툴르즈 로트렉의 그림은 왜 가치가 있을까? 툴르즈 로트렉은 벨 에포크 시대를 대표하는 후기 인상파 화가 중에 한 명입니다. 그의 명성에 비해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였는데, 이번 예술의 전당 전시를 통해 한국 관객들에게 그의 작품이 소개됩니다.
1. 같은 매춘부를 그렸는데 왜 로트렉의 그림만 사랑받을까?
로트렉의 대다수 작품들은 같은 시기의 고흐나 르누아르, 앙리 마티스 등 대중에게 잘 알려진 인상파 화가들이 그린 전문 모델이나, 자연 풍경들과는 조금 다르게, ‘캬바레의 댄서, 창녀, 샹송 가수, 술 취한사람들’ 등의 유흥가가 밀집해 있는 몽마르트의 사람들을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다른 화가들과는 색다른 대상들을 그렸기 때문에 그가 유명해진 것일까요? 사실 로트렉이 그리는 대상들이 희귀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루이스 르그랑의 그림
당시에는 무희나 매춘부 여성들을 동물적으로 그리거나, 의도적으로 에로틱하게 표현하고, 이를 성적으로 상품화 해서 부르주아나 귀족 남성들이 오락으로 즐겼습니다. 그래서 매춘부를 그린 그림들은 굉장히 많이 그려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하류 예술로 취급받았습니다. 하지만 로트렉의 그림은 달랐습니다. 같은 대상을 놓고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로트렉의 그림은 다른 그림들에 비해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여전히 사랑받고 있습니다. 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2. 부정당한 화가 툴루즈 로트렉
로트렉의 가족들
앙리 드 툴르즈 로트렉의 풀 네임은 앙리 마리에 레이몬드 드 툴루즈 로트렉 몽파입니다. 그는 1864년 프랑스의 알비 지방에서 군사 귀족 집안 툴루즈 로트렉 몽파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납니다. 로트렉은 부유한 집안 덕택으로 어릴 적에는 서커스, 경마, 사이클 등의 귀족 문화를 마음껏 향유했습니다. 하지만 13세, 14세 때 좌측, 우측 골반 뼈가 각각 부러지는 사고를 겪게 되고, 이로 인하여 성장판이 닫혀 더 이상 팔 다리가 자라지 않게 되는 장애를 갖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로트렉 집안은 당시에 근친혼을 하던 집안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는 병약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기는 비정상적으로 컸다고 합니다. 때문에 친구들은 그를 ‘삼각대’라고 놀렸다고 하네요. 아무튼, 로트렉은 두 다리의 성장이 멈추자 더 이상 자신이 즐기던 승마나 사이클 같은 귀족 스포츠들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취미인 그림에 몰두하게 됩니다.
로트렉은 이러한 외모 콤플렉스로 인해, 다른 귀족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그의 아버지조차 어디 가서 ‘툴루즈 로트렉’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로트렉의 장애를 못 마땅히 여겼습니다. 로트렉의 입장에서는 아버지나 귀족들 사이에 있을 때는 자신의 이름조차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것이었죠.
