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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술호근미학 Sep 05. 2015

밀란쿤데라 의 변명,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역사 영화

무거운 독서, 가벼운 독서


대학교 2학년 2학기 독서토론 수업을 들을 때 였다. 수업은 조별로 모여 일주일간 읽은 책에 대해 토론하며 진행됐다. 교수님께서 정해주신 토론의 주제 책은 대부분 문학책이었다. 나는 스므살이 되기 전까지 문학책을 많이 읽지 않았다. 내가 읽은 책들은 만화책과 자기 계발서, 인문학책들이었다. 토론을 하며 읽게 된 문학책들은 대부분이 처음 접하는 책이었다.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이 기쁘고 황홀했다. 일주일간 열심히 책을 읽고 토론에 참여했던 기억이 난다.

토론은 재미있었지만 진행될수록 스스로에게 '나의 지성의 범위가 좁다'는 열등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토론을 하다보면 조원들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른 작품들을 인용하곤 했다. '000이라는 작가는 「00」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 했어' 그럴때마다 나는 그 000이라는 작가가 누구인지 「00」이라는 작품은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 친구는 주제책의 작가가 작품 속에 숨겨놓은 뜻을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래야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넓어지고 깊어진다고 했다. 언변이 가을날 노랗고 붉게 물든 산처럼 화려한 친구의 의견에 나만 빼고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언변이 잭슨 폴락의 그림처럼 화려하긴 한데 무슨뜻인지 전혀 몰랐다.


그 친구가 자신의 의견을 토론의 캔버스에 그릴때 나는 포스트잇에 책의 제목을 그려넣었다. 수업이 끝나면 바로 학교 도서관에 가서 그 친구가 이야기 한 책을 찾아서 읽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넓히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냥 그 친구가 하는 말을 나만 못 알아듣는 게 너무 부끄러워서였다.(지금 생각해보면 다들 아는 척 하고 있었던 거 같다.) 그렇게 읽게 된 문학들이 점점 재미있어졌다. 항상 숙제처럼 읽던 문학을 어느순간부터는 예습으로 읽었다. 손에 잡히는 문학책 하나를 집어 들어 아무 이유없이 읽었다. 지적 열등감 때문도 아니었고 그냥 읽고 싶어서, 재미 있어서 읽었다.


무거웠던 책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문학책을 고르는 기준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토론에서 언급되거나 교수님들이 추천해 주셔서 메모해 온 책이었고, 두 번째는 재미있어 보이는 책이었다. 재미있어 보이려면 제목이 쉽고, 책이 얇아야 한다. 「데미안」이라던지 「호밀 밭의 파수꾼」같은 책처럼.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던 중 밀란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발견했다. 일단 제목이 어려웠다. 참을 수 없는 존재가 가볍다고? 이게 무슨 뜻인지? 그리고 책은 두꺼웠다. 표지에는 수많은 눈을 가진 사람 둘이 키스하는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섬뜩했다. 읽고 싶지 않았다. 가볍다고 말하는 제목과 달리 책은 무거워 보였다. 그래서 그 책은 다시 책꽂이에 꽂았다.


얼마 전, 김영하의 책 「말하다」를 읽다가 그가 밀란 쿤데라를 좋아한다는 대목을 발견했다. 나도 모르게 대학생 시절 가졌던 지적 열등감이 살아났다. 그 사람은 누구지? 또 나만 모르는 건가? 밀란쿤데라를 읽어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Es muss sein) 서점에 가서 책을 찾았다. 그렇게 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읽게 되었다.


스토리


책의 화자는 어느 날 히틀러의 사진을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감격하고 만다. 그 사진을 보고 나니 이미 지나간 시절,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자신의 어린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치에 의해 가족들이 죽음을 맞이했음에도 히틀러의 사진을 보고 어린 시절의 좋은 추억들이 떠오르다니 아이러닉한 일이다. 자신도 모르게 히틀러와의 화해를 이룬 이 장면에서 '내 인생은 니체가 말하는 영원한 회귀가 아니구나, 참으로 가볍구나.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가볍다고만 할 수 없구나' 라는 인식으로부터 이 책은 시작이 된다.

책의 주된 내용은 주인공인 토마시와 그의 아내 테레자, 정부인 사비나, 사비나의 남자친구 프란츠의 이야기이다. (일단 관계부터가 초월적이다.) 작품을 읽어보면 토마시와 사비나는 비교적 자신의 삶을 가볍게 여기며 살아간다. 이성과의 성적관계를 맺는 것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적 신분의 변화도 그다지 신경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에 반해, 테레자와 프란츠는 무거운 삶의 끝을 보여준다. 그들은 개개인의 관계를 굉장히 중요시하고 그에 대해 고민하고 고통받는다.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지나쳐 과대망상에 빠지기도 한다. 이 네 명 이외에도 삶을 가볍게 삶을 사는 사람들과 무겁게 사는 사람들 몇 명이 작품에 등장한다.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이 공존하여 사는 모습 이것이 책의 주된 줄거리다.


