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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do Lee Nov 17. 2019

꽁냥꽁냥 연예 이야기 [양들의 침묵]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씨리즈 #2


대학시절 교양 수업으로 심리학을 택한 적이 있다. 전공이 아닌 '교양'심리학은 외부인들이 느끼기엔 흥미진진하기만 한 과목 이어서 수강인원은 폭발할 듯 많았고, 덕분에 마이크를 사용하는 대강당에서 수업이 이루어졌다. 물론 지금 그 수업이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정해져 있는 몇몇 작품에서 나타나는 인물들의 심리상태를 분석하여 리포트를 썼던 과제는 확실히 기억에 남았다. 왜냐하면 그 대상 작품들 중 [양들의 침묵]이 있었고 나는 그 소설을 너무나 재밌게 읽었기에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심리를 나름대로 분석하여 대강당 강의실에서 당당하게 발표했기 때문이다. 물론 내 분석과 발표가 성공적이진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이 양들의 침묵에서 보인 뜨거운(?) 연예 심리에 대해서만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소설은 연쇄 살인마의 살인행각과 그 검거를 위한 인물들의 추적 행위를 주제로 보이게 장치해 놓았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엔 살인마의 범행 동기나 심리묘사는 렉터와 스털링의 연예 묘사에 비하자면 대단히 부실한 편이다. 오히려 소설은 내내 인간으로서 맛이 간 렉터 박사가 그러나 왜 매력적이며 그 망가짐에 당위성이 있는지를 은연중에 밝히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 좀 어이없게도 그런 렉터를 치유하고 보듬는 역할로 스털링을 두었다.


촌년이라 묘사된 (우리식으로 각색하자면 강한 사투리 억양을 감추려는 서울 말투를 사용하는 20대 초년생 수사관쯤 되겠다) 스털링을 세련된 렉터가 면박 주고 들었다 놨다 반복하는 동안 둘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형성된다. 여기서 렉터는 스털링이 어린 시절 촌구석에서 받았던 마음의 상처들을 전부 이해하고 그런 스털링에게서 연민을 느끼기 시작하며 동시에 큰 상처를 안고 있음에도 그것을 극복해 낸 스털링이란 존재에게서 자신이 구원-혹은 그 비슷한-것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스털링은 자신보다 몇 걸음은 앞서있는 렉터임을 인지 하지만 그딴 건 아무 상관도 없이 꿋꿋(...)하게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치며 말 그대로 사건+거지같은현실과 싸워 나간다. 그리고 그 와중 역시나 렉터가 가진 상처(...)를 간파하고 모종의 동질감 비슷한 감정을 갖게 되고 그런 두 사람의 감정은 남 보기에 부끄러울(적어도 내가 보기엔) 정도의 꽁냥 모드로 들어간다.


둘의 그런 확 달아오른 상태와 대비해 사실 연쇄살인마의 체포 여부는 별 긴장감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미 거의 메리 수에 가까운 렉터의 손바닥 안에 사건은 놓여있다는 것을 독자들은 알기 때문이다. 다만 약간의 긴박해 보이는 액션이 필요할 뿐이다.




내 발표가 끝난 후의 반응은 의외로(?!) 썰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말도 안 된다.'거나 '새로운 해석이다.' 뭐다 하는 얘기가 나올 법도 하다고 예상했는데 그런 것은 없었다. 강사 또한 무시무시한 범죄와 범죄자의 심리 같은 것을 분석해도 모자랄(?) 판에 이 소설을 굳이 연예의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느냐는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그 당시의 실로 미적지근한 반응에 나는 너무나 큰 아쉬움을 느꼈다. 아니 이런 러브러브 한 이야기를 어째서 범죄 스릴러로만 봐야 하는가? 하고. 지금 2019년에서는 더 깊이 들어가 작가는 그럴듯한 스릴러를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은 상처 받고 비뚤어진 사람들의 뒤틀린 사랑과 그것을 멋지게 보이게 하는 포장까지 하고 있는 변태가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든다. 


꽁냥꽁냥 파이널!


왜냐하면 후속 편 '한니발'은 정말 말할 것도 없이 렉터와 스털링의 기괴한(하지만 흥미롭게 잘 쓰인) 로맨스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소설을 파고 들어가 보자면 끝도 없이 쌓여 처치 곤란한 미국 사회의 인종문제와 지역문제, 성차별 문제 등등을 피부로 느끼게 되는데, 소설에서 가장 감미롭게 묘사되는 두 주인공간 로맨스의 완성 때문에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뒤로 넘겨져 버리게 된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소설 한니발의 최후에 묘사된 세련되고 생생한 두 주인공 최초의 만찬을 단순히 매력적인 존재들에 대한 찬사(?)로 볼 것이 아니고, 인간의 선악미추에 대한 작가의 독자들에 대한 도발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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