3. 로트렉을 인정해준 사람들
로트렉은 가족의 품을 떠나 18세 무렵 파리로 떠나게 되고, 그곳에서 마침내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게 됩니다. 첫 번째로, 그를 인정해 준 사람들은 바로 화가들이었습니다. 로트렉은 코르몽의 화실과 몽마르트의 카페, 캬바레 등에서 폴 세잔, 반 고흐, 에밀 베르나르, 폴 시냑, 조르주 쇠라, 에드가 드가, 르누와르 등과 친목을 갖게 됩니다. 수많은 화가들은 로트렉이 어떤 신체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족한 신체와는 다르게, 다른 이보다 넘치는 그의 재능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로트렉은 다른 화가 친구들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로트렉을 인정해준 사람들은 바로 몽마르트의 무희들이나 매춘부들이었습니다. 로트렉은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를 결혼 상대로 생각하거나 그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은 전혀 없었습니다. 물론 수잔 발라동이라고 하는 여 화가가 로트렉에게 청혼한 적은 있지만, 그녀는 수 많은 예술가들과 동거하고, 바람을 피우는 희대의 난봉꾼이었죠. 한 편에는 수잔 발라동이 몸이 쇠약해서 일찍 죽을 로트렉의 재산을 탐내서 그에게 접근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그에 비해, 몽마르트에 있는 무희나 창녀들은 돈만 주면 로트렉과 기꺼이 잠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몇몇은 진정으로 마음을 터놓고 그와 친구가 되었다고 합니다. 몽마르트에 이르러,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게 된 로트렉은 그 곳에 상주하게 됩니다. 그는 그 곳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로트렉에게 몽마르트는 단순히 성적인 쾌락을 얻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몽마르트의 있는 사람들은 로트렉을 장애인으로 생각하며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재능있는 화가이고, 돈이 많은 손님들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곳은 집안과 귀족사회에서 부정당한 로트렉을 로트렉일 수 있게 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같은 주제인 무희나 매춘부들을 그렸어도, 로트렉은 다른 화가들과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다가갑니다. 그렇다면 당시 다른 화가들과 로트렉의 그림은 어떻게 차이가 있을까요?
4. 성적 해소의 도구에서 인간으로
미셸 푸코
미셸 푸코는 그의 저서 『성의 역사 : 앎의 의지 』에서 18세기 후반 이후로 교육과 의학, 경제를 매개로 성이 개인적 차원의 문제이자 동시에 사회 전체의 문제로 확산되었다고 말합니다. 특히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의한 정신의학과 과학적 지식이 발달함에 따라 성적 욕망을 육체로 만들어내려는 노력들이 있었고, 결과적으로 사회 구성원 전체가 성적 육체를 부여받게 되었죠.
르누아르의 그림
하지만 성적인 육체가 사회의 이슈가 되고 있는 현실과는 모순되게, 수 많은 작품들에서 19세기 중산층 여성들의 성은 감추어지거나 배제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18세기 말 계몽주의자들이 주장한 '진정한 여성'의 개념이 이미 남녀 모두에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여성이란 도덕적이고, 정신적으로 남성들보다 우월하며, 억제할 수 없는 성욕으로 인해 사회적 무질서를 초래하는 남성에 대항해 이 사회를 순화시킬 수 있는 존재여야 했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유지하는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은 무엇보다 우선이며, 그 지위는 순결에 의해 보장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아내나 어머니는 성적인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고위한 정신성을 가지고, 고급문화를 즐기는 진정한 여성의 모습으로서 그려져야 했습니다.
루이스 르그랑의 그림
이와는 별개로 남성들은 자신의 성적 욕망과 육체에 대한 관심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장소로 매춘여성의 육체를 택하게 됩니다. 매춘 여성들에게는 진정한 여성상에 대한 기대를 품지 않아도 되고, 통제가 가능한 노동자들이며, 그들의 육체는 거래의 대상으로 사회적인 보호가 필요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화가들의 입장에서 이전에는 '여성의 몸은 자연'이라는 공식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여성의 몸을 아릅답게 표현했었죠. 특히 여신이나 성모 마리아를 그릴 때에는 무엇보다도 아름답고 우아한 여성성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화가들은 이 공식을 깨뜨리고, 단순히 여성의 육체가 성과 직결되는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그림들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제작자들이 하나 둘씩 생겨납니다. 그들은 판화 기술을 이용해 야한 그림들을 대량 생산해서 부르주아 남성들에게 판매하기 시작합니다.
