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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도호도 Aug 17. 2022

대놓고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로 하였다

제주살이 0일차 2022년 7월 31일

나는 짐을 잘 싼다. 필요한 물건만 쏙쏙 골라 챙기고 그것들을 차곡차곡 정리해서 캐리어에 압축하는 것도 잘한다. 다수의 여행(겸 떠돌이 생활)으로 얻은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래 있을 심산으로 떠날 땐 일부러 집에서 계륵인 물건들을 싸들고 나간다. 그래야 떠날 때 다 버리고 가볍게 이동할 수 있다. 얼마 전 기숙사에 입실하면서 근 4년간 사용해 본전을 뽑고도 남은, 보푸라기 가득한 이불을 가져갔었다. 그리고 퇴실할 때 버리려 했는데… 넌 왜 아직도 계륵인 거니... 다른 친구들은 쓰레기로 다운그레이드가 되었잖니!


결국 근처 사는 친구 자취방에 버리기로 기증하기로 하였다. 이불도 싸는 마당에 버리려 했던 물건들도 친구가 필요할까 싶어 바리바리 싸들고 기숙사에서 나왔다. 아뿔싸, 택시가 잡히지 않았다.


이불과 잡동사니가 가득한 커다란 비닐봉지를 들고 버스 정류장까지 10분을 걸었다.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길이 이렇게 멀었던가. 버스를 기다리며 친구와 진지하게 이것들을 버리자고 상의하였다. 이 짐을 다시 들고 쓰레기장으로 가는 게 더 힘들 것 같다는 결론이 나왔다. 하는 수 없이 15분여를 기다려 버스를 탔고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친구 집까지 다시 10분을 걸었다.


계속 같은 자세로 짐을 들고 있으니 팔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얇아질 대로 얇아진 비닐봉지 손잡이가 내 손을 두 동강 내려하고 있었다. 편히 살려고 가져온 물건들이 말 그대로 ‘짐’이 되어 날 매우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앞으로 몇 년 간 떠돌이 생활을 계속할 터인데, 매번 이런 불편함을 겪기 싫었다. 그래서 앞으로의 짐꾸러미에 ‘침구’ 항목을 삭제했다.(담요 덮고 자던가 정 필요하면 거기서 사지 뭐.)


내일이면 제주도로 떠나는 날이다. 새 출발을 이렇게 무겁고 힘들게 시작하면 영영 바뀔 게 없을 것 같았다. 반성의 의미로 짐을 조금 더 줄이고 캐리어 문을 닫았다. 문이 다 안 닫히지 않아 지퍼를 제대로 잠글 수 없었다. 이럴 땐 다 방법이 있다. 늘 하던 대로 캐리어 위에 엉덩이로 깔고 앉아 지퍼를 잠갔다. 이상한 소리가 났다. 뭐지? 바지가 찢어졌나? 아니네, 캐리어가 터졌네…!


짐이 너무 많아서 캐리어를 망가뜨린 적은 처음이었다. 나름 스스로 미니멀리스트라고 생각했는데…(머리카락도 미니멀하게 깎고 말이지.)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이번엔 대놓고 미니멀리스트로 살기로 했다. 앞으론 이 작은 캐리어에 공간이 남아돌게끔 물건을 적게 소유하고 살 거다. 아니지, 캐리어가 필요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좋겠다.


(+) 내가 모으는 건 오직 돈과 근육, 지혜뿐이다.




기숙사에서 짐 싸다 말고 찍은 사진. 작은 캐리어에 아직 못 들어간 물건이 너무 많다.
터진 캐리어. 하필 바퀴 부분이 깨져서 조만간 캐리어를 바꿔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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