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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술호근미학 Dec 24. 2019

세차만 하면 비가 오더라

세차를 하다가 느낀 자아정체성

나에게는 징크스가 있다. 이상하게 내가 세차만 하면, 비가 오거나 눈이 온다. 나는 셀프 세차장에 가서 직접 내 손으로 세차를 한다. 자동 세차장을 이용하거나, 손 세차장은 이용하지 않는다. 아마도 내 첫 차를 미국에서 샀고 혼자서 세차하던 버릇이 있어서 그런가 보다. 

혼자서 세차를 진행하면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자동차의 외부를 물과 거품으로 닦아내고 수건으로 물기와 얼룩까지 제거해야 한다. 내부에 있는 발판과 의자 사이사이의 먼지들도 청소기로 말끔히 청소한다.

공을 들여 청소했는데, 또 비가 와서 더러워지면 헛수고를 하진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세차하는 이유는 '더러워진 내 차의 모습이 아닌, 본래 깨끗한 차의 모습을 보고 싶은' 욕구 때문일 것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차이기에 그것이 더럽혀지는 것이 싫다. 또한 그 차는 결국 내가 탈 차이기에 깨끗한 차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내 시간과 돈과 노력을 들여서라도 다시 세차를 한다.

얼마 전 '배성재의 텐'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신과 함께라는 코너를 진행하는 것을 들었다. 그 날의 주제는 여신과 함께였고, 게스트로 안젤리나 다닐로바를 초청했다. 안젤리나 다닐로바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러시아 출신의 모델이다. 라디오 진행자는 안젤리나에게 '한국의 차들은 검은색, 회색, 흰색 등의 무채색이 많은데, 러시아에는 차 색깔이 다양하다고 하더라. 그 말이 사실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에 안젤리나 다닐로바는 이렇게 대답했다. 


"러시아에는 갈색 차들이 많아요. 겨울에 눈이 자주 오니까 사람들이 세차를 자주 안 하는데, 덕분에 눈과 흙을 뒤집어쓴 차들이 갈색으로 보여요."


본래 러시아 차들의 색은 아마도 다양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젤리나 다닐로바가 기억하는 러시아의 차 색들은 갈색이다. 눈과 흙을 뒤집어쓴 차의 차주들은 아마도 자신의 차가 무슨 색으로 보이든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다. 그런 차들을 보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차 색이 빨갛건 파랗건 간에 갈색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비싸고 좋은 차를 가지고 있거나, 귀중한 사람이 타는 차라면, 눈이 오건 비가 오건 그 차를 깨끗하게 유지하려고 노려할 것이다. 아마도 안젤리나 다닐로바도 러시아 대통령이 타는 차 또한 눈과 흙이 뒤덮인 갈색 차라고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밖으로 보이는 모습이든, 내부의 모습이든, 엔진룸의 모습이 든 간에 차의 차주는 최대한으로 깔끔하고 안전하게 정비할 것이다. 

누구든지 자아 정체성이 있다. 하지만 그 자기 정체성은 정말 천차만별이다. 누군가는 환경으로 뒤덮여 본래의 모습이 아니게 되더라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렇기에 환경이 자신을 지배하든,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누군가는 그러한 환경들을 계속해서 만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고귀하게 여기며 매 때마다 자신을 뒤덮은 환경들을 씻어내려 노력한다. 그들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있으며 그 모습을 지켜내고자 끊임없이 싸운다.

나 또한 환경에 꽤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어떠한 때에는 진흙탕 속을 구를 때도 있다. 그렇게 한바탕 구르고 나면 내 모습은 온통 진흙으로 뒤덮여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모습이 아닌 진흙을 뒤집어쓴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다. 나는 그것이 원래 내 모습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리고 진흙을 뒤집어쓴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스스로를 씻는다. 언제 다시 또 넘어져서 진흙을 뒤집어 쓸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내 모습을 알기에 오늘도 그것들을 씻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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