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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술호근미학 May 07. 2020

야수주의의 또 다른 창시자 "앙드레 드랭"

야수주의 화가 

 흔히들 야수주의를 논할 때, 앙리 마티스를 대표적인 작가로 뽑는다. 그 이유는 짧은 기간 동안 야수주의적 화풍을 선보이고 이내 화풍을 바꾼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마티스는 생애 전반에 걸쳐 야수주의 화풍을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마티스가 야수주의적 화풍을 가질 수 있었던 계기에 앙드레 드랭과 모리스 드 블라맹크를 빼놓을 수는 없다. 그들은 마티스가 색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왔을 뿐 아니라, 한 때는 야수주의의 화풍을 이끌어나가는 화가들이었다. 우리나라에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지만, 유럽이나 외국에서는 아직까지도 사랑받는 화가 중에 한 명인 앙드레 드랭에 대해 소개해보고자 한다.


 앙드레 드랭   

 앙드레 드랭(1880-1954)은 파리 외곽 지역인 샤투Chatou에서 부유한 상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에서는 그를 엔지니어로 키우려 했지만, 어릴 적부터 그는 그림에만 관심을 가졌고, 열다섯 살 때부터는 루브르 박물관에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다. 1898년, 그는 마티스와 인연을 맺는다. 이어 1900년에는 블라맹크를 만나 샤투에서 그의 화실을 함께 쓰며 그림을 그린다. 

Andre Derain, Self-portrait with a pipe, 1953

 1901년, 그는 베른하임 구필 Goupil 화랑에서 열린 반 고흐 전시회를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그가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마티스의 설득으로 그의 부모는 마침내 아들에게 화가의 길을 걷도록 허락한다. 1905년 여름, 드랭은 콜리우르에서 블라맹크, 마티스와 지내며 야수주의적인 풍경화들을 그려낸다. 그는 이 시기에 마티스와 함께 고갱의 작품들에 영향을 받게 된다. 아래의 그림은 드랭이 고갱으로부터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를 확연히 보여주는 그림이다. 다만 그의 그림은 고갱이 그러했던 것처럼 원시주의가 삶의 방식에 대한 반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행위와 상상적인 태도로 드러나고 있다.    

Andre Derain, Dance, 1906

   드랭은 마티스, 블라맹크, 카무엥 망갱, 마르케들과 함께 자신의 작품을 살롱 도톤에 내놓는다. 그들의 작품은 7번 방에 모여 있었다. 이 방에 들어온 유명한 평론가 루이 보셀은 그림들을 둘러보다가 이제는 잊혀진 지 오래된 어느 조각가의 아카데미 풍 대리석 작품을 보자마자 “야수 사이에 도나텔로!”라고 외쳤다. 20세기 미술 양식의 명칭과 관련된 가장 유명한 이 일화에서 ‘야수’라는 단어가 곧바로 ‘야수주의’라는 양식으로 분류된 것을 보면, 당시 야수주의 화풍에 대한 논란이 어마어마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살롱 도톤 7번 방의 작가들 

    

 이후, 볼라르의 배려로 가게 된 런던에서 드랭은 화려한 ‘템스 강변’ 연작을 완성한 뒤 돌아온다. 이 작품들은 후에, 야수주의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히게 된다. 

 하지만 이후부터 드랭의 회화 세계는 고풍 스러지고 오히려 전통적인 양식으로 퇴보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까지 한다. 그의 그림은, 1931년 『드랭을 지지하거나 반대하여』라는 제목의 평론 모음집이 출판될 만큼 양식적으로 점차 보수주의적 색채를 띠어갔다. 

Andre Derain, Arlequin et Pierrot; model Jacinto Salvado, 1924, oil, canvas, 175 x 175 cm

그럼에도 그는 성공을 이어갔고, 1935년 베른에서는 회고전이 열리고, 1937년에는 파리의 앙데팡당전에 작품을 전시함으로써 성공이 절정에 다다랐다.     


후기 인상주의의 극복


 앙드레 드랭은 1905년과 1906년 초, 최고의 화상이자 미술가들의 후원자인 앙부르아즈 볼라르에게 모네의 템즈 강 연작과 같은 작품 의뢰를 받게 된다. 그는 런던으로 떠나 30여 점의 작품을 남기는데, 이 작품들은 현재까지도 야수주의의 예가 되는 작품들로 평가받고 있다.

Andre Derain, Waterloo Bridge, 1906,


 특히 그는 이 연작들에서 모네나 다른 후기 인상파주의 화가들이 그러했듯이 변화하는 빛의 성질이나 강 위에 피어오르는 안개의 농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이전 세대가 그러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드랭은 자신의 주관적인 방법으로 이것들을 재해석했다. 그는 현실적인 모습 그대로를 반영하기보다는 색채를 통해 현실을 뛰어넘으려는 시도를 했다. 드랭은 대상과 색채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대상을 관찰하거나 그 위치를 바꾸기 위해 우리가 대상으로부터 아무리 떨어진다 하더라고 그것은 결코 충분한 것이 못 된다... 색채는 다이나마이트 뇌관 같은 것이 되었다. 색채는 빛을 방사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모든 것이 현실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참신함으로 훌륭한 생각이었다.”         
Andre Derain, Charing Cross Bridge, London, 1906,

 

Andre Derain, Big Ben, 1907, Oil, Canvas, 79x98cm

이에 대해 사라 위트필드는 자신의 저서인 『야수파』에서 다음과 같이 드랭을 평가하고 있다.      


“그의 앞에 놓인 것을 현실을 뛰어넘으려는 생각은 아마도 19세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그의 방향을 마련해 준 것 같다. 드랭에게 있어서 색채는 그림의 테마였으며, 이러한 색체라는 매개체를 통해 묘사라는 굴레를 벗어나고자 했다. 이 일련의 테임즈강 그림에서 색채는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힘과 공명을 드러내고 있는데, 그럼에도 그는 색채들의 불협화음을 피하여 '불일치'나 '다이너마이트 장치'가 완전히 통제되어 있다.”     


 드랭의 후기 작품들을 살펴보면 그가 온전히 야수주의 화가였다고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1905년부터 1907년 사이 제작된 그의 작품들은 야수주의의 핵심인 색채를 통한 해방을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사라 위트필드, 이대일 옮김, 『야수파』, 홍진 프로세스, 1990.

스티븐 파딩, 박미훈 옮김, 『501 위대한 화가』, 마로니에북스, 2009.

할 포스터 외, 배수희 옮김, 『1900년 이후의 미술사』, 세미콜론, 2007.

Andre Derain, Letters to Vlaminck (1905-1909) in : Charles Harrison & Paul Wood (ed.), Art in Theory 1900-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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