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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게바라 May 19. 2024

홍콩의 70%가 산이라니(4)

파커산 Tai Tam 저수지

홍콩에 처음 왔을 때는 정신적으로 복잡했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스트레스는 당연하고 회사에서의 나의 상황도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대학교 떨어졌을 때도 이랬던가? 줄 끊긴 부표처럼 파도 따라 흔들리며 될 대로 돼라 하는 심정이었다. 하루는 근무시간에 일 안 하고 행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 주말이 즐거워야 하고 그러려면 뭔가를 해야 했다. 안 해봤던 일일수록 좋다. 게다가 여기는 안 해본 거 투성이인 홍콩이 아닌가?


돌아오는 주말에 아침 일찍 일어나 책에 소개된 홍콩섬의 파커산을 갔다.  난이도 최하 수준이었지만 '오늘은 한 번도 안 해본 일만 할 테다!' 마음을 먹고 하루를 지내기로 했다.

안 가본 쿼리베이역에서 내렸는데 마침 전부터 가보고 싶었지만 귀찮아서 안 가봤던 '익청빌딩'이 근처에 있다. '아싸~횡재다'하고 산에 오르기 전 사진 한 장 찍으러 갔다

주민은 안 보이고 사진 찍는 사람들만 많다. '트랜스 포머'와 '쿵후허슬'의 촬영지. 홍콩스럽다고 해야 하나? 많은 홍콩여행객들은 이곳을 들려 사진을 찍는다. 드론도 띄우는 모양이다. 드론 촬영 금지 경고문이 크게 쓰여있다. 그건 아니지~~

대충 들러본 후 산에 올랐다. 산은 별 하나짜리 답게 많은 등산객들과 산책하는 동네 사람들로 붐볐다. 게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포장도로다. 급한 오르막은 없지만 꾸준히 올라간다. 지루할만하면 시내를 볼 수 있는 경치가 나왔고 강아지와 함께 올라가는 사람, 학생들, 동네 주민, 노인들도 있고 홍콩 거주민인 한국 사람들도 올라간다.  사람들과 같이 오르다 보니 사면에 낙서가 많다. 그중 전형적인 하트에 이름을 쓴 낙서. 사랑이 깨진 후 뒤늦게 와서 엑스자를 쫙쫙하고 그은 걸까?

아님 남자가 장난스럽게 쓰자 여자가 '야~하지 마' 하며 바로 지운 걸까?

 날씨가 좋아서 그렇지 올라가는 길이 계속되는 포장도로여서 그런지 등산하는 맛이 없다. 게다가 책에서 소개한 루트를 지나쳤지만 책 대로 가기엔 너무 빨리 끝날 듯 해 조금 더 올라가 볼까 하며 걷다 보니 갑자기 산 정상에 도착했다.

내려가는 길은 두 군데로 갈라져 있다. 어디로 내려가는지, 언제 끝나는지 모르겠다

오르는 내내 중간에 빠지는 길도 있고 갈래 길도 있었다. 사람들에게 휩쓸려 가다 보니 벌써 정상이었다. 더 오를 일이 없나 보다. 땀이 났고 가방은 무거웠고, 조금은 지쳤지만 쉬지 않고 올라왔다. 더 올라갈 수 있는데 갑자기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그래~뭐... 내려가야지... 내가 기대한 만큼 오르지도 못했고 내려가는 길도 어디가 맞는지 모르겠지만 어쩌겠어. 어찌 됐든 이제 힘들 일은 없잖아. 맘 편히 내려가자

생각이 바뀌어서일까? 몸이 편해서일까? 바람이 시원하다. 예전 어릴 적 추석연휴에 얇은 잠바하나 입고 밝은 햇살에 길을 걸으면 도시에서도 가을 냄새가 났다. 바로 그 느낌이었다. 여유롭게 걷다 보니 나비가 팔랑이며 눈앞을 지나간다. 또 걷다 보니 아름다운 Tai Tam 저수지가 나타났다. 커다랗고 조용한 저수지에 나무들이 비쳐서 보이는데 어지럽다. 조그만 저수지에는 시내 공원의 인공정원처럼 물고기가 유유히 헤엄친다. 빽빽이 우거진 숲을 멀리서 보니 호주의 블루마우틴이 생각났다. 1907년도에 지었다는 오래된 아치형 다리를 4개나 지났는데 고전적이다. 이렇게 좋은 길이었는데 오를 때는 왜 못 느꼈을까?

잘 올라오는 것만큼 잘 내려가는 것도 중요하다.

어차피 내려간다. 이렇게 즐겁게 내려온다면 중간에 혹시라도 또 오를 일이 있을 때 전처럼 힘들지 않을 것이다. 뭐... 다시 오르지 않아도 괜찮다

하지만 내리막도 결국 '으잉? 벌써 끝이라고?' 하며 갑자기 끝났다. 길의 끝에는 버스정류장과 택시들이 있었다. 너무 급작스러워 눈 한번 감고 떠보니 갑자기 현실세계로 온듯하다. 꿈이라도 꾼 거 같다. 별 하나 짜리, 난이도 최하, 초보코스를 산책하며 생각이 너무 많았다. 쑥스럽다.


이날 처음 혼자 안 타본 미니버스를 타고 역시 안 와본 chai wan에 내려서 처음 보는 식당에 한 번도 안 먹던 똠양구수, 버블 밀크티에 크림까지 얹어서 먹었다.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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