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동네책방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urquoise Jul 22. 2015

기묘한 목표를 향한 전력 질주

레벌루션 No.3 - 가네시로 가즈키

결혼을 하고 나니 집에 갑자기 책이 확 늘었다. 아내가 보던 책과 내가 갖고 있던 책들을 한 군데에 모아 놓고 보니 연애시절에 함께 산 책들은 두 권씩 나란히 꽂히는 경우도 꽤 있었다.

"이거, 자기가 읽던 책이야?"
"아니, 난 그 책 산 적 없는데? 오빠가 읽던 거 아니야?"
"글쎄, 나한테 이런 책이 있었나"

<레벌루션 No.3>는 우리 내외에게 이런 대접을 받으며 4년 넘게 안방 책장 한 구석에서 잠자고 있었다. 지나치게 요란한 겉표지와 그 자체로 자극적인 제목 덕에 주인 모두에게 사생아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이 녀석을 집어 들게 된 건 책장에 꽂힌 책들을 거의 읽었다 싶을 무렵, 새로 또 책을 사자니 이번 달 열악한 자금 사정에 왠지 좀 망설여지고, 그냥 있자니 뭔가 근질근질한 즈음이었다. 그만큼, 첫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가볍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원래 학원물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외면인지, 나보다 더 재미있어 보이는 학창시절에 대한 질투인지, 아직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줄기차게 구입해다 보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중에서도 학원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만큼은 제대로 읽지 않고 처박아 놓는 걸 보면 '개취'의 방향성은 확고한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레벌루션 No.3>는 이단아라 할 만하다. '학원물 포비아' 수준이 아닐까 싶은 독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 놨다 하며 읽게끔 했다는 자체로 박수를 쳐주고 싶다.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서 읽다 나도 모르게 킥킥거리고 싶은 기분은 개인적으로 무척 생경했다. 침대 맡에 엎드려 보다 주책 맞게 갑자기 가슴이 울렁거리며 코 끝에 묘한 기류가 느껴지는 경험도 실로 오랜만이었다. 정신연령이 딱 이 소설 주인공 정도이기 때문인 것도 같지만 아무튼, 이렇게 '완전 내 스타일'인 소설을 여태 푸대접했다는 게 이제 와서 새삼 미안해진다.


가네시로 가즈키의 명성 그대로, <레벌루션 No.3>는 건조하다. 남고생 집단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자체로 벌써 퀘퀘한 냄새가 나기도 하지만, 문체 자체가 일반적인 소설이라고 보기에는 약간 드라이한 느낌이 강하다. 가네시로 가즈키는 등장인물의 감정을 묘사할 때, 작가가 모든 어휘를 동원해 인물의 모든 걸 치장해버리는 '전지전능한 짓'을 절대 좋아하지 않는  듯하다. 그저 짧고 간결하게,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주변 환경을 언급하면서 행간을 벌려 놓는다. 독자로 하여금 나머지 공간을 채우고 느끼라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작업이었을지, 이제서 가네시로 가즈키 소설에 입문한 자로서는 경이롭다고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반면, 조금 더 '긁어 줄' 수도 있었을 것을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라는 듯 간명한 은유로 대신하는 것을 보면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슬쩍 부아가 치밀기도 한다.


<레벌루션 No.3>의 성격을 단연코 잘 드러내는 부분은 소설의 앞쪽 파트다. (뒤쪽 파트 역시 흥미롭지 않은 건 아니지만 뒤로 갈수록 왠지 추리소설의 향기가 나기에 추리 전문 작가 소설 같은 '대체제'가 충분하다는 점에서 약간의 감점) 생물 선생의 한 마디에 더 좋은 유전자 파트너를 찾겠다는 발상 자체가 딱 그 나이 즈음에 할 수 있는 '생뚱 맞은' 사고인데다, 밑도 끝도 없이 매년 여학교에 쳐들어 간다는 '메인 이벤트' 자체도 신선했다. 어쩌면 이런 걸 쓸 생각을 했나 싶다가도 머리가 한참 크고 있을 남자 고교생이라면 가능하겠구나 싶은 것이다. 어른이 되고 나서 책 속의 그들을 바라보니 앞날에 대한 고민만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아 조바심이 나는데, 올해에는 어떤 작전을 펼쳐야 할지, 어떻게 해야 의미 있는 '침공'이 될지 고민하는 '더 좀비스'의 모습은 어느 샌가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내 안의 고교생을 깨우고 있었다. 출근길 지하철이라는 매우 현실적인 배경을 비집고 서있던 내게 이들의 '질주'는 잠깐 동안 비현실적일 수 있었던 쉼표였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가 결말을 향해 질주하는 과정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아니, 너무 '그럴 법하게' 묘사를 해둔 탓에 읽는 중간중간 이게 소설이며 누군가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걸 잊을 정도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면서도 그 과정은 이처럼 생생할 수 있다는 패러독스가 이 소설이 독자를 '들었다 놓을' 수 있는 힘이 아닐까.


아, 잠깐, 우리 오줌 누자


비 오는 옥상에서 김이 폴폴 나는 오줌을 철망에 갈기며 웃겨 죽겠다는 친구들. 이 부분은 <레벌루션 No.3> 안에서 일어난 '패러독스' 중 한 장면이다. 책을 덮고 나서도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씬이기도 하다. 그리고 작가가 '너무 그럴 법하게' 묘사한 장면 중 개인적으로 가장 크게 공명했던 부분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친구와 그걸 지켜볼  수밖에 없는 주인공이 등장한 순간부터 나는 이 씬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궁금했다. 잘 해야 쥐어짜는 감동, 잘못하면 엄청 유치한 신파극이 되지 않을까. 가네시로 가즈키는 이런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생각지도 못한 하드보일드로 짧고 굵게 씬을 마감해버린다. 죽음을 앞둔 남자 고교생과 친구 사이에 우정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 중에 이만한 게 있을까 싶을 정도. 남자 고교생이라면, 아니 그냥 남자라면 히로시와 주인공이 빗 속에서 나누는 대화 장면이 무얼 얘기하고 있는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 작가라는 사람들이 전부 이 정도로만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면 언어영역 시간에 선생님이 이건 뭘 의미하는 거라고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될 텐데. 그 옥상에서의 한 씬은, 그 많은 사람들이 왜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을 좋아하는지 를 담담하게 일러주는 장면이라고 밖에 평가할 수 없을 것 같다.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작가는 타인의 입을 빌려 마침표를 찍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춤추는 거야,라는 패기와 약간의 무모함으로.

글쎄, 무슨 일이 없어도 춤 따위는 멈춘지 오래라. 이 말이 내 가슴을 울리긴 했지만, 왠지 좀 성질이 났다. 4년 동안 책장에 꽂혀 있는 걸 내 책이 아니라며 두고 보기만 했는데. 혹시 이 책을 몇 년만 더 빨리 읽었더라면 지금의 내 모습은 확 달라져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왜 이제야, '춤추는 방법'도 가물가물해져 가는 지금에서야 뒤늦게 가슴에 불을 지르는 건지, 애먼 작가를 원망하게 된다. 그래도 굳이 <레벌루션 No.3>의 기억을 놓치고 싶지 않은 이유는, 어쩌면 생활에 착실하게 길들여진 '아저씨'에게도 남들 보기엔 쓸데없고 기묘하지만 '춤추는' 것처럼 즐겁게 전력 질주할 수 있는 잠깐의 여유가 올 것 같은 설렘일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밀란쿤데라 의 변명,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