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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리 Apr 15. 2017

푸른 봄은 영원하지 않다

연령차별에 대한 단상

봄은 한순간이다. 두꺼운 겉옷을 정리하고 한결 가벼워진 옷차림으로 봄볕을 맞는 계절은 벚꽃처럼 금세 스러진다. 사람들이 봄을 사랑하는 이유엔 ‘덧없음’이 있다. 따뜻하고 아름답지만 금방 지나가는 계절은 그 순간밖에 누릴 수 없기에, 모두의 마음은 들떠있다. 순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가을을 거쳐 겨울이 도래한다.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 우리는 그것을 순리로 받아들인다. 봄이 지나감을 아쉬워할지언정 가을을 미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세월’이라는 순리에는 쉽게 순응하지 못한다.


자연에 봄과 가을이 있다면 인간에게는 젊음과 늙음이 있다. 봄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가을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젊음과 늙음은 그렇지 않다. 젊음은 칭송받고 늙음은 폄하된다. ‘젊어 보이신다’는 말이 덕담이 되고 다들 젊어지려고 노력한다. 어느 누구도 늙음을 좋아하진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나이 들었다는 것은 어느새 부끄러운 일이 됐다. ‘할배충’, ‘틀딱’과 같이 늙음이라는 속성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사람도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령화가 점차 심화되는 추세 속에서 ‘연령차별’ 문제가 두드러지고 있다. 장수와 노인 인구의 증가가 새로운 사회 현상이 됐지만 아직까지 노인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 방향에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청장년층에 의한 연령차별은 푸른 봄, 청춘(靑春)에 대한 긍정에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 아직 젊고 팔팔한 자신들이 지탱하는 사회에서 제 몫을 하지 못하는 노인들은 달갑지 않은 집단이다. 그들 시각에서 노인은 ‘병약함, 노쇠함’의 속성으로 일반화된다. 설령 개개인의 노인이 그런 속성에서 벗어나 있다 해도 그건 이미 고려 대상이 아니다. 연령차별은 노인을 개개인의 인간으로 인식하기보다는 ‘고령’이라는 카테고리에 묶어 낙인찍는다.


모순적이게도 이런 낙인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다. 사람은 모두 늙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인이 된 청춘들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상황에 대해 그들 자신을 탓한다. 불평은 그들을 ‘문제 있는 사람’으로 만든다. 라벨에 적힌 깨알 같은 글씨를 읽기 어려울 때, 지하철 입구에 끝없이 이어진 계단을 힘겹게 오를 때, 그들은 정확하거나 민첩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탓한다. 나이 듦에 대한 편견은 결국 자기혐오로 이어진다.


젊음이 누군가에게 주어진 상이 아니듯 늙음도 벌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연령차별은 자신 역시 나이들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데서 출발한다. 자신은 영원히 푸른 봄을 누릴 것이란 생각은 노인들을 전혀 다른 타인으로 상정한다. 하지만 푸른 봄은 덧없다. 계절은 막을 수 없고 그건 세월도 마찬가지다. 막을 수 없는 것에 대한 미움은 불행을 증폭시킬 뿐이다. 봄이 지나감을 아쉬워할지언정 가을을 미워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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