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나마 전하는 감사의 인사…
한국에서 별다른 감흥 없이 (때로는 조금은 불만스럽게) 삼성전자 핸드폰을 쓰고, 현대자동차를 타고, 엘지 에어컨을 쓰던 사람들도 외국에 나가게 되면 조금은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된다. 낯선 이국 땅에서 우리나라 제품을 마주치게 되면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반가움과 자랑스러움이 생기곤 한다.
인디라 간디 공항에 내리자마자 우리 가족 눈앞에 나타난 삼성전자 핸드폰 광고, 하루가 멀다 하고 인도 내수시장에서 매출 신기록을 경신 중인 현대와 기아자동차, 그리고 인도 현지인들이 빼먹지 않고 칭찬하는 엘지의 가전제품들... 나는 이 회사들과 아무 연관도 없고, 주식 한 주 가진 바 없고, 내 성은 이씨도, 정씨도, 구씨도 아니지만, 현지 시장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제품들이 선전하는 것을 보고 들으면 기분은 좋다.
현대자동차와의 인연이라고는 지난 20년간 엘란트라, 아반떼, 산타페 이렇게 딱 3대를 사서 몰아본 적 밖에 없는 내가 지난달 말에 현대자동차의 인도 지역 본부 건물 준공식에 초대받아 참석하게 되었다. 인도에 진출한 지 25년 만에 인도 내수시장 2위를 차지한 현대자동차의 임직원들이 주인공인 자리였고, 주인도 한국대사, 인도 정부 고위 관료들, 현대자동차 협력업체들, 그리고 현대자동차 딜러들이 이를 축하하는 행사였다.
인도 최고의 배우 샤룩 칸에 이어 이미 글로벌 스타의 반열에 오른 BTS의 영상 축하 메시지가 이어지고 행사가 한창 최고조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인도에서의 25년을 돌아보는 영상이 방영되기 시작했는데, 유독 눈길을 끄는 사진 하나가 있었다. 바로 25년 전 인도 남부 첸나이에 현대자동차 공장을 처음 건설하던 때에 찍힌 두세 장의 사진이었다. 수십명의 현지인들 사이에 섞여 서있는 몇몇 한국 직원들... 아마도 25년 전에 인도에 최초로 파견된 제1세대 주재원들일 것이다. 낡은 사진 밖으로도 금방 느껴지는 인도 남부의 습하고 더운 열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양복을 입고 카메라 앞에 선 것은 착공식이라는 행사의 중요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2021년에도 1인당 GDP가 2,000달러 초반을 간신히 넘어서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인도인데, 무려 25년 전에, 그것도 싼 인건비를 쫒아서 찾아간 인도 남부 지역의 허허벌판이 얼마나 열악했을지는 나로서는 상상도 되지 않는다. 21세기 대명천지에도 어이없는 상거래 관행과 이해할 수 없는 인도 현지인들의 행동에 화들짝 놀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 당시에는 얼마나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했을까?
투자자금을 들고 자기 나라를 찾아온 외국인들로부터 합법적이던 불법적이던 한 푼이라도 더 돈을 뜯어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정부 관료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각종 이권 단체들과 압력 단체들... 게다가, 한국에서도 험하고 힘든 것으로는 치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게 건설업인데, 하물며, 인도 같은 곳에서 외국인이 그 큰 자동차 공장을 짓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 멀쩡하던 집과 건물도 녹아버릴 거 같은 무더위 속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일, 바로 그 엄청난 대장정을 시작하는 순간에 한국 직원들은 카메라 앞에 선 것이었다. 앞으로 닥쳐올 역경과의 싸움을 앞에 두고 전투에 임하는 전사의 표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듯 보였다.
약 1시간 넘게 진행된 준공식이 끝나고 직원의 안내를 받아 건물을 둘러볼 수 있었다. 서울이나 판교 한복판에 서 있어도 전혀 이질적이지 않을 것 같은 초현대식 건물에 말끔하게 정돈된 실내 공간까지 보고 있자니 나라도 당장 자리에 앉아 근무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우리를 데리고 건물 구석구석을 안내하는 회사 직원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겸손했지만, 당당한 태도에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자부심은 결코 밉지 않았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이 힘든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방인으로서 오히려 감사하고 자랑스러울 따름이었다.
25년 전에 그 더운 날씨에 굳이 양복을 입고 카메라 앞에 섰던 그 직원은 자신의 회사가 언젠가는 인도 내수 시장 2위라는 엄청난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는 걸 예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생활이 아닌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여야만 했을 그 당시에 그 직원을 그리도 힘차게 움직이게 했던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저 로보트마냥 주인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머슴의 정신'이었을까? 살인적인 근무환경을 묵묵히 참아내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던 '노예근성'만으로 이 모든게 설명될 수 있을까?
끝없이 이어지던 야근과 감정착취, 그리고 개인을 무시하던 군사주의적 분위기까지.. 사회초년생 시절 젊은 나 역시 조직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불합리함에 꽤나 많이 힘들어했었다. 그리고, 지금의 이 시대에서는 이러한 불합리함이 어서빨리 고쳐지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그러나, 고칠 것은 고친다 하더라도, 그 힘든 환경 속에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갔던 개인들의 노력은 존중받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한다. 그들이 과거에 태어났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불합리와 부조리가 난무하는 나라에서 직장 생활을 보낸 것은 그들의 잘못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 들은 이 힘든 땅에 다름아닌 그들의 인생을 심었다. 그리고, 그 작은 나무가 온갖 폭풍우를 견디고 25년이 지난 지금 이렇게 큰 과실을 맺었다. 그것만으로도 박수 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언젠가는 짤리고 회사는 망하고 우리는 죽는다'는 말이 멋진 말이라고 칭송받는 게 요즘의 세태이다. 월급 받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더 일하면 바보 소리 듣는 시대, 회사의 성장이 나의 성장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거의 구석기시대 인간으로 취급하는 시대, 하늘이 두쪽 나도 회사 일은 딱 시키는 만큼만 하고 '나머지 시간은 오롯이 나만을 위해서 살겠어요'라고 외쳐야만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의 '좋아요'와 구독자가 늘어나는 지금과 같은 시대... 이런 시대에 내 눈앞에 나타난 그 오래된 사진 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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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사진 속 주재원들에게 늦게나마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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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글쓴이가 직접 찍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