습니다만, 혹시라도 형사법정의 재판 진행 절차에 대해서 좀 더 정확한 지식을 알고 계신 분이 댓글로 수정이 필요한 사항 알려주시면 그걸 반영해서 글을 좀 더 다듬어 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미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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