속도감과 긴장감, 끊임없는 머리 굴리기


밀란쿤데라의 책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속도감이 있는 책이다. 현대 소설처럼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속도감은 아니지만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생각하게 함으로써 그의 책이 지루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작가는 작품에서 가벼움과 무거움, 직선성과 윤회성이라는 대비 되는 두가지의 주제들을 시간의 순서와 상관 없이 배열함으로써 독자에게 무엇이 더 옳은지에 대한 판단을 강요한다. 이렇게 어려운 책의 구조와 잠시도 쉬지 않는 이야기의 전개 때문에 독자는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수 없다.  게다가 판단을 내리는 것조차 쉽지 않다. 작가는 각각의 인물들의 개인적인 과거들을 상세히 기술한다. 그럼으로써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지?' 라고 생각했던 삶에 대해 '그럴수도 있겠다'라는 느낌을 받게 만든다. 내가 원래 맞다고 생각했던 가치의 벽이 허물어지고 다른 가치와 동등하게 저울질 되어 비교 된다. 어떤 가치가 더 옳은지에 대해 끊임없이 지적으로 노동을 하다보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게다가 밀란쿤데라는 명확하게 가벼움이 100% 가벼움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책의 서두에서 화자는 가벼움은 무거움을 가끔씩 원한다고 기술한다. 이 같은 그의 생각은 책의 내용에서도 드러난다. 가벼움의 대표격인 토마시는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투고기사를 작성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오이디푸스왕의 이야기를 곁들인 정치인 비방의 글이다. 토마시는 인생을 자신의 욕망과 우연으로 살아왔던 인물이다. 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래야만 했기에 의사가 되었다. 여자를 다양하게 많이 알고 싶은 마음에 수 많은 여자들과 잠자리를 했다. 그가 했던 과거의 선택 때문에 인생이 바뀔지라도 그는 연연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오이디푸스왕을 언급하며 사회를 비판했다는 것은 굉장히 흥미로운 일이다. 오이디푸스는 과거의 과오와의 화해를 거부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저지른 과거의 잘못에 대해 본인의 눈을 찔러서라도 과오를 망각하지 않고 인정했다. 그는 윤회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런 토마시의 모습은 완전한 가벼움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비단 토마시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무거움의 삶을 사는 프란츠와 테레자에게도 직선성의 성격이 가끔씩 드러난다.


영화 '프라하의 봄' 중에서

그럼 가벼움을 사는 사람이 무거움으로 변해가는 이야기인가? 이 질문에 밀란쿤데라는 '그건 아무도 모르지'라고 대답한다. 토마시가 투고 하였던 기사는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다. 그는 정부 당국에 위험인물로 판단되어 감시와 통제를 받게되며, 직업도 잃는다. 그런 것들 때문에 분노할 만도 한데 그는 분노하지 않는다. 토마시의 아들은 적극적 사회 활동참여를 위한 서명을 그에게 요구하지만 그는 끝내 아들의 요구를 거절한다. 그는 결국 가벼움을 선택한 것이다. 그가 서명을 거절한 이유는 대단한 이유에서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테레자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더 이상 경찰들이 테레자를 괴롭히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는 그의 선택이 올바르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원하는 것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사회적 책임을 도의한것처럼 보이는 토마시를 비난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가치였는데, 책을 읽어보면 과연 단순히 이렇게 무거움을 포기한 토마시를 비난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밀란쿤데라와 프라하의 봄

밀란쿤데라는 프랑스로 망명한다

밀란쿤데라는 일명 '프라하의 봄'을 겪은 인물이다. 프라하의 봄은 60년대 말 둡체크를 중심으로 체코의 독립성과 민주성을 확보하기 위한 독립운동 형식의 운동을 말한다. 이 프라하의 봄은 소련의 무력진압으로 꽃잎을 모두 잃게 된다. 이 사건동안 밀란쿤데라는 누군가는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누군가는 별 상관 없이 자신의 일상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에 대해 작가는 작품을 통하여 과연 이들의 잘잘못을 가릴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 작품을 통하여 삶의 가벼움에 대한 회의를 표현했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가벼운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변호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삶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님을 밀란쿤데라는 이야기 하는것 같았다. 그가 가벼운 삶(물론 100% 가볍다고는 할 수 없는)을 옹호한 것은, 아마도 밀란쿤데라 자신 또한 체코에 남아 소련과 항쟁하는 대신, 프랑스로의 망명을 택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체코 현지에서는 그를 '공산독재 정권 아래 신음하는 민족을 배반하고 프랑스로의 망명을 택한 작가'로 기억하는 체코인들도 상당수 있다. 그는 그가 원하는일, 그래야만 하는일인 글쓰기로써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드러냈다. 그렇게 그는 과거와 화해했다. 그렇지만 밀란쿤데라에게 있어 그 선택은 단순히 자신이 가볍게 사는 사람이기에, 사회적 문제에 참여하고픈 마음이 없어서는 아닐 것이다. 그는 가벼움은 '단순히 가벼운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흑백 논리를 좋아한다. 보수 아니면 진보, 참여 아니면 회피, 애국 아니면 매국. 이는 비단 사회뿐 아니라 개인에게도 적용된다. 개인의 사유와 활동, 철학을 이분법으로 나누어 버릴 때도 있다. 나와 다르면 일단 적으로 간주해버릴때가 있다.

독서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책을 읽을 때 쌓여가는 지식의 황홀함과 재미를 위주로 읽지만 누군가는 사회에 일원으로써 알아야만 하는 덕목으로써 책을 읽는다. 과연 무엇이 옳을까? 아니 무엇이 옳다고 물을 수 있을까?

사소한 다툼에서도 잘잘못을 따지고 있는 오늘 다른 사람의 입장으로 문제를 한번씩 바라볼수도 있는 여유를 가져봐야겠다고 느끼게 해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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