Elles 표지
당시 잘나가던 석판화 화가였던 툴루즈 로트렉에게도 에로틱한 석판화집 제작의뢰가 들어옵니다. 1896년 화상이자 희귀 서적 취급자인 귀스타브 펠레는 로트렉에게 당시 유행했던 일본 목판화 우키요에의 춘화집과 같은 형식의 화집을 내자고 제안합니다. 귀스타브 펠레는 에로틱한 그림을 가장 잘 그릴 수 있는 사람은 로트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럴만도 한 것이 로트렉은 당시에 이미 매춘부들과 같이 살다시피 했습니다. 또한 로트렉은 일본 에도시대의 고급 매춘부들의 노골적인 성 행위를 묘사한 우타마로, 하루노부, 호케이 등의 춘화집을 소유하고 있었고, 이에 대해 친구들에게 항상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거대한 성기를 가지고 있는 장애인 화가가 매춘부들과 동거하고 있고, 그가 모으는 그림들은 먼 나라 일본의 에로틱한 춘화집이었습니다. 귀스타브 펠레의 눈에는 로트렉이 어느 누구보다도 변태적이고 더 에로틱한 그림을 그려낼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로트렉에게 '매춘부(La Fille)'라는 이름의 판화집을 의뢰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로트렉의 완성작을 받아본 귀스타브 펠레는 실망하고 맙니다. 로트렉이 그린 매춘부들의 모습은 전혀 에로틱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로트렉의 그림은 매춘부들을 상징하는 물건들이 아니면, 그냥 평범한 여자들의 모습이었었습니다. 귀스타브 펠레가 예상한 것은 섹스를 하고 있는 모습인데, 로트렉이 그림 여인들의 모습은 목욕을 준비하고, 잠을 자고, 거울을 보고 있는 등의 평범한 모습이었습니다. 젊고 아름다운 몸매를 가진 여인들이 아니라, 나이 들고 뱃살이 늘어난 여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완전히 그의 예상을 빗나간 것이었죠. 그리고 로트렉은 판화집의 이름을 '그녀들(Elles)'로 바꾸지 않으면 판화집을 절대로 출간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로트렉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고 인정해 주는 몽마르트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보니, 이들이 단순히 '성적 욕망의 해소 대상'이 아닌, '그냥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거죠.
이것이 바로 로트렉의 그림이 지금까지도 사랑받게 만들어준 이유 중의 하나였습니다. 당시의 여성상은 이원화 되어 있었죠. 진정한 여성상과 성 요구 해소의 도구들로요. 그리고 그 도구들은 무희나 매춘부 등 하위 계급의 여성 노동자들이었습니다. 로트렉은 이들을 부르주아 남성들의 눈요기로 그리지 않습니다. 로트렉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관찰한 모습들을 그립니다. 그의 그림들은 사회와 역사가 규정해놓은 매춘부라는 편견과 선입관이 아닌, 툴르즈 로트렉이라는 사람이 받아들이고 관찰한 객체로서의 여성이었습니다. 이것이 같은 대상으로 그림을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툴루즈 로트렉의 그림이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5. 관찰자였지만 구원자는 아니었던
로트렉의 어머니
그렇다고 툴루즈 로트렉을 여성 인권주의자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매춘부들의 모습을 일상 여성들과 동일한 모습으로 그림으로써, 한 쪽으로 보면 매춘 여성들의 지위가 올라간 것처럼 보이지만 한 쪽으로는 귀족 여성들의 지위가 낮아진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죠. 외모적인 이유로 로트렉을 거부했던 귀족 여성들에게 '자 봐라. 매춘부들도 너희와 똑같은 존재야' 라고 말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죠. 게다가 로트렉은 자신의 어머니를 그릴 때는 노동자나, 매춘부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그립니다. 기품있는 옷을 입고, 독서를 하는 모습이었죠. 그에게도 어머니라는 존재는 진정한 여성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였을지도 모릅니다.
틀루즈 로트렉의 그림이 인기 있는 이유를 한 가지로 규정지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명징적이면서도 파격적인 포스터 그림이나, 뛰어난 표현력의 인상파 주의 화법도 그를 인기있게 하는 이유들이죠. 하지만, 저는 그 중에서도 툴루즈 로트렉을 뛰어난 예술가로 평가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대상을 대하는 태도가 남들과는 달라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권력이나, 사회가 만들어낸 선입견, 역사에 의한 전통에 기대지 않고 툴루즈 로트렉이라고 하는 존재의 눈으로 바라본 대상을 그렸습니다. 입체주의 화가였던 피카소를 비롯한 후기의 많은 화가들이 로트렉에게 영향을 받은 것도 이러한 이유가 아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